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 세상에 무슨 일이? 2
질 칼츠 지음, 이상희 옮김 / 책그릇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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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은 모나리자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서라고 하는 편이 옳은 분류인 듯하다. 이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들에게 적당한 교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은 아주 훌륭했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을 만큼 좋은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그 시대에 세계 곳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조그만 메모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아주 까마득한 연대를 구슬을 꿰어가며 읽는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좋은 책을 많이 읽다보면 저절로 훌륭한 인격체로 자라날 것이라는,,

 

물론 어려서 책을 못읽어도 나중에 커서 그만큼 더 열의를 갖고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후자는 아무래도 어려서 독서를 못한 어른의 넋두리일 뿐이고, 아이들에게 되도록이면 양서를 읽히도록 어른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할 것 같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들을 책으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어른들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무엇일까. 책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본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충실한 역사서다. 다소 어린이들이 소화하기에 어려운 내용들도 있긴 하지만 그 어린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지식임은 자명하고, 독서지도에 관한 생각까지 덤으로 안겨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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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왕자 2007-08-05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천 해드리고 갑니다.. ^^
 
눈부처
박소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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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해 전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영화 <선택>을 본 적이 있다. 0.75평의 방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형기를 사는 장기수들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눈뜨게 되었다. 박소연의 <눈부처>도 장기수와 그 가족의 삶을 내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눈부처’가 무슨 뜻일까. 언뜻 생각하기에 눈사람처럼 눈으로 만든 부처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눈부처란 눈동자 속에 비친 사람의 형상을 말한다.

‘내 눈동자 속에 비친 사람을 부처 삼아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제목이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다가왔다. 기실 제목은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을 한 단어에 농밀하게 싣고 있었다.

김 선생은 30여 년 간 복역하다 출소했다. 간단하게 전향서만 작성했다면 빨리 풀려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거듭된 당국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김 선생은 그의 삶을 온전히 차가운 감옥에 바친 셈이다. 감옥 밖의 가족들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울과 멸시로 또 다른 감옥에서 살았다. 정치적 폭력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한 가족을 비탄에 빠뜨렸다.

한 사람의 내면에 속한 양심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머릿속 생각에 대해 누가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할 수 있는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국가권력이 개인의 신념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소설은 끊임없이 그런 것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 선생이 감옥에 있는 동안 노모와 아내는 가장의 역할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장사에 바쳤고, 아들은 일류대에 진학했으나 그것은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딸은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는 듯했으나 아내가 병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장의 역할을 위임받게 되었다. 가난은 한시도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채현은 오빠를 학교에 보내고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 무모하게 몸을 던졌고, 나중에는 뱃속의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모두가 자신의 탓인 것 같아 괴로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들은 출옥한 아버지가 반갑지 않다. 이미 오래 전에 아버지와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것이다. 그깟 신념이 뭐라고 가족들을 이리 고생시키는지 아들은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은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주말마다 집에 오시는 아버지가 부담스럽다.

아들은 아내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며느리는 그간 시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과 자주 다투었다. 김 선생은 며느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손주들과도 살갑게 만날 수 없었다. 며느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친정으로 피하듯 떠나 버렸다. 그러기를 얼마간 반복하다 급기야 아들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 버린다.

세상이 좋아져 김 선생에게도 송환의 기회가 주어진다. 채현은 아버지에게 북으로 갈 것인지 묻는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았을 아버지를 생각하여 채현은 김 선생에게 북으로 가라고, 자신은 오빠가 있는 캐나다에 가서 살면 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북으로 가버리면 다시 홀로 남게 될 딸을 생각하여 차마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일이 생기면 안된다는 생각에 채현은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이미 남으로 올 때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평생 꿈에 그리던 고향이지만, 그곳에 두고 온 처와 자식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고 북으로 가더라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채현을 돌보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만이 계시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팔순의 나이에도 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순전히 딸 때문이었다.

채현은 하루도 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환각제를 멀리하려다가 술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갱생을 위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했지만 채현은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출옥했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는 일은 힘겨웠다.

아버지를 두고 아무리 말해도 답이 없는 ‘벽’이라고 말하는 아들이나, ‘나는 늘 취해있고, 아버지는 늘 깨어있다’는 딸의 말이 모두 가슴 속을 파고든다. 소설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과연 정치적인 이유가 인간의 실존적 가치와 권리보다 우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박소연의 <눈부처>는 분단된 조국에서 양심을 지키느라 빛나는 젊음을 차가운 감옥에 바친 장기수의 삶을 다루었다. 정치적 신념을 지키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은 주인공과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지만 언젠가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딸의 고통과 소외를 통해 독자들은 굴곡진 현대사에 대해, 인권의 가치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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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왕자 2007-08-0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훌륭한 잘 읽었어요... 저도 꼭 읽고 싶네요... 추천 해드리고 갑니다. ^^
 
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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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시기마다 조금 더 눈길이 가는 장르가 있기 마련인데 요즘은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늘 철학코너에 발길이 머문다. 어려운 철학 용어만이 나열된 책은 연거푸 하품을 하게 만들고,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슬그머니 책장을 덮게 된다.

