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의 싱글맘 스토리
신현림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표지에서 밝게 웃고 있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를 띠게 한다. 그렇지만 <신현림의 싱글맘 스토리>는 이렇게 밝은 모습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시를 쓰는 저자의 고단한 일상이 책 곳곳에 배어 있었다.

가장이 되어서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밥도 해야 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힘들고 외로운 일이다.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그 일을 누가 다 할까? 씩씩해 보이고, 밝아 보이는 모습 뒤에 숨은 슬픔이 꼭지마다 스며 나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벌써 아홉 시. 10분 후면 어린이집 차가 도착한다. 오늘은 이 차를 놓치면 안 된다. 비 오는 날은 더욱 그렇다. 서윤이를 직접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나면 오전에 작업할 시간을 다 놓친다. 지금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빠듯하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충분히 경제적 안정이 될 때까지는 최대한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며 일에서나 가정생활에서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아침마다 전쟁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작업에 몰두하는 저자는 결혼으로 상처받았고, 이혼 후에도 그에 따른 면접교섭권 문제로 아직도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전의 삶보다 훨씬 흥미롭고 평화롭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30대 초반에 박상륭의 소설 <칠조어론>에서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여자의 자궁은 송장"이란 글을 읽고 무척 자극을 받아 애를 낳긴 낳아봐야겠구나 하고 마음먹은 지 십 년이 지났다. 애를 낳아 이렇게 둘이라는 것. 예전의 혼자보다는 낫다.

20대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싱싱함은 아니라 해도 내 몸에는 그 어떤 생명의 힘이 넘친다. 여려서 상처받기 쉬운 아기를 위해 어미는 단단한 껍질이 된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껍질. 일 나가는 엄마들이 대체로 피로한 얼굴이듯 오늘도 나는 나른한 피로함 속에서 딸을 포근히 감싸안는다. - 본문 중에서

부모가 된다는 건 곧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만큼 아이는 부모를 성숙시킨다. 그렇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상상만 해도 힘든 일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 될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수반되는 일은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축복'이라 여길 만한 무언가가 있어서일 것 같다.

나이가 들어 피부의 주름은 늘어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늙지 않고 언제나 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지독히 상처받았으면 다시 결혼 따위는 꿈꾸지도 않고, 사랑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저자는 그래도 사랑이 구원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처지와 외모가 어떠하든 서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그 아름다움은 상대방에게 마음을 써줌으로써 빛나고, 빛나서 가슴 떨리고 끝없이 그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밝음, 긍정이 좋다.

열정으로 사랑이 타들어가는 사랑이 아니라도 모닥불처럼 은근히 타는 그런 사랑을 만나리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깨달음과 환희가 있는 이 순간을 위해 힘든 일들이 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것과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그래도 중요한 것과 중요했어도 보름이 지나면 잊힐 것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면 지금의 고난은 작아져서 견딜 만한 것이 되고 만다. 환한 불빛 속에서 음악이 흐르고 내 옷과 사물들이 즐거이 춤을 춘다. 지금 이 순간 인생의 진정한 출발이다. - 본문 중에서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의 실수'라 이야기하는 저자는 힘들고 외로운 싱글맘들에게, 더블이어도 혼자거나 정신이 싱글인 이들에게 이 책이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비혼의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 사랑, 결혼을 둘러싼 많은 것들, 이를테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육아나 결혼 생활 등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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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 산다는 것 -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
박영택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현존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해 이권우의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에서 처음 이 책을 만났다.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탐방했던 저자는 그런 일들을 여행에 비유했다. 지방 곳곳에서 화단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끊임없이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그들 삶의 현장을 다시 방문해 이 책을 완성했다 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저자의 문체가 참 좋았다. 마음에 와 닿는 미술 관련 서적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이 책은 섬광과도 같았다. 간간이 실려있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흑백 사진은 그들의 고독하고 힘든 삶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다.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 그 빛과 그림자

나는 예술가라 하면 으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믿어왔다. 말하자면, 음대나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비는 물론이고 실력있는 선생님에게 배울 레슨비가 있어야 하고, 좋은 악기와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비까지 충분한 돈이 아니면 예술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돌아와야만 성공의 수순을 밟을 수 있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놓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제도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나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알릴 유일한 기회인 전시회를 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목수일을 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뜨인 눈과 마음을 일러 받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행복감과 곧이어 파고드는 막막함 같은 것을 그 작가와 함께 나누고 있노라면, 한 인간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명적으로 그림을 택하고 그림 그리기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아온 한 인간의 생애, 그 고달프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맞닥뜨린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가까이 벗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족과 헤어져 외로이 살면서도 작업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그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림 때문이다.

