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화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라기에 무심코 책을 펼쳐 들었다. 종종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단지 누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선택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베스트셀러는 별 의미가 없다. 많이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내 마음에 꼭 흡족하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오히려 작가나 출판사를 통해 읽을 책을 선택하는 편이 수월할 때가 많다.

아사다 지로를 처음 알게된 것은 <철도원>을 통해서였는데,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독자를 소리없이 사로잡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되어 마치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묘사는 탁월하고 재미있다. 그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8편 가운데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작품이 몇 편 있었는데, <올림포스의 성녀> <산다화> <재회> <마담의 목울대>가 바로 그것이다.

<올림포스의 성녀>

… 이제부터는 남들처럼 바람을 피울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후부터 노리코의 잔영은 한 층 더 강렬하게 이치로의 가슴을 점령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을 걸 하고 후회도 했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노리코와 헤어지던 밤에 몇 장 안 되는 사진과 손수 뜬 머플러, 싸구려 커플링을 모두 버려버린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기억까지 묻으려 한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길 만큼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었다. 그렇게 묻어버린 기억 때문에 그 후 삼십 년 동안이나 아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노리코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노리코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올림포스의 성녀>는 마흔 중반을 넘어 선 한 사내의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왔다. 인생은 지나보아야 알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바로 인생인가 보다.

결혼도, 동거도 아닌 사실혼이 7년이나 지속되었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하는 노리코는 이치로의 청혼을 거절하고 만다. 이치로는 '7년의 세월이 청춘의 낭비'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랑의 기억을 재산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되뇌이며 그녀를 떠나고 만다.

그렇게 오랜 시간 노리코를 그리워하다 문득 거리에서 석고상인 것처럼 보이는 한 그리스의 무녀를 만나게 되고, 이내 노리코임을 알게 된 순간 이치로는 그만 울어버린다. 그 순간 노리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래 전 그때 이치로를 떠나 보내지 않았다면 하고 수천 번 후회했다고 눈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만나고 싶었지만 꿈에서 밖에 만날 수 없던 노리코와 재회하게 되는 순간,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 뒤의 일들은 독자 개인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둔 채.

<산다화>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이 왜 산다화일까? 산다화는 뭐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산다화는 바로 동백꽃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이 꽃이 등장하는데, 이 꽃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파란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에게 기다리게 한 사과의 뜻으로 귓가에 꽂아주었다던 그 동백을 다시 환기하게 되는 순간, 가장은 이미 가족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이 꽃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다화>에는 부도가 코앞에 다가온 위태로운 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1년 동안이나 고심을 했을 정도로 괴로운 가장은 죽기를 각오하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이르게 되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좋았던 기억들과 현재의 불행이 마구 섞여 혼란하지만 훈훈했던 과거를 찾음으로 가장은 어쩌면 죽어서 가족에게 보험금을 주려고 했던 마음을 접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사다 지로는 <산다화>에 실린 단편 8편의 모든 결말을 독자에게 맡겨놓은 것 같다. 그러면서 현실의 반영인 소설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양한 삶의 변주곡들을 들려주는 따뜻한 소설집 <산다화>는 필 듯 필 듯 하면서도 피지 않는 우리 동백나무의 봉오리처럼 아름다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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