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나의 초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을 떠올려본다. 칠판 먼지 가득한 교실, 높다란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은 늘 "자, 교과서 OO쪽 펴세요"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곧 교과서 공부'라는 공식은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초임 시절의 나 또한 교과서는 '반드시 익혀야 할 것'이란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믿음은 첫 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교과서 내용을 아이들에게 충실히 가르쳤건만, 아이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기 위해 수업 기술을 좀 더 화려하게 사용해보기도 했다. 다양한 게임이나 퀴즈를 하면 아이들은 반짝 하고 흥미를 가지며 활동에 빠져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 재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롭고 재미있는 기술을 활용해야 했던 것이다. 무언가 다른 차원의 고민이 필요했다. 문득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교과서를 펼쳐들고 살펴보았다. 그러자 마침내 조금씩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기술적 측면)가 아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내용적 측면)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7차 교육 과정 교사용 지도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교과서는 금과옥조가 아니므로 하나의 '텍스트(text)'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 이 한마디는 그동안 내내 조여 왔던 나의 숨통을 시원스레 트이게 해주었다. 그래! 교과서는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다.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든 다른 자료를 활용하면 되지 않는가?
아이들이 지루해하던 읽기 책의 딱딱한 시를 어린이들이 쓴 시로 바꾸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대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한다. 제 또래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자기와 닮은 삶이 담긴 글에서 아이들은 그제야 배우는 즐거움을 찾고 적극적으로 배움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수업 기술이 없더라도 아이들은 기꺼이 수업에 푹 빠져들었다.
신이 난 나는 국어 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의 내용도 재구성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려동물을 단순히 '애완동물'과 이득을 얻는 '경제동물'로 구분해 가르쳤던 실과 교과서는 도덕의 생명 존중 단원과 통합해 재구성했다. 아이들은 삶을 함께 하는 반려동물의 존재를 배우고, 버려진 길고양이와 유기견 이야기를 접하며 함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깨달아갔다. 이때껏 교과서 안에 갇혀 있었던 나와 아이들의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색다른(?) 시도는 곧 단단한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선생님, 우리 공부는 언제 해요?" 하고 묻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나와 많은 시간을 눈을 빛내가며 배웠건만, 교과서를 펼치지 않은 이상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그것을 '공부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학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교과서를 펼치고 그 빈 칸을 채우지 않는 이상 '공부 하지 않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아이들의 본능적인 배움을 향한 욕구는 이런 고정관념 속에서 단순히 교과서 안에 박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려면 주어진 대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교과서'와 '교육 과정'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서 막막한 갈증을 느끼기 보다는 내가 먼저 제대로 알고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나에게 <교과서를 믿지 마라>(바다출판사 펴냄)는 그야말로 사막의 우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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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를 믿지 마라>(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더구나 이 책을 쓴 이들은, 내가 발령 받자마자 온갖 공부 모임에 쫓아다니다가 만난 그야말로 나에게는 '슈퍼맨' 같은 선생님들이다. 이름만 떠올려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슈퍼 선생님들! 아이들과 좌충우돌 하루하루를 보내기에도 바빠서 지쳐 나가떨어지는 마당에, 교사로서의 생활 뿐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길까지 열심히 걷는 분들이다.
인맥 자랑을 조금만 하자면, 신은희 선생님은 초등 교육 과정 부분에서 그 어떤 학회를 뒤지더라도 이만한 전문가가 없을 만큼 훌륭한 현장 실천가이자 연구자이다. 또 초등 미술의 대가 이부영 선생님은 한 번 그 집에 놀러가기만 하면 가득 쌓인 아이들의 작품 자료만 보고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성실 선생님은 이미 <재미있는 수학 시간 만들기>와 같은 초등 수학 지도서를 여러 권 내셨고, 수학과 참교육 과정을 오래 연구해 교과서까지 만든 분이다. (물론 나머지 선생님들 또한 교사로서의 농익은 내공이 과즙처럼 뚝뚝 떨어지는 훌륭한 분들이시다.)
이만큼 '뽀쓰' 넘치는 선생님들이 독수리 오형제(?!)처럼 짜잔, 하고 나타나, 현장 선생님들 대신, 누더기 같은 교과서와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는 교육과학기술부에 시원한 철퇴를 날려주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이 책을 읽은 많은 선생님들의 반응 중 가장 압도적인 반응은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이다. 학부모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특히 교사들에게는 일종의 '필독 교양서'와 같기에 나는 읽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어야 했다. 더구나 읽는 내내 그 통쾌함에 감탄사까지 추임새로 넣어가며!
교사들에게는 통쾌하겠지만 만약 이 책을 학부모나 교사가 아닌 누군가가 읽는다면 조금 충격적일 거란 생각이 든다. 교과서가 공부의 전부라 여겨왔건만, 그 교과서가 사실은 이렇게 엉터리라면? 이 책은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교과서를 학년별, 교과별로 조목조목 짚어가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 나온 3학년 학부모의 분노는 이해가 가다 못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장관님! 왜 21÷3=7인지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은 자기의 현재 발달 수준보다 조금 더 어려운 정도의 과제가 주어질 때에 도전의식을 가지고 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어려운 수준이 주어진다면? 도전의식은커녕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그 과목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학부모의 경우 자기 아이가 교과서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사교육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단지 수준뿐만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모든 교과에 걸친 과도한 학습량에 의해 아이들은 타고난 배움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리고 학습에 치이게 된다. 흥미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탐구하며 이해해가는 과정은 생략되고 계속해서 다음 학습을 위해 기계적으로 배워나가야 한다. 그야말로 책의 목차대로 '아이들과 교사를 바보로 만드는'. '사교육과 학습 부진아를 조장하는' 교과서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수시로 개정되는 교육 과정에 있다. 사실 국가의 교육 과정 또한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들어지는 과정과 검토 과정에 허점이 있을 경우 당연히 그 결과물 또한 부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서는 그러한 교육 과정 개정과 교과서 탄생에 대한 비밀을 속 시원히 드러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방향을 바꾸어 졸속으로 찍어내 충분한 협의와 안내 없이 현장에 그야말로 뚝 떨어지는 교육과정은 교사와 학부모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인력도, 사전 연구도, 검토도, 심지어는 그 바뀐 교과서의 연수 과정마저도 모두 '총체적 부실' 그 자체인 교과서를 받아 드는 것도 아이들인 것이다.
책을 덮으며, 실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동안 내가 못 가르쳐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 잡았다. 이 나라에 사는 이상 그 누구도 교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교육을 받고 자라나며, 또한 우리의 아이들도 앞으로 교육받아야 하기에.
그렇다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교육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교과서와 교육 정책을 정부와 교사에게만 맡겨 두지 말고 학부모들이 끊임없는 질책과 요구,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 이야기가 마음에 유독 깊이 남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이 잘못된 교과서 때문에 고통 받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