학연과 인맥, 경제력 없어도 배제되지 않아야

미술관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 내가 작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전시회를 여는 것뿐이다. 그러나 작품은 여전히 팔리지 않고 화단은 무관심하다. 그림을 본 화랑주들은 '아! 좋네'라는 말 끝에 '팔리기에는 좀 어둡지 않나' '형상이 너무 강한데' '아직 수상 경력이 없군' '대학에 있나' '어렵게 살겠구만' 등등의 말만을 늘어놓고는 가버린다. 그들은 오직 작가의 화려한 배경과 경력, 팔릴 만한 대중성에만 관심이 있다.

… 이런 이유로 인맥과 경제력, 학연이 없는 작가, 미술계 제도권의 권력과 먼 작가들은 제아무리 프로페셔널한 작가의식과 근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작품의 질이란 원래 학력, 경력, 재력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 결과, 관점과 자세에서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술계에선 작품의 질에 관한 논의나 불합리한 구조에 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 본문 중에서

저자는 당장 작품 한 점이라도 더 팔아서 재료비와 전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급한 문제라 전한다. 화단 측에서 전시회를 마련해준다 하더라도 도록을 만들고 액자를 구입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작가의 몫이다 보니, 저자는 그런 현실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작가에게는 기쁨을, 그들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큐레이터인 저자에게는 성취감을 가져다 주는 전시회도 열릴 때 그때 뿐, 전시회가 끝나면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예술가는 또다시 가난과 냉대, 무관심 속을 홀로 걸어가야 하는 이 혹독한 현실에 대해 저자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저자는 그들이 지금까지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 사실만으로도 참 놀라운 일이라 이야기하는데, 그 어려움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들이 학연과 인맥,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믿는다.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은 분명 그들이 일구어낸 작품으로 빛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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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름다운 우리 문장 43
장하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소리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책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좋은 문장이기에 소리내어 읽고 싶을 정도인지 꼭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기회가 왔다.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듯, 좋은 문장들이 모여 좋은 글이 태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문장을 낳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참 좋은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있는데, 1부에서는 아름다운 우리 문장의 본보기를, 2부에서는 어떻게 쓰면 좋을 지에 대한 문장론을, 3부에서는 좋은 문장을 알아내는 감식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든 글은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한 후에 저자가 부연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꼭 강의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본문을 읽고 나서, 다시 요약정리를 하는 기분이랄까 그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히 2부에서 만날 수 있는 문장론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지만 그 해결책은 언제나 '오리무중'이었기에 이 책은 참 반가웠다.

감상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야

남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감상적인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필은 본질적으로 감상이 끼어드는 문학이다. 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 수필이며, 흘러간 것은 모두가 감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 수필이야말로 감상의 억제가 요구되는 글이다.

'한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감상의 바다를 헤엄치며 혼자서 도취하고 있는 듯한 글은 읽기에 민망하다.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감동하는 것을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감동하고 있는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자기가 존재해야만 한다. -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낯이 붉어졌다. 감상적인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임선희의 글은 내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글을 쓰다 보면 감정 과잉 상태가 자주 일어난다. 감정을 걸러내어 부담스럽지 않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글쓰기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 초보자가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가 바로 감상적인 글쓰기인 것 같다. '나른한 감상'만 늘어놓은 글을 두고 좋은 글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으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특히 유의해야 할 것 같다.

