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나의 초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을 떠올려본다. 칠판 먼지 가득한 교실, 높다란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은 늘 "자, 교과서 OO쪽 펴세요"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곧 교과서 공부'라는 공식은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초임 시절의 나 또한 교과서는 '반드시 익혀야 할 것'이란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믿음은 첫 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교과서 내용을 아이들에게 충실히 가르쳤건만, 아이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기 위해 수업 기술을 좀 더 화려하게 사용해보기도 했다. 다양한 게임이나 퀴즈를 하면 아이들은 반짝 하고 흥미를 가지며 활동에 빠져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 재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롭고 재미있는 기술을 활용해야 했던 것이다. 무언가 다른 차원의 고민이 필요했다. 문득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교과서를 펼쳐들고 살펴보았다. 그러자 마침내 조금씩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기술적 측면)가 아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내용적 측면)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7차 교육 과정 교사용 지도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교과서는 금과옥조가 아니므로 하나의 '텍스트(text)'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 이 한마디는 그동안 내내 조여 왔던 나의 숨통을 시원스레 트이게 해주었다. 그래! 교과서는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다.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든 다른 자료를 활용하면 되지 않는가?

아이들이 지루해하던 읽기 책의 딱딱한 시를 어린이들이 쓴 시로 바꾸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대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한다. 제 또래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자기와 닮은 삶이 담긴 글에서 아이들은 그제야 배우는 즐거움을 찾고 적극적으로 배움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수업 기술이 없더라도 아이들은 기꺼이 수업에 푹 빠져들었다.

신이 난 나는 국어 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의 내용도 재구성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려동물을 단순히 '애완동물'과 이득을 얻는 '경제동물'로 구분해 가르쳤던 실과 교과서는 도덕의 생명 존중 단원과 통합해 재구성했다. 아이들은 삶을 함께 하는 반려동물의 존재를 배우고, 버려진 길고양이와 유기견 이야기를 접하며 함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깨달아갔다. 이때껏 교과서 안에 갇혀 있었던 나와 아이들의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색다른(?) 시도는 곧 단단한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선생님, 우리 공부는 언제 해요?" 하고 묻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나와 많은 시간을 눈을 빛내가며 배웠건만, 교과서를 펼치지 않은 이상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그것을 '공부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학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교과서를 펼치고 그 빈 칸을 채우지 않는 이상 '공부 하지 않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아이들의 본능적인 배움을 향한 욕구는 이런 고정관념 속에서 단순히 교과서 안에 박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려면 주어진 대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교과서'와 '교육 과정'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서 막막한 갈증을 느끼기 보다는 내가 먼저 제대로 알고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나에게 <교과서를 믿지 마라>(바다출판사 펴냄)는 그야말로 사막의 우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 <교과서를 믿지 마라>(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더구나 이 책을 쓴 이들은, 내가 발령 받자마자 온갖 공부 모임에 쫓아다니다가 만난 그야말로 나에게는 '슈퍼맨' 같은 선생님들이다. 이름만 떠올려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슈퍼 선생님들! 아이들과 좌충우돌 하루하루를 보내기에도 바빠서 지쳐 나가떨어지는 마당에, 교사로서의 생활 뿐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길까지 열심히 걷는 분들이다.

인맥 자랑을 조금만 하자면, 신은희 선생님은 초등 교육 과정 부분에서 그 어떤 학회를 뒤지더라도 이만한 전문가가 없을 만큼 훌륭한 현장 실천가이자 연구자이다. 또 초등 미술의 대가 이부영 선생님은 한 번 그 집에 놀러가기만 하면 가득 쌓인 아이들의 작품 자료만 보고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성실 선생님은 이미 <재미있는 수학 시간 만들기>와 같은 초등 수학 지도서를 여러 권 내셨고, 수학과 참교육 과정을 오래 연구해 교과서까지 만든 분이다. (물론 나머지 선생님들 또한 교사로서의 농익은 내공이 과즙처럼 뚝뚝 떨어지는 훌륭한 분들이시다.)

이만큼 '뽀쓰' 넘치는 선생님들이 독수리 오형제(?!)처럼 짜잔, 하고 나타나, 현장 선생님들 대신, 누더기 같은 교과서와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는 교육과학기술부에 시원한 철퇴를 날려주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많은 선생님들의 반응 중 가장 압도적인 반응은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이다. 학부모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특히 교사들에게는 일종의 '필독 교양서'와 같기에 나는 읽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어야 했다. 더구나 읽는 내내 그 통쾌함에 감탄사까지 추임새로 넣어가며!

