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화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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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라기에 무심코 책을 펼쳐 들었다. 종종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단지 누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선택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베스트셀러는 별 의미가 없다. 많이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내 마음에 꼭 흡족하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오히려 작가나 출판사를 통해 읽을 책을 선택하는 편이 수월할 때가 많다.

아사다 지로를 처음 알게된 것은 <철도원>을 통해서였는데,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독자를 소리없이 사로잡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되어 마치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묘사는 탁월하고 재미있다. 그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8편 가운데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작품이 몇 편 있었는데, <올림포스의 성녀> <산다화> <재회> <마담의 목울대>가 바로 그것이다.

<올림포스의 성녀>

… 이제부터는 남들처럼 바람을 피울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후부터 노리코의 잔영은 한 층 더 강렬하게 이치로의 가슴을 점령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을 걸 하고 후회도 했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노리코와 헤어지던 밤에 몇 장 안 되는 사진과 손수 뜬 머플러, 싸구려 커플링을 모두 버려버린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기억까지 묻으려 한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길 만큼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었다. 그렇게 묻어버린 기억 때문에 그 후 삼십 년 동안이나 아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노리코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노리코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올림포스의 성녀>는 마흔 중반을 넘어 선 한 사내의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왔다. 인생은 지나보아야 알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바로 인생인가 보다.

결혼도, 동거도 아닌 사실혼이 7년이나 지속되었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하는 노리코는 이치로의 청혼을 거절하고 만다. 이치로는 '7년의 세월이 청춘의 낭비'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랑의 기억을 재산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되뇌이며 그녀를 떠나고 만다.

그렇게 오랜 시간 노리코를 그리워하다 문득 거리에서 석고상인 것처럼 보이는 한 그리스의 무녀를 만나게 되고, 이내 노리코임을 알게 된 순간 이치로는 그만 울어버린다. 그 순간 노리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래 전 그때 이치로를 떠나 보내지 않았다면 하고 수천 번 후회했다고 눈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만나고 싶었지만 꿈에서 밖에 만날 수 없던 노리코와 재회하게 되는 순간,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 뒤의 일들은 독자 개인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둔 채.

<산다화>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이 왜 산다화일까? 산다화는 뭐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산다화는 바로 동백꽃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이 꽃이 등장하는데, 이 꽃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파란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에게 기다리게 한 사과의 뜻으로 귓가에 꽂아주었다던 그 동백을 다시 환기하게 되는 순간, 가장은 이미 가족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이 꽃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다화>에는 부도가 코앞에 다가온 위태로운 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1년 동안이나 고심을 했을 정도로 괴로운 가장은 죽기를 각오하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이르게 되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좋았던 기억들과 현재의 불행이 마구 섞여 혼란하지만 훈훈했던 과거를 찾음으로 가장은 어쩌면 죽어서 가족에게 보험금을 주려고 했던 마음을 접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사다 지로는 <산다화>에 실린 단편 8편의 모든 결말을 독자에게 맡겨놓은 것 같다. 그러면서 현실의 반영인 소설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양한 삶의 변주곡들을 들려주는 따뜻한 소설집 <산다화>는 필 듯 필 듯 하면서도 피지 않는 우리 동백나무의 봉오리처럼 아름다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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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진회숙 지음 / 청아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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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만 영화 속에 깃들어진 고전음악과 함께 영화이야기를 풀어 낸 책은 드물다.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하기에도 버거운 마당에, 영화와 음악 그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이라면 분명 소화하기 힘든 작업일 것이다.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이 소개하고 있는 13편의 영화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버나드 로즈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뿐이었다. 그렇지만 못 본 영화들이라 할지라도 대강의 줄거리와 사진 그리고 그 속에 녹아 흐르는 음악에 대한 친절한 해설 덕분에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알게 되어서 반가웠다. 특히 <엘비라 마디간>은 여러 책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 영화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친근한 영화였다.