'잘라버림으로써 문장은 성립된다.' 임선희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위해 버릴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과감히 버릴 것을 권한다. 간결한 문장은 뜻이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게 하며 속도감을 부여한다. 가위질은 형용사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는데, 문장이 죽어갈 때는 형용사의 무성한 가지가 먼저 시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번 고침질을 통해 비로소 좋은 글이 탄생

한문의 명문장가인 소동파가 <적벽부>를 썼을 때, 그 습작 원고가 한 광주리를 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도 습작 시대에 쓴 미발표 원고가 자기 키 만큼 쌓였다고 한다. 모든 위대한 것은 훈련의 산물이다. 문장 수업은 하나의 고행도다. - 본문 중 안병욱의 글에서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은 많은 '퇴고', 즉 '고침질' 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2년에 걸쳐 쓴 <개미>를 120번 고쳐 썼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손질했으며,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을 완성하는 데 36년의 세월이, 괴테는 <파우스트>를 완성하는 데 60년! 최명희는 <혼불>에만 매달려 17년을 씨름했다 한다. 이처럼 '문장', 그것은 퇴고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엉겅퀴꽃'이 아닐까 하고 저자는 덧붙였다.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많은 법칙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도 안 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 또 여러 번 수십 번 수백 번 고침에 고침을 더하여 비로소 탄생한 글, 그것을 두고 독자들은 좋은 문장이라 이야기할 것이다.

퇴고는 하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며칠 시간을 두고 해야 더 효과적이라 한다. 자기가 쓴 글에 콩깍지가 씌어 티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남에게 보여 잘못된 것이 있는지 쓴 조언을 보약으로 참고 마셔야 한다는 권현옥의 이야기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에게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선생님은 '고칠 수 있는 데까지 고쳐 쓰는 것이 좋다'고 하셨는데,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진리를 말씀하신 것 같다. 이처럼 진리는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좋은 문장,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 책 <소리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참모습과 좋은 문장쓰기에 목마른 이들에게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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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 풍월당 주인 박종호의 음악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04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도서관을 이용하다 보면, 늘 발길이 머무는 곳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이 있다. 요즘은 음악이나 영화 코너에 자주 들르는 데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설 수 있는지 모른다. 마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던 어부가 생선을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뿌듯한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도 그렇게 만나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곡인지, 곡을 만든 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나면 왠지 그 곡이 더 아름답게 들리는 것 같다. 아니, 그 곡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흔히 분류하기 쉬운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의 시대 분류가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주제로 작곡가와 곡, 연주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저자가 추천하는 음반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얼마나 친절한 배려인지 독자로서 감사할 따름이다.

바흐 - 골드베르크 변주곡

어느 날 저자는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PD를 집으로 초대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음악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자고 제안했는데 PD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의 유별난 '<골드베르크> 사랑' 때문이었는데, 그 곡은 자신에게 아무 때나 듣는 곡이 아니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한다.

그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며칠 동안 귀를 아끼며 깨끗이 하여 어떤 음악도 듣지 않고, 일찍 귀가해 가족들을 모두 재운 뒤 오디오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휴대폰을 끄고 전화선을 뽑고 불도 끈 뒤 한 음 한 음 명철하게 따라가며 듣는다는 것이었다. 이 쯤되면 그가 얼마나 그 곡을 사랑하는지 가히 짐작이 된다. 마니아의 경지에 이르면 가능할 일 같다.

슈베르트 -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가 작곡한 많은 실내악곡 가운데서도 불멸의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아르페지오네 소타나> A장조 D.821이다. 원래의 제목은 '아르페지오네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인데, 아르페지오란 악기의 이름이다. … 당시의 악기 제작자 슈타우퍼가 고안한 것이지만, 당대에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짧은 수명을 가졌던 악기를 위해, 위대한 작곡가가 최고의 명곡을 남겼으니 그가 슈베르트이다. - 본문 중에서