교사들에게는 통쾌하겠지만 만약 이 책을 학부모나 교사가 아닌 누군가가 읽는다면 조금 충격적일 거란 생각이 든다. 교과서가 공부의 전부라 여겨왔건만, 그 교과서가 사실은 이렇게 엉터리라면? 이 책은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교과서를 학년별, 교과별로 조목조목 짚어가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 나온 3학년 학부모의 분노는 이해가 가다 못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장관님! 왜 21÷3=7인지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은 자기의 현재 발달 수준보다 조금 더 어려운 정도의 과제가 주어질 때에 도전의식을 가지고 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어려운 수준이 주어진다면? 도전의식은커녕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그 과목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학부모의 경우 자기 아이가 교과서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사교육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단지 수준뿐만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모든 교과에 걸친 과도한 학습량에 의해 아이들은 타고난 배움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리고 학습에 치이게 된다. 흥미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탐구하며 이해해가는 과정은 생략되고 계속해서 다음 학습을 위해 기계적으로 배워나가야 한다. 그야말로 책의 목차대로 '아이들과 교사를 바보로 만드는'. '사교육과 학습 부진아를 조장하는' 교과서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수시로 개정되는 교육 과정에 있다. 사실 국가의 교육 과정 또한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들어지는 과정과 검토 과정에 허점이 있을 경우 당연히 그 결과물 또한 부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서는 그러한 교육 과정 개정과 교과서 탄생에 대한 비밀을 속 시원히 드러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방향을 바꾸어 졸속으로 찍어내 충분한 협의와 안내 없이 현장에 그야말로 뚝 떨어지는 교육과정은 교사와 학부모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인력도, 사전 연구도, 검토도, 심지어는 그 바뀐 교과서의 연수 과정마저도 모두 '총체적 부실' 그 자체인 교과서를 받아 드는 것도 아이들인 것이다.

책을 덮으며, 실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동안 내가 못 가르쳐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 잡았다. 이 나라에 사는 이상 그 누구도 교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교육을 받고 자라나며, 또한 우리의 아이들도 앞으로 교육받아야 하기에.

그렇다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교육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교과서와 교육 정책을 정부와 교사에게만 맡겨 두지 말고 학부모들이 끊임없는 질책과 요구,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 이야기가 마음에 유독 깊이 남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이 잘못된 교과서 때문에 고통 받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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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국에 조지 오웰은 '반공 작가'의 얼굴로 알려졌다. 냉전 체제의 반공주의를 국가적 사명으로 내걸었던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오웰의 작품은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도 반공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읽혔다.

이런 오웰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진 계기는 백남준이 1984년을 맞이하면서 준비한 <굿모닝 Mr. 오웰>이라는 퍼포먼스였다고 할 수 있다. 반공주의 일변도로 받아들여졌던 오웰에게 다른 면모가 있다는 사실이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통해 실낱같이 드러난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오웰의 비판이 제국주의를 포함한 국가-권력 일반에 대한 거부였다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한국 사회는 10여 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반공주의 작가로 선택적으로 수용되었던 그가 실상은 사회 정의에 민감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 인물이라는 실상은 극적인 반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웰의 전모가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이념 지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들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의 펭귄출판사에서 거의 잊혀져가던 이 작가의 에세이집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서 재출간하고, 2002년에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편집한 <오웰이 왜 문제인가>라는 학술서가 세상에 나오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다시 점화되었다.

오웰은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이름으로 1903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교구 목사였지만, 자손들에게 재산을 거의 남겨주지 않았다. 19세기 교구 목사의 수입 규모를 생각한다면, 이례적인 일이다. 오웰은 이런 자신의 집안 배경을 "상중하층 계급"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줄곧 영국에서 교육 받고 자란 블레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오웰로 다시 태어난 곳은 이제 미얀마로 불리고 있는 버마였다. 버마는 프랑스계인 오웰의 어머니가 자란 나라이다. 외갓집이 있는 버마로 건너가서 한동안 하급 경찰관으로 일하는데, 이 경험이 그를 작가로 만든 자양분이었다.

버마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식민주의의 실상이었다. 버마에서 식민 지배의 국가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겪은 생생한 경험을 녹여낸 에세이가 바로 '코끼리를 쏘다'이다. 이 글에서 오웰은 식민주의와 식민지 주체의 관계에 대한 선구적 고찰을 선보인다. 그의 정치화는 이런 식민지 경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남다른 사회적 경험을 통해 그는 당시로 본다면 파격적인 주장들을 쏟아낸다. 사회적 자유의 복리를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상황을 지칭하는 '오웰리언'이라는 말에 담긴 메시지도 그 중 하나다. 그에게 개인은 군중과 국가라는 두 갈래 사이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거미줄 같은 존재였는데, 이와 같은 오웰 특유의 사고방식은 버마에서 관찰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 <숨 쉬러 나가다>(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오웰은 사르트르처럼 철학적인 에세이스트이자 동시에 작가이기도 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냉소적인 표현들을 내뱉던 이 지식인의 소설은 그러므로 에세이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숨 쉬러 나가다>(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도 마찬가지로 이런 작품 중 하나이다.

<동물농장>이나 <1984>와 같은 '장르' 소설의 작가로 오웰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위트 넘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리얼리스트의 모습을 선사할 것이다. 오웰은 폐결핵 때문에 모로코에서 요양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서 오웰은 '현대성'이라고 불리는 위기의 세계와 일전을 벌인다. "머리 위로 폭격기 한 대가 저공비행"을 하고, 곳곳에서 전쟁을 몰고 오는 파시즘의 전조가 보이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 소설을 짓누르고 있는 대공황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묘사들.