저자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클래식 강의를 시작하고부터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클래식을 지루하지 않게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클래식이 나오는 영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학습 효과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영화를 열심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엘비라 마디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제2악장

아름다운 고전 음악이 있기에 영화가 훨씬 빛났던 작품들도 많을 것이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 때문에 더 유명해진 영화들도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엘비라 마디간'이다. 어린 시절 나는 고전 음악이 여러 가지 섞여 있는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구입해서 열심히 반복해서 들었다. 거기에는 쇼팽의 녹턴을 비롯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2악장 Andante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물론 테이프에는 '엘비라 마디간 테마곡'이라고 표기되어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컴필레이션 앨범 정도 되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듣는 바람이 테이프가 늘어져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내게도 동생에게도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테이프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엘비라 마디간'을 들어왔지만 1967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볼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영화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엘비라와 군대에서 질식할 것 같아 탈영한 식스틴 중위의 사랑이야기다.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황금빛 봄, 풀밭 위에서 동반자살로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는 슬픈 내용이다.

시인 김승희는 자신의 산문집 <성냥 한 개피의 사랑>에서 '엘비라 마디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전율하면서 그 아름다운 엘비라의 최후를 생각한다. 흰 나비로 날아 오른 그들의 무모한 사랑, 목숨의 뜨거움을 생각한다. 물이 펄펄 끓을 때부터 4분간만 사랑하다 죽고 싶어진다. …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물이 식을 때까지 사랑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완전히 탈진하여 맥 빠진 사랑의 그림자와 함께 늙고 시들어 간다. - <성냥 한 개피의 사랑> 본문 중에서

<안나 까레리나> -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외

..<비창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겨울의 나라 러시아가 느껴진다. 태양이 숨어버린 동토의 춥고 어두운 겨울,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 위를 부는 바람 같은 거대하고 서늘한 슬픔이 생각난다. 태양빛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특유의 근원적인 우울, <비창 교향곡>은 바로 이런 우울을 담고 있는 곡이다. -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본문 중에서

<안나 까레리나>는 8살 아들을 둔 안나와 브론스키 백작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물론 이루어지긴 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결말이라는 점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 <엘비라 마디간>과 비슷한 슬픔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그 옛날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을 택했지만 결국 주위의 시선 때문에 집안에서만 지내게 되고, 아들이 보고 싶어 점점 정신이 피폐해져 마침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안나 까레리나.

영화에 녹아 있는 음악들이 하나같이 슬프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라흐마니노프의 <비가 작품 3의 1번>과 <피아노 삼중주 비가 작품 36의 2번>. 영화의 장면들이 연상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곡들이다.

영화에 삽입된 고전 음악에 매료되어 그 곡을 잊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이미 그 곡을 알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배가된 감동의 기억을 되살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은 단순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고전 음악에 더 치중한 책이다. 고전 음악이 있어 더 빛나는 영화를 책으로 만날 수 있으니 이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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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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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을 연주하리라는 꿈을 갖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함께 요즘 피아노를 배운다는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기사를 지난 달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기사를 보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함에 있어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바이엘을 배우며 바하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무엇보다 친근하게 다가왔다.

<도덕교육의 파시즘>의 저자 김상봉은 이른바 학계의 '아름다운 파격'으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대학 사회에서 철학과 교수 전원이 임용에 동의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저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지역주의, 학벌주의가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춰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한 신문은 '대학 사회의 오랜 폐쇄주의와 교수 사회의 질긴 이기주의를 일거에 뛰어넘은 통쾌한 선택'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

한국의 도덕 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 노예가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노예적 삶이란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일 수 없다. …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오직 착하게만 만들려는 것은 언제나 불온한 시도이다.