이 곡을 쓸 때 슈베르트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피아노조차 없는 차가운 방에서 작곡을 해야 했는데 그 시기에 쓰인 곡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라고 한다. 그 곡을 들어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당시 슈베르트의 절박한 상황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러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하다가 가문이 몰락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발휘하며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수순을 밟는가 싶었으나,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우울증은 그를 3년이나 괴롭히다가 마침내 떠나게 되는데, 우울증에서 회복한 후 처음으로 만든 곡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제2번 C단조 op.18이었으니 그 곡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듣는 이의 심장과 영혼을 송두리째 휘두르듯이 조금의 틈새도 주지 않으면서, 홍수 때의 폭포수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듯이 그렇게 흘러간다. 러시아의 강물을 연상시키는 볼륨 넘치는 오케스트라 위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피아노 소리가 건반 위로 격정적으로 흐르는 곡, 이것은 라흐마니노프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 본문 중에서

고전 음악을 듣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단지 귀가 즐겁다는 차원을 넘어서 어떤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 주기에 많은 이들이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음악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그 사람이 살던 시대, 그 사람의 사랑, 삶까지 아우를 수 있다면 그 음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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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화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라기에 무심코 책을 펼쳐 들었다. 종종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단지 누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선택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베스트셀러는 별 의미가 없다. 많이 팔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내 마음에 꼭 흡족하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오히려 작가나 출판사를 통해 읽을 책을 선택하는 편이 수월할 때가 많다.

아사다 지로를 처음 알게된 것은 <철도원>을 통해서였는데,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독자를 소리없이 사로잡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되어 마치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묘사는 탁월하고 재미있다. 그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8편 가운데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작품이 몇 편 있었는데, <올림포스의 성녀> <산다화> <재회> <마담의 목울대>가 바로 그것이다.

<올림포스의 성녀>

… 이제부터는 남들처럼 바람을 피울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후부터 노리코의 잔영은 한 층 더 강렬하게 이치로의 가슴을 점령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을 걸 하고 후회도 했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노리코와 헤어지던 밤에 몇 장 안 되는 사진과 손수 뜬 머플러, 싸구려 커플링을 모두 버려버린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 기억까지 묻으려 한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길 만큼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었다. 그렇게 묻어버린 기억 때문에 그 후 삼십 년 동안이나 아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노리코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노리코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올림포스의 성녀>는 마흔 중반을 넘어 선 한 사내의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왔다. 인생은 지나보아야 알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바로 인생인가 보다.

결혼도, 동거도 아닌 사실혼이 7년이나 지속되었지만, 연극을 너무 사랑하는 노리코는 이치로의 청혼을 거절하고 만다. 이치로는 '7년의 세월이 청춘의 낭비'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랑의 기억을 재산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되뇌이며 그녀를 떠나고 만다.

그렇게 오랜 시간 노리코를 그리워하다 문득 거리에서 석고상인 것처럼 보이는 한 그리스의 무녀를 만나게 되고, 이내 노리코임을 알게 된 순간 이치로는 그만 울어버린다. 그 순간 노리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래 전 그때 이치로를 떠나 보내지 않았다면 하고 수천 번 후회했다고 눈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만나고 싶었지만 꿈에서 밖에 만날 수 없던 노리코와 재회하게 되는 순간,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 뒤의 일들은 독자 개인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둔 채.

<산다화>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이 왜 산다화일까? 산다화는 뭐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산다화는 바로 동백꽃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이 꽃이 등장하는데, 이 꽃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파란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에게 기다리게 한 사과의 뜻으로 귓가에 꽂아주었다던 그 동백을 다시 환기하게 되는 순간, 가장은 이미 가족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이 꽃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다화>에는 부도가 코앞에 다가온 위태로운 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1년 동안이나 고심을 했을 정도로 괴로운 가장은 죽기를 각오하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이르게 되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좋았던 기억들과 현재의 불행이 마구 섞여 혼란하지만 훈훈했던 과거를 찾음으로 가장은 어쩌면 죽어서 가족에게 보험금을 주려고 했던 마음을 접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사다 지로는 <산다화>에 실린 단편 8편의 모든 결말을 독자에게 맡겨놓은 것 같다. 그러면서 현실의 반영인 소설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다양한 삶의 변주곡들을 들려주는 따뜻한 소설집 <산다화>는 필 듯 필 듯 하면서도 피지 않는 우리 동백나무의 봉오리처럼 아름다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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