새빨간 카운터 뒤로 높고 하얀 주방 모자를 쓴 아가씨가 아이스박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 뒤 어디선가는 라디오가 투당탕탕 깡통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델 가는 거지?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생각했다. 내 기분을 처지게 만드는 분위기 같은 게 있는 곳인 것이다. 모든 게 매끈매끈하고 반짝반짝하고 유선형이다. 어딜 보나 거울이나 에나멜이나 크롬으로 마감되어 있으니 그렇다. 음식이 아니라 장식에만 공을 들인 것 같다. 음식은 물론 진짜배기가 아니다. 미국식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음미를 할 수도 없고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 믿기도 어려운 허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든 게 무슨 상자나 깡통에서 꺼내거나, 냉장고에서 내오거나, 꼭지에서 따르거나, 튜브에서 짜낸 것들이다. (39쪽)

완벽한 '인공'의 세계가 여기에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웰의 문장들은 대공황기에 횡행했던 아르데코 미학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에나멜이나 크롬으로 재료를 마감한 장식은 이 시대를 풍미했던 미학을 대표한다. 오웰의 세계관은 이처럼 '진짜'를 가리는 장식성의 위선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다. 이와 같은 진술에서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루얼 톨킨과 유사한 '영국적인 것'의 소박성과 유사한 느낌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군중이 개인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우려도 노골적으로 소설에서 드러난다. 반파시즘 강연회에 참석한 주인공이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 냉담한 관찰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 모습에서 이런 오웰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반파시즘이라는 것도 괴이한 생업"이라는 말은 곧 이은 "히틀러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을 할까"라는 반문을 통해, 공허한 정치적 이분법에 대한 회의를 표현한다.

이런 오웰의 정치관은 유명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할 수가 있는데, 결코 자유의 실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잠깐의 일탈을 꿈꾸지만 여지없이 현실의 중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오웰은 '바른 소리'를 굽힘없이 낸 작가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만큼 지금 현재가 '세계 없음'이라는 탈이념의 시대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그를 올곧은 이미지로 남겨 놓은 것은 '순수한 정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혐오한 것은 독재에 대한 두려움과 타협이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해 비타협적이었던 오웰이 군사 독재 시절을 통과하던 한국에서 반공주의 작가로 수용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이와 같은 '한국적 수용'은 우연의 산물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오웰이 주창했던 '정치적 글쓰기'의 한계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옳다면, 오웰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떤 국가나 체제도 개인을 완전하게 흡수하거나 포섭할 수 없다. 말하자면, 빅브라더는 불가능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웰이 <1984>를 쓸 때 명백하게 염두에 두었을 그 스탈린 체제의 붕괴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여러 모로 <숨 쉬러 나가다>는 오웰의 초기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를 향한 회귀를 꿈꾸지만, 결국 현실의 페넬로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웰에게 문학은 불가능한 일탈을 보여주는 것에 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작업"으로 선회했을 테다.

이 소설은 그 중간 지점에 놓여서 방황하던 한 지식인의 영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한계는 명백하지만, 그의 시도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 여전히 절실한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를 되풀이 읽어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순수한 정치에 대한 그의 열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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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사회와 그 적들>(알렙 펴냄)을 보는 순간 1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1996년의 일이다. 모 신문사에 경력 기자로 입사를 했는데 특기를 쓰는 란에 '독서'라고 쓴 것이 책을 좋아하는 주필의 눈길을 끈 모양이었다. 그는 면접장에서 왜 독서를 취미가 아닌 특기라고 적었는지, 읽고 있는 책은 무언지 물었다.

그 때 든 책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민음사에서 두 권으로 나왔는데 다니던 회사를 옮긴 뒤 새 직장을 얻기까지 두어 달간 여유가 생기면서 씨름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필이 "그 책의 번역판이 나왔나"라며 고개를 갸웃하기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한 일이 있다. 아, 물론 책 자체의 존재에 자신 있게 답한 것뿐이었다. 어찌어찌 해서 책을 읽어내긴 했는데 공부가 얕아서, 그리고 조금은 번역의 문제가 겹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책 읽기 전이나 후나 세상을 보는 눈이 거의 달라진 바가 없다는….


▲ <불량 사회와 그 적들>(김두식 외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을 보니 포퍼의 책을 패러디했다는 인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은 2010년 7월부터 '프레시안 books'에 실렸던 인터뷰와 좌담을 모은 것이다. 대체로 책 또는 책의 저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우리 사회의 쟁점을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포퍼는 자신의 책에서 전체주의 비판에 무게를 두면서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사회를 위한 틀을 제시했다. 비판 받지 않아도 좋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용인되지 않고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이 책은 바람직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선 포퍼의 책과 같지만 그의 책이 철학적이고 비판적이라면 이 책은 이해하기 쉽고 대안 제시에 무게 중심을 두려했다는 점이 다르다.

'불량 사회'. 열린 사회와 분명 대척점에 있는 사회를 꼬집는 말이다. 제목이야 전적으로 편집자의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전복의 대상이 아니라 개량의 대상이 될 만한 사회를 일컫는다는 인상이다. 도대체 어떤 사회가 불량 사회일까. 국민 대부분이 꼬집어 말할 수 없을지라도 현재 우리 사회가 '우량 사회'가 아니라는 점을 느끼기에 책을 펼치면서 기대감은 커진다.

<헌법의 풍경>(교양인 펴냄),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펴냄) 등의 김두식은 우리 사회에 "사탄의 시스템"이 만연했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그가 말하는 사탄의 시스템은 비정규직이나 교육 문제처럼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바꾸려고 엄두도 못 내는" 제도이자 "평범한 사람을 학살의 손발로 만드는" 절대적인 무엇이다.

몇 년째 책 읽기 운동을 펼쳐 온 도정일은 한국을 "좀비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는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기피하고 혐오하는 사유의 정지"에 빠져 있다면 그 원인으로 네 가지 바이러스를 들었다. 약자 도태-승자 독식이라는 "밀림주의 바이러스",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 만능주의", "쾌락 지상주의"와 기성품으로 된 지식 정보와 정답 찾기에 몰두하는 "착각 바이러스"가 그것이다.

