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뜨뜻미지근했으며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하고 안타까웠다. 강시의 나는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사랑을 하려면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하면서 극장을 나왔었다. 절제와 생략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던 것일까? ... 우선 표피적이고 억지로 만들어 낸 아름다움에만 정신 팔린, 어찌 생각하면 미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민망한 미적 기준과 가치가 팽배해 있는 요즘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한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동양과 서양을 제대로 섞어 놓은 드한 오묘한 선을 가진 아누크 에캐는 단발머리를 자주 손으로 넘기며 영화 속 '여'를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농익었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게 타오르는 불꽃을 엷은 베일에 가리고는 말이다.-110쪽
실은 나도 엄마 얘기를 쓰고 싶다. 엄마랑 나란히 어머니 학교에 입학해서 다녀온 얘기, 그러면서 시작해 온 엄마랑 함께 쓰는 일기, 밤마다 한 방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공부를 하면서 나눠 온 엄마 얘기, 나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다. 같이 연필을 깎고 공책을 펴고서 하루 몇 시간씩 곁에 앉았다는 것만도 가슴 벅찬데, 그 동안 나는 엄마가 가슴 속에 묵히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절절히 들어왔다. -28쪽
한국 여성에게 어머니는 영원한 식민지이다. 여성학자인 친구가 했던 뼈있는 농담이다. 딸을 교육시켜 세상에 내보내면 특히 결혼이라도 시키면, 일하는 딸의 애들 거두어주고 궂은 일 뒷감당해주랴, 나이들수로 엄마 일이 더 많아지는 이 땅의 여성은 살아있는 한 발 뻗고 편이 쉴 날이 있겠는가.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공부하고 일을 가진 딸 세대가 할머니가 되면 좀 달라질까. 심심산골에서 외손자를 돌보는 꼬부랑 할머니가 나오는 <짐으로...>를 보노라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15쪽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이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 - 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 같아서 늘 다시 채워줘야 했고, 그게 불가능해지면 이전의 낙관이 오만한 허위로 보이는 상태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114쪽
... 정작 주말농장 가느 날을 가장 기다리는 이는 내 가슴 속에 숨어 살고 있던 작은 소년이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가슴에든 '소년, 소녀'가 살고 있다.-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