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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1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베란다 창문 너머로 이틀째 소음이 들려온다. 도로를 갈아엎고 무슨 공사를 하는지 하루 종일 굴착기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차가운 날씨에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구슬땀을 흘려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 소음 정도는 투정에 불과한 것이리라.
애꿎은 냉커피를 축내면서 침대를 치워 넓어진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나는 김형경의 소설을 읽고 있다. 호시탐탐 울 기회를 노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울고 싶은 것도 인간의 욕구에 속한다면 <세월>을 읽으며 나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어린 정숙이 친척 아저씨 집에 맡겨져 이별하는 장면이 누선을 자극했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정숙과 남동생은 친척집이 아니라 하숙비를 받는 남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모든 골목이 꺾이는 곳은 기대와 상실의 지점이다'. 뒤에 남겨져, 골목의 에움길을 돌아 사라지는 아버지를 배웅하거나, 떠난 어머니가 길모퉁이를 돌아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 속에 담긴 참된 상실감을 알지 못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고교시절 고모네서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는데, 아마 3권을 다 읽진 못하고 건성으로 읽어 대강의 줄거리조차 희미한 책이어서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먼저 어머니가 떠나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떠나고 친척집에 남겨지게 되는 아이는 그 후로 거듭 겪게 되는 상실의 가장 첫 경험을 한 셈이고, 더 험한 진흙구덩이로 떨어져 내리는 척락에 대한 가벼운 서주일 뿐이었다.. - 본문 중에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면서 정숙은 마침내 남동생과 따로 살게 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그녀는 같은 과 친구인 잿빛바바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는 하현규가 등장한다.
연극동아리에 가입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새롭게 시작된 대학생활을 통해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삶의 의미를 찾아 순탄하게 살 것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점점 더 짙어지게 된다.
한 남자의 열정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그에게서 헤어날 수 없는 그녀가 나는 못내 가슴아프다. 봉건적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키워졌다고는 하지만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서야 마침내 그녀는 홀로서기에 성공하게 된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인가. 누구나 가슴 속에 한두 가지 말하지 못하는 마음들을 밀어 넣은 채, 때로 그 마음을 허공의 빈 공간으로 날려보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인가. 환한 웃음 뒤에 언뜻 드러나는 어두움, 아무 일 없듯 평범하게 주고받는 말 뒤에 있는 고통의 기미들이 잿빛바바리와 그녀 사이를 기민하게 오간다.
좋은 기회들이 많았고, 조금씩 그 일에 몸을 담가 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제대로 된 직장을 포기하고 만다. 그 대신 영혼을 달구는 독서와 정신을 모조리 쏟아 붓는 습작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생활이 좀 어렵더라도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을 하며, 본성의 이끌림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것, 온전히 소명에 따라서만 사는 일의 만족감에 대해 꿈꾸게 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인텔리 부모를 두고도 그들의 이별로 인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상실과 슬픔의 극한을 경험하게 된다. 스무살 무렵 찾아온 사랑도 너무 버겁다.
세월이 흐른 후 주인공은 생각한다. 하현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 시절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또 다른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을 것이고 설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너무 많은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거듭되는 과오와 참회의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고.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첫 번째 기능으로 왜 자기 위무의 기능을 꼽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자로 하여금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소설 <세월>은 삶과 사랑의 여러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여운이 긴 소설이었다. 다음의 글이 한 번 더 울림이 있는 파장을 남겨준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누구도,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