문제점 파악과 그 원인 진단이 제대로 되면 해결의 첫 단추는 잘 꿴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진단은 단순한 수사(修辭)로 흘려들을 게 아니라 곱씹어 볼 만하다. (물론 이들 두 사람만이 이런 진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책에 실린 13명의 '좋은 시민'의 발언에는 크든 작든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책에 실린 좋은 시민의 면면은 화려하다. 적어도 비판적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바라보거나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렇다. 앞의 두 사람 말고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펴냄)의 장하준, <진보 집권 플랜>(오마이북 펴냄)의 조국,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의 엄기호, <리얼 진보>(레디앙 펴냄)의 정태인 등 지난해 한국 사회를 달궜던 책의 저자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우량 사회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대목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을 단칼에 좋아지게 하는 비법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더욱 이들의 목소리엔 신뢰가 가긴 한다. 조국은 진보·개혁 진영을 향해 권력을 잡아서 세상을 바꾸려는 정당의 구실을 하라고 권한다. 그러기 위해 '통합+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문성근이 주도하는 '100만 민란 프로젝트'의 의미를 평가하고,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에 노무현 정부의 과(過)를 인정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춰 선다. 조국은 아웃사이더를 자임한다. 정치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리고 헌신적인 진보 인사들을 위해 그렇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명분이지만 아쉽다. '그림'만 그리고, '도가니'만 끓이는 데 그쳐서다. 이런 아쉬움은 '사탄의 시스템을 직시하고 그에 맞서 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김두식에게서도 느껴진다. 그는 싸우는 방법에 관한 것은 본인의 능력 밖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런 면에선 장하준의 발언에서 오히려 정치한 논리와 진정성을 만날 수 있다.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한 자리의 토론을 나눈 것은 책의 판매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긴 한다-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비판을 받는 자신의 주장을 유지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중복되는 감도 적지 않지만 비판에 맞서는 그의 자세는 보기 좋고, 설득력도 있다.

무엇보다 "주어진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대안이 없습니다. 힘 있는 이들이 규칙을 만들어 놓고 다른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대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력을 하면서 자꾸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대안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죠." 이런 말 어떤가. 공감이 가지 않는가.

아니면 "사회 개혁이라는 게 원래 이렇습니다. 간단히 될 것 같은 일만 떠올리면 개혁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하고 어려워 보여도 장기적으로 그것을 해나가려고 노력을 해야 개혁이 이루어지지요. 그래야 바꾸지 않을 것도 바뀝니다." 같은 이야기, 그 자체로 속이 시원해진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나 글을 모은 책은 그 자체로 장단점이 있다. 잘 고른 글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단점으로는 자칫하면 내용이 중복되거나 모순되기도 하고 늘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인터뷰어의 내공으로 그런 단점을 상당 부분 극복해냈다. 인터뷰 대상자의 책을 꼼꼼히 읽고 적절한 질문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풀어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뤘으면서도 차분하고, 사변적이지 않다. 그러나 정치 부문에서 일부 토론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치되거나 언뜻 가능성이 옅은 대안이 실려 불편한 감을 준다.

거듭 말하자면 문제를 바로 보는 것이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느끼는 우리 사회 이슈들을 다각도로 짚었다는 점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의의 있다.

굳이 토를 달자면 '좋은 시민'말고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못한 필자 같은 장삼이사들의 불편한 심정을 헤아리려 했다면 그 편이 더 외연을 넓힐 수 있지 않았을까. 뭐, 어쨌거나 책에 실린 인터뷰이들 같은 '불량 사회의 적'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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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동포(在日 同胞). 요즘엔 그냥 '자이니치(在日)'로만 주로 호칭되는 존재. 자이니치는 원래 말 그대로 일본에 있다거나 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이니치 외국인, 자이니치 미군처럼 본디 일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일본에 있거나 살고 있는 존재들 앞에 붙어 그것을 수식하는 이 말이 주로 한국·조선계 재일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데는 나름의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왜 자이니치 한국인, 자이니치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자이니치라고만 쓸까? 그냥 쓰기 편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누가 '축소 지향형 일본'이라고도 했듯이 모든 걸 축약해버리는 일본적 풍토를 분명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자이니치 뒤에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붙이면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심지어 손해 보거나 위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생기고, 이어서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가 생기기 전에, 즉 한반도가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쪼개지기 전까지 일본에 살던 한반도계 사람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 시절에 강제 동원 당하거나 살기 위해 그 땅으로 이주한 한반도 사람들은 그냥 조선인(조센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사실상의 미국-일본 단독 모략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까지는 자이니치 외국인이 아니라 조선계 일본인이었다. 그 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자신들이 강제로 또는 사실상 강제로 끌고 간 조선 사람들의 일본 국적을 아무 책임감도 없이 일방적으로 박탈해버렸다.

1965년 한-일 국교 수립이 이뤄지기 전까지 그들은 그냥 자이니치 조선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대다수는 국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이니치 조선인의 대다수는 무국적자들이었다. 조선인은 결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국교도 없는 이른바 '북한' 국적을 취할 수도 없었거니와 조선인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들이 한반도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조선인으로 존재했다.

