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 할인행사
조셉 루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밟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마른 잎의 모습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윤기없이 변색된 플라타너스 잎에 나는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며칠 동안 흐린 하늘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얼굴에 내려앉는 햇살의 감촉이 더없이 좋다.

고즈넉한 오후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적과의 동침>이었다. 바닷가 근처에 아주 근사한 집을 배경으로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남편 마틴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로라가 등장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조금은 어두운 실내가 이들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욕실 벽에는 수건 3개가 걸려 있었는데 가운데 길이 하나가 조금 다르다. 남편은 이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아내에게 주의를 준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남편 마틴은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이들 부부의 모습은 더욱 이상하게 비쳐진다.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아내를 감시하고 상습적으로 구타한다. 게다가 결벽증까지 있어 실내는 지나치게 정갈한 모습이다. 일방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저항하지 못하고,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다 남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마틴과 로라는 이웃과 저녁 항해를 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기상이 악화되어 바다에 빠진 로라는 그만 실종된다. 마틴은 로라가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르고 살아가는데, 실은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남편 몰래 열심히 수영을 배워 마침내 수영 선수처럼 수영을 잘하게 된 로라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로라는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펼쳐간다. 그동안 어둡기만 했던 영화는 일순간에 다른 분위기의 영화로 연출을 바꾸게 된다. 한가롭고 고요한 어느 변두리 작은 시골 마을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로라는 청소를 하고 손수 페인트칠도 한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조그만 화분도 몇 개 놓아 두는데, 반갑게도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화분이었다.

습관처럼 가지런하게 놓아둔 수건을 일부러 헝클어버리기도 하고, 씽크대 수납공간의 양념병들도 어질러 놓아보며 그녀는 진정 남편에게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한다. 3년하고도 7개월 6일…. 정확히 남편과 함께 한 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 생활이 끔찍했는지 반증해주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운명처럼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벤을 만나게 된다. 남편과의 기억 때문에 쉽게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기에 마침내 그들은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남편 마틴은 죽은 줄 알았던 로라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로라를 찾아내고 만다. 로라는 남편의 총으로 그를 살해하게 되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그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리지만 미처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과 사건이 전개되는 찰나의 스릴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마다 가득했다. 지루함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마치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처럼 관객을 흡인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영화였다.

개봉된 지 10년도 더 된 영화인지라 젊은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도시의 콘크리트 숲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영화라 더 좋았다. <적과의 동침>은 나른한 일상에 청량감을 안겨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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