분류학의 추락

병합파는 겨우 27개의 목을 알아본 반면, 세분파는 무려 48개의 목을 식별했다(다시 말하지만 두 무리 모두 같은 새들을, 즉 세상의 모든 새를 보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초병합파 분류학자들은 모든 새가 사실은 훨씬 작은 무리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새들은 자기들만의 강은 고사하고 목도 이룰 자격도 없으며, 대신 모든 새를 한 과에 다 몰아넣어 파충류 목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실상은 어느 쪽인 것일까? 새들은 자기들만의 목을 갖출 자격도 없는 걸까, 아니면 스물일곱 가지 혹은 마흔여덟 가지 목으로 이루어진 걸까?
분류학자들이 세계의 여러 새 종들을 속으로 묶으려 했을 때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다. 병합파는 전부 2,600가지 속을 제시했다. 한편 이른바 초세분파는 바로 그 똑같은 종들을 1만 개가 넘는 속으로 분류했다. 생명의 세계는 분명 그중 하나를 명백히 옳거나 틀린 것으로 만들 방식으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새가 그렇게 분류하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나 특별히 새가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일은 분류학의 지도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병합파–세분파 다툼의 본성이었고, 이 불행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 정지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5349

그의 논문(마이어의 논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는 질문(하필 이렇게 배치하고 이렇게 이름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에 답하기 위해, 마이어가 그 근거가 된 어떠한 도해나 데이터나 수치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자연의 질서에 대해 갖는 자신의 감각, 자신의 인지를 수량화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뻐꾸기들을 보고 또 보고, 종다리들을 보고 또 보고, 그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무수한 특징에 관해 생각해본 뒤 형성되는 그 강력한 질서의 감각, 자신만의 전문적 견해에 도달하게 되는 무의식적인 숙고의 과정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실제로 분류학자가 말할 수 없는 것, 어쩌면 말하기를 시도해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분명히 의견을 밝히는 분류학자들도 일부 있다. 심슨이 분류학자에 관해 쓴 글을 봐도 그렇다. “어쩌면 테니스 선수나 연주자처럼, 분류학자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해 내적으로 너무 깊은 성찰에 빠져들지 않을 때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다.”15
이 말은 분류학자가 테니스 시합에 나가거나 음악회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면 괜찮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마이어와 애머던은 과학자임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바로 이런 모호한 직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질서의 감각, 린나이우스에게는 너무나 훌륭한 수단이 되어주었던 이 모든 것은 점점 더 그들을 민망하게 만들고, 점점 더 과학적으로 엄격해지는 생물학자들의 집단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분류학자들의 시도에 계속해서 큰 짐이 되고 있었다. 분류학은 나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중이었고 그 무엇도 그 추락을 멈출 수 없어 보였다. -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 정지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62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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