1965년 이후 원해서든, 먹고 살기 위해서든 다수의 자이니치 조선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자이니치 한국인이 됐다. 지금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등록된 자이니치 한국·조선인들은 모두 약 58만 명. 이 가운데 특별영주권을 지닌 오래전부터의 자이니치 한국·조선인 수는 40만 남짓이고 18만 정도는 비교적 최근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유학, 사업 목적의 재일 포함, 이른바 '뉴커머')이다. 그리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한국·조선계 일본인들이 약 30만인데 이들까지 합하면 자이니치는 90만 안팎이 된다.

원 자이니치('올드 커머') 40여만 중에 한국적을 뺀 '조선적'은 3~4만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 조선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취득자가 아니라 한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원래 조선인들로 사실상 무국적자들이다. '조선적'이란 실질이 없는 임시방편적 기호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 걸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분단 이전의 원래 조선, 하나였던 한반도 소속임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어머니>(강상중 지음, 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1998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국·조선계 자이니치로는 처음으로 도쿄 대학 정교수가 된 강상중(61) 정보학연구소(대학원) 교수이자 도쿄 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한국적 자이니치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남도 창원, 어머니는 진해 출신이다. 경상남도 출신이니까 당연히 한국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해다.

자이니치 한국·조선인들 전체의 약 50%가 경상도 출신이고 16% 남짓이 제주도 출신이며, 휴전선 이북 출신은 0.5%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조선적'도 거의 대부분이 한반도 남부 출신이다. 한국적이 많은 것은 1965년 한-일 국교 수립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보장해줄(사실 제대로 보장해 준 적도 없지만) 나라가 처음으로 등장해 다수가 그쪽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며, 또한 어쩔 수 없이 취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시부야 쪽에 '씨네콰논'이라는 영화 제작·배급사를 차리고 최양일 감독과 함께 영화도 만들고 <쉬리>, <서편제> 등을 일본에서 흥행시키기도 했던 이봉우 씨는 조선총련이 운영하는 이른바 민족학교 출신으로 조선적 자이니치였으나 결국 한국적을 취득했다. 조선적이라는 모호한 신분으로는 일본이란 나라를 드나들기가 너무 힘들고 외국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즈니스 차원에서도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적으로는 일본에서 나갈 때도 제출해야 하는 서류 등 조건들이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서울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언제든 들어오라고 허가해주는 나라도 흔치 않았고, 일본으로 재입국하는 절차도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이러다간 사업 망치겠다고 생각한 이봉우 씨는 결국 한국적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강상중 교수 부모는 한국적을 취득했으나, 그의 어머니 우순남(일본명 나가노 하루코. 한 세대 앞 한국 여성들 이름으로 그 흔했던 '춘자(春子)'가 역시 흔해빠졌던 일본 이름 하루코였다) 씨는 1941년 16살 나이에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딱 한 번 맞선을 본 당시 26살의 강대우(나가노 게이야) 씨를 찾아 도쿄로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울며 헤어졌던 그리운 어머니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국적 때문이 아니라 살기 어려워서, 조국이 분단되고 전쟁까지 나는 바람에 돌아갈 곳도 없어서 일본에 눌러앉았다. 도쿄가 아니라 멀리 남쪽 섬 규슈 구마모토 외진 곳까지 흘러들어갔다. "함석지붕에 조악한 널빤지를 덕지덕지 이어붙인,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좁은 언덕길에는 푸르스름하고 노란 색깔이 섞인 분뇨나 배수가 배어나오고 코를 찌를 듯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취락 지구 여기저기에 돼지우리가 만들어져 돼지들이 분뇨처리 역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뇨에 범벅이 된 돼지들은 암거래로 만드는 막걸리 냄새를 지워주기에 안성맞춤인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도 했다"던 그곳에서 나가노 게이야, 하루코 씨는 차별과 싸우며 돼지도 키우고 막걸리 밀조와 암거래로 입에 풀칠을 하면서 두 아들(장남은 어릴 때 못 먹어 영양실조로 죽었다)을 키웠다. 그리고 고철·폐품 수집상(고물상)을 하면서 정말 억척스레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막내 나가노 데쓰오를 와세다 대학에 보내고 독일 뉘른베르크로 유학까지 보냈다.

그 억척스러웠던 강대우, 우순남 씨가 바로 자이니치 1세들이다. 그들은 일본에서도 조국에서도 한 번도 제대로 조명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흔적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돈 좀 있는 '반쪽바리'로 경멸 내지 경원 당했고, 일본에서는 제삼국인으로 차별받고 천대받았으며 경계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자이니치들은 일제의 죄과를 입증해주는 강제 동원 대상자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비참했던 과거와 일본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기억해내야 할 때나 거론되는 존재들이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들을 잘 모른다.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주인공 삼아 그려낸 그들 자이니치 1세의 역사이자 존재 증명이다. 처참한 수난사이되 그것만이 아닌, 그것을 딛고 억척스레 일어서는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1972년 22살 나이에 처음으로 조국을 찾은 뒤 사춘기의 방황, 자신의 정체성 혼돈에서 해방돼 본명 강상중을 되찾은 자이니치 2세 강 교수의 성장 소설이며, 도망치려고만 했던, 두려움과 수치와 혐오와 사랑과 연대가 뒤섞인 어머니의 세계와의 화해이자 합일이며 부모 세대에 대한 애틋한 헌사다.