도덕이 아무리 숭고한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정신적으로 노예화하는 장치라면 우리는 그런 도덕을 단호히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성을 자유로운 자기실현에 앞서는 어떤 도덕도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가치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가 이제껏 배운 도덕 교과서를 비판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에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는지 헤아리긴 어렵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행동하는 게 선이고 바른 일이라고만 여겨왔고, 그저 순종적으로 믿고 따랐을 뿐이다. 이렇게 도덕 교과서가 잘못되었음에도 다른 과거 청산에 비해 문제 제기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파한다.

파시즘적 도덕 교과서

파시즘은 한편에서는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획일주의로 나타난다. 질서에 대한 우상숭배야 말로 파시즘의 전형적인 특징인 것이다. 우리의 도덕 교과서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교과서에 따르면 모든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다. 생각하면 역사는 갈등을 통해 발전한다. 갈등이 없는 역사는 죽은 역사이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는 전편에 걸쳐 질서와 조화의 이데올로기를 숭상하고 갈등을 무조건 위험시한다.

… 파시즘이란 다른 무엇보다, 개인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전체 아래 종속시키는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덕교육이 노예도덕과 파시즘의 기관으로 전락한 곳에서 어떻게 진정한 의미의 도덕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도덕이란 인간성의 근원적 자유의 표현이자 실현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강제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저자는 우리의 신교육이 우리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 교육으로 행해졌고, 그 식민 교육이 우리에게 자주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교육시켰을 리 없고, 해방 후에도 독재자들이 오래 집권함으로써 우리는 그저 순종적인 사람으로 교육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뼈아픈 이야기들을 연이어 들려준다.

교육이 인간을 참된 자유인으로 도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능적 지식을 가르치는 다른 모든 교과목 외에 삶을 전체로서 사유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과목, 곧 인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치는 교과목을 개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문 중에서

도덕 교과서 집필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처럼 '국가가 더 이상 도덕 교과서 집필권을 행사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모두가 모든 방식으로 도덕 교과서를 쓸 수 있을 때, 도덕교육은 국가주의의 낡은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의미의 도덕교육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점점 밝아질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받아온 도덕 교육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이제 그 인식을 넘어서 노예가 아닌 주체로서,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올바른 도덕 교과서 만들기에 모두가 협력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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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 할인행사
조셉 루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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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마른 잎의 모습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윤기없이 변색된 플라타너스 잎에 나는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며칠 동안 흐린 하늘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얼굴에 내려앉는 햇살의 감촉이 더없이 좋다.

고즈넉한 오후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적과의 동침>이었다. 바닷가 근처에 아주 근사한 집을 배경으로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남편 마틴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로라가 등장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조금은 어두운 실내가 이들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욕실 벽에는 수건 3개가 걸려 있었는데 가운데 길이 하나가 조금 다르다. 남편은 이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아내에게 주의를 준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남편 마틴은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이들 부부의 모습은 더욱 이상하게 비쳐진다.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아내를 감시하고 상습적으로 구타한다. 게다가 결벽증까지 있어 실내는 지나치게 정갈한 모습이다. 일방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저항하지 못하고,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다 남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마틴과 로라는 이웃과 저녁 항해를 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기상이 악화되어 바다에 빠진 로라는 그만 실종된다. 마틴은 로라가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르고 살아가는데, 실은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남편 몰래 열심히 수영을 배워 마침내 수영 선수처럼 수영을 잘하게 된 로라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로라는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펼쳐간다. 그동안 어둡기만 했던 영화는 일순간에 다른 분위기의 영화로 연출을 바꾸게 된다. 한가롭고 고요한 어느 변두리 작은 시골 마을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로라는 청소를 하고 손수 페인트칠도 한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조그만 화분도 몇 개 놓아 두는데, 반갑게도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화분이었다.

