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종은 아수라백작과 유사할 만큼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우유부단하면서도 냉혹하고 독선적인 면을 보였다. 이유는 자신의 왕권유지를 위해서였다. 연산군이라는 강력한 왕을 몰아낸 신하들에게서 자신이 몰려나지 않고 왕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믿고 의지할만한 신하 한명을 발굴하여 그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고, 그를 방패삼아 왕으로 버티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39년간이라는 짧지않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개혁다운 개혁을 못한 것은 이러한 중종의 제자리 뛰기의 삶 때문이다.

중종은 연산을 뒤엎고 나라를 뒤바꾼 인물들인 박원종, 유순종, 성희안을 정승으로 세우고, 어중이 떠중이를 포함하여 수많은 신하들을 공신으로 삼은 후, 그 그늘안에 숨었다. 그러나 세정승도 세월엔 장사가 아니었다. 정승에 올랐으나 얼마 못가 세상을 달리한다.

이어 그가 의지한 인물은 조광조였다.

 

중종의 첫부인 신씨는 연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로 폐비가 되었다. 조강지처를 생이별하게 된 이 사건은 중종에게 있어서 신하들의 권력에 대한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원자를 낳아주고는 25살의 나이에 일찍 눈을 감는다. 이에 박상, 김정은 폐비 신씨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상소로 올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죄를 받게 된다. 이때 새롭게 급부상한 조광조는 이 일에 대해서 언로를 막히게 한 것이라 하며 사간원, 사헌부 대간들을 질타하게 되고, 왕은 그의 말을 듣고 대간 전원을 교체함으로써 스승 조광조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짧은 기간에 독무대에 서버린 조광조를 중종은 의지하였고, 조광조는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그런데 조광조가 왕의 맘을 몰라준다. 너무 개혁 드라이브를 세게 밀어붙이기로 나왔다.

소격서라는 일월성신에게 제사하는 도교식 제례 폐지라는 걸 얻어냈지만, 자신에 대한 왕의 총애를 잃었다. 특히 가짜공신을 가려내는 것에서 도를 지나쳤다. 결국 중종은 4년만에 조광조라는 패를 버린다.

 

중종은 조광조를 대신하여 남곤, 심정에게 권력을 쥐어준다. 그리고 조광조의 동지들을 차례차례 죽이게 한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김식, 김정, 기준, 안당 등이 세상을 달리한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탐관오리는 날뛰고, 재정은 빈약해지고, 국방력은 약화되고, 대간들도 적당주의에 처했다.

남곤이 나이늙어 죽은 후, 유배에서 돌아온 김안로에게 권력을 쥐어준다. 이때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작서의 변'이라는 것으로 꼬리잘린 죽은 쥐가 동궁에 달려있는 것이었고, 이는 동궁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경빈 박씨가 누명을 쓰고 폐서인되었고, 복성군도 쫓겨난다. 이항, 심정이 사약을 받으며, 그간 권력을 쥐었던 인물들이 추풍낙엽처럼 떨구어졌다. 김안로가 보복정치를 한 것이다. 한때 한명회나 조광조보다도 더한 권력의 힘을 쥔다.

 

하지만 김안로도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가 들어서자, 유배되고 사사된다. 중종은 때마다 적절한 대타를 기용하며 이전의 타자를 몰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보디가드 역할을 할 인물에게 기댄다. 정치란 이런 비혈하고 비겁하고 싸가지가 없는 것인가. 아무튼 중종은 많은 보디가드들을 기용했었으나, 외로운 군주였던 것은 틀림없다. 피바람이 그치지 않는 궁중. 보복정치 속에서 바른 말을 하는 신하보다는 권력을 쥔 자의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던 때이다.

 

이상정치 실현을 해보고자 했던 유학자인 조광조가 뜻을 다 못이루고 토사구팽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한류열풍에 한 축이 된 '대장금'도 중종 시대의 의녀였다고 하는데, 실록엔 고작 10여차례의 짤막한 내용만 나온다고 하는데, 이로써 드라마를 만들어 냈으니, 창작하는 분들이 가진 능력은 참 대단한 실력들이다.

 

 

<대장금에서의 중종 역할한 임호씨>

 

<중종, 인종, 명종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여인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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