일본에서 지난해 6월 출간돼 10개월 만에 33만 부나 팔렸다. 그 독자의 대다수가 일본인이라고 출판사 슈에이샤(집영사) 담당 편집자도 저자 강 교수도 얘기했다. 일본인들 마음을 움직인 그 무엇이 한국에서도 통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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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날한시에 태어난 것으로 모자라 한날한시에 장편 소설을 출간하다니. 쌍둥이는커녕 형제 하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금 서럽기도 하다. 한 친구가 내게 말한다. "각자 소설을 썼는데, 알고 보니 같은 내용… 뭐 그런 게 아닐까? 기적적으로." 어쩐지 그럴 듯한 이야기다. 물론 그랬다면 굳이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장은진의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자음과모음 펴냄)와 김희진의 <옷의 시간들>(자음과모음 펴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과연 그들의 외모만큼이나 소설도 서로를 닮았을까, 하는 궁금증. 출판사의 마케팅도, 언론의 관심도 그 부분에 집중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권의 소설을 읽는 내내 '닮은 그림 찾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몇 개의 단어에 동그라미를 친다. 라면, 불면증, 책, 니체, 도둑과 기타 그리고 다시 라면. 이 정도면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식으로라도 쓸 수 있겠지, 하는 생각. 하지만 그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는 순간 얄팍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쌍둥이 소설가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싱크로율' 95%에요. 똑같은 복제 인간이 다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보면 돼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시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닮은 것이 뻔한 그들의 글에서 굳이 닮은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무얼 한단 말인가? 말하자면 상상력의 부재.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닮음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혈연을 끌어들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으며 비슷한 것을 욕망하는 우리들의 조건은, 삶은 얼마나 닮아있는가. 나는 남과 다르다는 똑같은 착각까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느낀 불만은 그들의 닮음 때문이 아닌 우리들의 닮음 때문이고, 그곳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한계, 즉 우리 모두의 한계 때문이라고. 물론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작품을 굳이 한 자리에서 다뤄야하는 나의 비루한 자기변명에 다름 아니겠지만.

*


▲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장은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장은진의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는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그녀의 전작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드무비 형식의 소설이다. 차이가 있다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닌, 함께 길을 떠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길은 그저 핑계일 뿐, 이야기는 세 명의 인물들이 만들어 낸 기묘한 삼각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쇠 가게를 지키며 외롭게 살아가는 소설가 지망생 와이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다. 무려 30만 원이 찍힌 전기 요금 고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범인은 제이. 빈집에 몰래 들어와 전기를 훔쳐 먹던 그녀는 와이의 집에서 먹게 된 전기의 '쓸쓸한 맛'에 반해 그의 집에 눌러 살고 있었다. "가전제품을 두루 갖춰 놓고 살지 않는" 가난한 도시 남자의 집에, 에너지 효율이 낮은 전기 먹는 하마(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 아름답다지만)가 들어온 셈이다.

물과 전기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는 제이는 온몸에 고압의 전기가 흐르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 감전될까 두려운 와이는 그녀를 섣불리 내쫓지도 못하고 그저 타박만 할 뿐이다. 나가라는 것만 빼고 뭐든지 하겠다는 그녀를 부려먹을 요량으로 라면을 끓여오게 하는 와이. 하지만 그녀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파 송송 계란 탁' 라면을 끓여 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파와 계란이 라면 특유의 쓸쓸한 맛을 해치는 것을, 그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와이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의 집에 그녀를 버려 놓고 오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케이는 부자고, 부자는 나쁘고, 게다가 케이는 아오이 유우를 닮은 와이의 여자 친구를 가로챈 악질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계획.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완벽한 계획이 그렇듯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열쇠공이라는 직업을 십분 살려 집안에 몰래 들어가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들 앞에는 이제 막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던 케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케이의 목숨을 구하게 된 와이. 케이는 너무나 순순히,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제이를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제이는 가전제품이 아니고, 그런 대접에 진절머리가 난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제이.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단서는 하나다. 제이가 묘사한 집 주변의 정경을 케이가 받아 그린, 바다와 구름다리와 숲이 있는 그림 한 장. 그렇게 그들은 제이의 집을 찾아주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물론 모든 비용은 케이가 대는 조건으로.

문제는 지금부터다. 무릇 길을 떠난다면 그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는 상황이 이야기에 녹아들어야 할 터. 아무리 이야기의 중심이 그들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관계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에는 어떤 여정(그것이 '旅情'이건 '旅程'이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을 위해 그들이 꾸린 것은 배낭도 아니고 봇짐도 아닌, 삐뚤어진 관점과 아집뿐이라는 듯.

그들은(특히 화자인 와이는) 시종일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결국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 셈이다.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대신 그들은 말을 한다. 해묵은 오해도 순식간에 해결하는 강력한 대화의 힘!) 그들의 여행과 비교하면 프랑스의 귀족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가 42일간 가택에 연금된 상황에서 쓴 <내방 여행>이 마치 다른 성운으로 떠난 우주여행처럼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다.

현실감이 없기는 인물들도 마찬가지. 가난 때문에 대학도 포기한 채 열쇠 가게를 운영하며 술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와이는 오직 전기 요금 때문에 (이런 원고를 몇 편은 써야 벌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긴 하다!) 제이를 쫓아내려는 인물이다. 그가 계란과 파가 들어간 라면을 싫어하는 것도 가난 때문이다. 그는 케이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제이가 끓인 라면을 먹으며 생각한다.