습관처럼 가지런하게 놓아둔 수건을 일부러 헝클어버리기도 하고, 씽크대 수납공간의 양념병들도 어질러 놓아보며 그녀는 진정 남편에게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한다. 3년하고도 7개월 6일…. 정확히 남편과 함께 한 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 생활이 끔찍했는지 반증해주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운명처럼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벤을 만나게 된다. 남편과의 기억 때문에 쉽게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기에 마침내 그들은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남편 마틴은 죽은 줄 알았던 로라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로라를 찾아내고 만다. 로라는 남편의 총으로 그를 살해하게 되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그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리지만 미처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건이 전개되는 찰나의 스릴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마다 가득했다. 지루함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마치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처럼 관객을 흡인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영화였다.

개봉된 지 10년도 더 된 영화인지라 젊은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도시의 콘크리트 숲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영화라 더 좋았다. <적과의 동침>은 나른한 일상에 청량감을 안겨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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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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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소리 없이 소복이 내려앉은 눈처럼 마음을 적시는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는 얼마 전 신문을 보시고는 아버지가 주문하신 책이었다. 신문에 이 책은 어떻게 소개되었기에 아버지가 주문을 하셨을까 궁금해서 나도 책장을 펼치게 된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유년 시절의 기억

어릴 때 살던 동네 옆 중국인들이 사는 작은 언덕을 넘어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선창을 지나면 제분 공장이 있었다. 해질 무렵이면 허리에 찬 빈 양철 도시락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덕을 넘어오던 노무자들의 지친 발걸음과 그들의 긴 그림자, 밀가루가 얹혀 허옇게 세어 보이던 머리칼들은 어찌 그리 무섭고 슬픈 느낌을 주었던지. … 한두 살 터울의 형제들과 울타리 밖에 나앉아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일들. -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을 읽고 있자니 그의 소설 <중국인 거리>가 생각났다. 이 소설은 저자의 유년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인 모양이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어 그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은 소설가 신경숙이 자신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신경숙은 소설 <외딴방>에서 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스무 살 이후로 내 마음에 박힌 푸른 보석이었다.'

아내로 엄마로 소설가로 살아오면서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이 조리대 옆에 책상을 마련해놓고는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를 흉내내어 '존재의 테이블'이라 이름지어 그곳에서 소설이며 가계부를 썼다는 이야기, 밖에서 소설 쓰기 재료를 얻느라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벌써 저녁 밥 지을 때가 지나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고, 바쁘게 밥을 하니까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글쓰기가 곧 삶 쓰기

이제껏 내 삶의 두 축은 생활인으로서의 '살기'와 소설가로서의 '쓰기'였고 그 둘의 균형 잡기에 적지 않은 안간힘을 써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 본문 중에서

'글쓰기가 곧 삶 쓰기'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귓전을 맴돈다. 저자는 '글을 쓸 수 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비장함을 지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회고하는데, 저자에게 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삶이었다고 한다.

그의 소설 <바람의 넋>의 주인공인 은수씨에게 보낸 편지, 어린 날의 스승께 보낸 편지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온다. 조곤조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 독자들은 이를 데 없이 편안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 아마도 산문의 매력은 이런 것인가 보다.

저자와 독자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글이 바로 생활을 노래한 산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커피 이야기'에 나오는 글로 찻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행복해하는 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데, 커피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글이다.

나는 하루에 대략 석 잔 정도의 커피를 마신다. … 아침 일찍 그리고 밤늦게 마시는 커피는 미각의 즐김이라기보다 일을 위한 준비 작업이자 각성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해놓고 깨끗이 치워진 집 안에서 한갓진 마음으로 혼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생활 속의 작은 여유, 사치라 할 수 있다. 그때의 내 마음속에 스미는 따뜻한 온기와 향기, 적막감을 나는 감히 행복감이라고 표현한다. - 본문 중에서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곳곳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봄은 오고 있을 것이다. 봄을 맞이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뜻한 산문집을 만나는 기쁨을 많은 이들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휴식으로서의 독서'에 알맞은 오정희의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는 부모님 세대에도 젊은이들에게도 행복을 선사할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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