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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진회숙 지음 / 청아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만 영화 속에 깃들어진 고전음악과 함께 영화이야기를 풀어 낸 책은 드물다.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하기에도 버거운 마당에, 영화와 음악 그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이라면 분명 소화하기 힘든 작업일 것이다.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이 소개하고 있는 13편의 영화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버나드 로즈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뿐이었다. 그렇지만 못 본 영화들이라 할지라도 대강의 줄거리와 사진 그리고 그 속에 녹아 흐르는 음악에 대한 친절한 해설 덕분에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알게 되어서 반가웠다. 특히 <엘비라 마디간>은 여러 책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 영화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친근한 영화였다.
저자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클래식 강의를 시작하고부터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클래식을 지루하지 않게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클래식이 나오는 영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학습 효과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영화를 열심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엘비라 마디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제2악장
아름다운 고전 음악이 있기에 영화가 훨씬 빛났던 작품들도 많을 것이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 때문에 더 유명해진 영화들도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엘비라 마디간'이다. 어린 시절 나는 고전 음악이 여러 가지 섞여 있는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구입해서 열심히 반복해서 들었다. 거기에는 쇼팽의 녹턴을 비롯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2악장 Andante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물론 테이프에는 '엘비라 마디간 테마곡'이라고 표기되어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컴필레이션 앨범 정도 되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듣는 바람이 테이프가 늘어져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내게도 동생에게도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테이프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엘비라 마디간'을 들어왔지만 1967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볼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영화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엘비라와 군대에서 질식할 것 같아 탈영한 식스틴 중위의 사랑이야기다.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황금빛 봄, 풀밭 위에서 동반자살로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는 슬픈 내용이다.
시인 김승희는 자신의 산문집 <성냥 한 개피의 사랑>에서 '엘비라 마디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전율하면서 그 아름다운 엘비라의 최후를 생각한다. 흰 나비로 날아 오른 그들의 무모한 사랑, 목숨의 뜨거움을 생각한다. 물이 펄펄 끓을 때부터 4분간만 사랑하다 죽고 싶어진다. …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물이 식을 때까지 사랑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완전히 탈진하여 맥 빠진 사랑의 그림자와 함께 늙고 시들어 간다. - <성냥 한 개피의 사랑> 본문 중에서
<안나 까레리나> -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외
..<비창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겨울의 나라 러시아가 느껴진다. 태양이 숨어버린 동토의 춥고 어두운 겨울,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 위를 부는 바람 같은 거대하고 서늘한 슬픔이 생각난다. 태양빛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특유의 근원적인 우울, <비창 교향곡>은 바로 이런 우울을 담고 있는 곡이다. -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 본문 중에서
<안나 까레리나>는 8살 아들을 둔 안나와 브론스키 백작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물론 이루어지긴 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결말이라는 점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 <엘비라 마디간>과 비슷한 슬픔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그 옛날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을 택했지만 결국 주위의 시선 때문에 집안에서만 지내게 되고, 아들이 보고 싶어 점점 정신이 피폐해져 마침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안나 까레리나.
영화에 녹아 있는 음악들이 하나같이 슬프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라흐마니노프의 <비가 작품 3의 1번>과 <피아노 삼중주 비가 작품 36의 2번>. 영화의 장면들이 연상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곡들이다.
영화에 삽입된 고전 음악에 매료되어 그 곡을 잊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이미 그 곡을 알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배가된 감동의 기억을 되살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로 만나는 클래식>은 단순한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고전 음악에 더 치중한 책이다. 고전 음악이 있어 더 빛나는 영화를 책으로 만날 수 있으니 이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