그렇다. 라면 먹을 때마다 쓸쓸하다고 느꼈던 건 혼자 먹어서가 아니라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아서였다. 라면에 계란 하나 맘 놓고 넣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나는 알게 되었다. 가난은 고작 계란 하나로 비루해질 수 있고, 부자는 고작 계란 하나로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라면과 계란 하나 사이의 괴리감. 계란 하나가 휘두르는 엄청난 폭력. 그런 게 가난이었고 또 그런 게 부자였다. (71쪽)

이토록 자신의 조건, 가난에 집착하는 인물이 생업을 접고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필요한 사유의 시간은 단 반쪽에 불과하다. 그리고 스물아홉 해를 사는 동안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가난의 문제는 그를 다시는(적어도 남은 170여 쪽 동안에는)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소설에도 좋은 일일까? 글쎄. 적어도 인물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대신 그를 사로잡는 것은 케이와 제이에 대한 불만과 질투. 질투는 과연 그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케이 또한 마찬가지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강압적인 부모의 요구와 화가가 되려는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다 귀를 잘라버린 그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삶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린 남자다. 하지만 그는 과연 우울증 환자일까. 글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니다. 그는 우울증 환자처럼 말하지 않고 우울증 환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귀를 자른 건 맞다. 하지만 자른 귀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다니는 게 우울증 환자다운 행동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친구의 여자는 무조건 유혹하고 보는(케이는 오해라고 말하고 와이도 인정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바람둥이라면 모를까. 소설의 적재적소에 그의 발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 우울증 환자인 척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제이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비현실적인 인물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설명이 오히려 매력을 망친 경우. 온몸에 흐르는 고압 전류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숲 속에 홀로 버려져 책과 음악을 벗 삼아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 그녀의 사연에는 작가가 의도한 어떤 알레고리가 존재하겠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책과 음악과 소통을 주창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뻔하다.

결국 비현실도 아니고 초현실도 아니며 현실은 더더욱 아닌 이 '무현실'적인 여행은 그들의 과거를 들추는 몇몇 에피소드들을 통해 서툰 이해를 이끌어내고, 함께 보낸 시간은 두 남자의 마음에 설익은 사랑을 싹 틔우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어느덧 그들은 그녀의 집에 다다른 것이다. 애틋한 인사도, 별다른 의식도 없이 순식간에 치러지는 이별. 여행은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끝나버리고, 그들은 다시 그들 각자의 집을 향한다. 스물아홉, 마지막 여름은 그렇게 지나간다.

물론 소득은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행이 그렇듯, 그들의 여행 또한 그들의 삶을 변하게 한 것이다. 다시금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은 케이.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와이. 하지만 그런 변화는 어쩐지 미심쩍다. 와이에게 있어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짓누르던 가난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어느 부분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부자의 대명사 케이에 대한 서툰 이해가? 제이에 대한 설익은 사랑이? 알 수 없다. 작가가 기대한 것은 그들 사이의 소통이고, 그로 인한 변화겠지만 과연 그들은 통했는가? (이 문장은 수사의문문이 아니다. 누군가 내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려나. 그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여행의 초반, 와이가 했던 걱정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케이와 나는 집에 두고 온 삶을, 혹은 언젠가 다시 부딪히게 될 삶을 확실히 앞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얼굴이었다. 여행이란 즐거운 것이지만 여행 후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일상의 고통을 변함없는 자세로 대하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여행은 삶의 변화를 위한 거라고, 그러니 꼭 변화를 유도해 내야 한다고 고정된 관념을 나무처럼 각자의 머릿속에 누군가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변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120쪽)

그렇다면 질문. 그런 고정된 관념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여행의 끝에서 마치 선물처럼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변화를 안겨준 것은 누구인가? 분명한 건 그것이 독자를 위한 선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닌 여정 그 자체이고,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주인공의 성장이 아닌 성장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가. 한 마디로 이 소설에는 무언가가 빠져있다. 단순히 파와 계란만 없는 게 아니라 면 없는, 혹은 스프 없는 라면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다.

눈 먼 개와 함께 3년 간 모텔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그녀의 전작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그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설득력 있게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 <옷의 시간들>(김희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길 위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와 달리 <옷의 시간들>의 배경은 원룸, 빨래방, 편의점, 도서관 등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공간들이다.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 저마다 외로운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들의 자리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위무한다.

주인공 오주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도서관 사서다.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어머니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공부 밖에 모르던 언니는 유부남 교수와 사랑에 빠져 미국으로 떠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던 아버지 또한 '술을 모르는 여자'와 재혼한 후 새로운 인생을 찾아 제주도로 떠난다. 그녀와 집과 곧 고장 날 낡은 세탁기 한 대만을 남겨둔 채.

그녀는 불필요하게 큰 집을 정리한다. 직장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자신의 세탁기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들어온 남자. 그녀는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행복이 그러하듯 그녀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다. 남자 친구 또한 유학을 핑계로 그녀를 떠나버린 것이다. "잠 잘 자고, 행복해라"라는 쪽지만을 남긴 채. 설상가상 "그의 옷을 빨아주기 위해 지금껏 고장을 참아 오기라도 한 듯" 세탁기는 작동을 멈춘다.

하지만 가는 이가 있으면 오는 이도 있는 법. "뭐든 수집한다며 이것저것 사진기를 들이대는 옆집 여자 조미정"을 필두로, "껄렁해 보이지만 한때는 잘나가는 아트디렉터였던 만화가 조미치",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거리를 떠도는 전직 교수 콧수염 아저씨"와 "진짜 거리의 부랑자 박구도 아저씨" 그리고 "우울한 표정으로 9번 세탁기만 쓰는 남자"(그의 정체는 기타리스트)가 그녀의 삶에 차례로 끼어들며 무채색의, 어쩌면 침울할 수도 있었을 그녀의 일상을 다채로운 빛깔로 채워나간다.

일종의 대안 공동체라고 할 만한 공간이 빨래방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무려나. 더러워진 옷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함께 씻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에피소드가 신선하고, 대사도 유머러스하다"는 언니의 평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 또한 무난하다. 다만 가장 흥미로웠던 도서관 에피소드, 그러니까 양장본의 가름끈만 훔쳐가는 도둑 부분이 흐지부지 끝나버린 점은 아쉽지만.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난하기만 하다는 점이다. 누가 끓여도 비슷한 컵라면 같다고 할까. 얼핏 독특하지만 결코 자신 안의 어둠을 직시하지 않는 인물들은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젠젠 다이조부"('괜찮아, 정말 괜찮아'라는 뜻의 일본어.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주인공 오주는 물론이고, 등장인물 모두가 한없이 선량하기만 한 것이다. 나는 조금 궁금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굳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이야기라면, 단지 그뿐이라면 이누도 잇신이 감독한 <메종 드 히미코>를 한 번 더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다기리 조와 시바사키 코우의 연기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그녀의 전작 <고양이 호텔>(민음사 펴냄)이 화제의 데뷔작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은둔 작가와 그녀를 인터뷰해야 하는 특명을 띤 기자라는 신선한 설정과 유머러스한 대사로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을 살짝 비틀며 시종일관 웃음 짓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이 글의 서두에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느낀 불만은 그들의 닮음 때문이 아닌 우리들의 닮음 때문이고, 그곳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한계, 즉 우리 모두의 한계 때문"이라고 썼다. 불만은 이미 충분히 토로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닮음과 한계를 이야기할 차례. 솔직히 말하자.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관계와 소통을 희구하는 그들의 소설을 읽으며 서동욱의 글을 생각했을 뿐이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썼다. (이렇게 변변찮은 서평을 갈무리하기 위해 남의 말을 빌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한계이다.)

타인에 의한 수동적인 노출이 나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특정한 자로 지정해준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 걸어옴과 그에 대한 나의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음, 즉 양자 간의 소통은 나를 익명성의 구덩이로부터 자유와 단독성을 지닌 한 주체로서 탄생하게 해주는 '구원의 사건'이다.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닌가? 누군가 밖에서부터 나의 문을 두드려 말 걸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끝끝내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없다.

또한 타인과의 만남은 나를 나의 자기성, 나의 유한성 바깥의 무한(타인)을 향해 초월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구원이다. 나의 말함(대답함)은 나를 '대격'으로서 노출시킨다. 대격의 자리에서 노출된 나는 자기의식의 폐쇄된 회로 안에서 자신과 관계하는 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pour autrui) 자아'이다. 이런 뜻에서 "소통한다는 것은 진정코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즉 타자의 말 걸어옴은 나의 자기성, 바로 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아를 '타자에 대해 있는 자'로서 노출(개방)시킨다. 이렇게 자아가 자기성의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을 향해나간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주체성의 모험'이라 불릴 만하다. 요컨대 자아가 자기에 묶여 있는 자아가 아니라, 자기 바깥의 무한자를 향한 자아, 무한자와 관계하는 자아가 되기에,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무한자를 향한) 초월일 수 있다."

이렇게 타인과의 소통은 자아를 자유로운 주체로 만드는 동시에 무한자를 향한 초월을 가능케 해 준다는 점에서 구원의 사건이다. (<일상의 모험>(민음사 펴냄), 46~47쪽)

열쇠공이란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외롭게 살아가는 와이 앞에 나타난 제이. 가족과 남자 친구와 세탁기에게 버림받은 쓸쓸한 도시 여자 오주에게 말을 걸어온 빨래방의 터줏대감 조미치. 결국 이 두 소설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구원/모험이고, 그 중에서도 (서동욱을 따라 말하자면) 일상의 모험/구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위로, 위무에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순히 익명성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자기성의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을 향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은 어디인가?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이고, 그녀들이 그리지 않은/못한 부분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한계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으며 비슷한 것을 욕망하는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앞서도 말했듯 그들의 작품은 라면을 닮았다고. 라면은 누군가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도, 누군가의 언 몸을 녹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출판계에 불고 있는 '위로 열풍'이 정확히 그러하듯이. 하지만 라면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현실 세계의 나는 제이와 마찬가지로 라면 의존증에 걸린 가난한 도시 남자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에서 우리는, 같은 값으로 색다른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놀라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홱 돌아버리게 할 수도 있는 온갖 진미들을.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먹는 라면은 별미가 아니냐고. 구시대적인 꼰대 발언은 집어치우라고. 사실 맞는 말이다(종종 이렇게 오버하는 것 또한 나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에게 부탁해야겠다. 다음에는 영양과 맛을 생각해서라도 꼭 계란을 넣어달라고. 언젠가 우디 앨런이 말했듯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because most of us need the eg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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