나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 철학책이 좀 더 쉽게 쓰여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철학이 우리 삶과 유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멀어지고 있다면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철학 하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의 만남은 매우 반가웠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 <철학 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저자 김용규의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먼저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적 삶을 후식으로 들려준다.

메인 요리보다 더 진수성찬인 후식을 음미하며 가끔 소화불량에 걸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듭 의미를 되새겨 보면 가슴 속 깊이 울리는 무언가와 만나게 된다.

영화는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영화는 음향과 영상으로 '삶에 관한 보편적 주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자기 이해를 새롭게 해주는 일들을 분명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가능하다면 작품을 감상한 다음, 해당하는 부분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면 좋다고 조언했다.

이 책은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의 주제에 3편씩의 영화를 선별하여 실어 놓았다. 귀동냥은 많이 했으나 보지 못한 영화 가운데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책에서 그 영화를 만났다.

사랑 없이는 발광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


"인간은 왜 그토록 간절하게 타인에게서 특히 이성으로부터 사랑 받길 원하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심히 괴로워하고 발광하며 때로는 선뜻 죽음을 택하기도 하는가?" (203쪽)

사랑,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주제가 아닌가.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실존적 소외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오직 '사랑'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랑이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인간성과 융합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갈망으로 그것은 죽음으로 내몰린 인간의 실존적 분리 현상에 기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열정이기 때문에 가장 강렬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것이 인간이 가정을, 집단을 사회를 그리고 인류를 구성하는 이유이자, 그것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파니가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났고, 어머니는 홀로 파니를 키웠으나 자기중심적인 어머니는 파니와의 제대로 된 인간 결합을 보여주지 못한다. 파니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교감도 할 수 없어 고독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죽음을 배우는 모임'에 나가는 등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생기는 데 그것은 점성술가 오르페오와의 만남이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파니는 새롭게 태어난다. 병든 오르페오를 진심으로 간호하며 사랑의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파니는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고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남에게 사랑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며, 능력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아가 삶과 세계 그리고 그것의 총화로서 신을 사랑하는 것 이 모두가 '주는 활동'이며 '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활동과 능력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원초적 분리감, 소외감, 즉 죽을 것만 같아 차라리 죽음을 열망하는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219쪽)

행복이란 스스로 원하고 만들어 가야하는 것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데 흔히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린다.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할까.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도 없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불행할 수 있고, 남들 보기에 딱하게 보여도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는 멋진 외모나 부자와는 거리가 멀다. 서점을 꾸리고 싶으나 형편상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한다. 귀도는 성실하며 타고난 낙천성으로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스스로도 작은 기쁨을 누릴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랭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자기 불행을 남에게 말하지 말 것을 권하고, 둘째는 주어진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울 것을 권한다. '슬픔은 독과도 같아서 누구나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을 동정은 할망정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독일군에게 잡혀서 죽으러 가는 순간에도, 아직 병정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숨어서 자기를 보고 있는 아들 조슈아를 위해 그 특유의 '코믹한 병정놀이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만일 귀도가 실재로 잡혀가는 것처럼 보이면 조슈아가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자연스러운 '행복 만들기'가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과 눈물을 함께 경험하게 하며, 동시에 고대 '스토아 철학'의 진수까지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89∼90쪽)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이에 대한 태도는 바꿀 수 있다.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되지만, 행복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나서서 쟁취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행복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도 행복을 만들어간 귀도의 이야기는 깊은 여운을 안겨다 주었다.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에 소개된 영화들을 빠짐없이 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또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될까. 저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영화라는 틀 안에서 조명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짚어보고, 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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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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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전노 최문술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한편의 추리소설 같다. 범인이 누군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파렴치한 역사가 밝혀진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자는 최문술의 장남 동연이다. 최문술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했는데 사이에서 동연과 성연을 두었고 재혼하여 막내 지엽을 얻었다. 두 번째 부인 성경애가 데리고 온 딸 혜경을 포함하면 공식적으로 최문술의 자녀는 넷이다.

성경애와 재혼 후 사춘기에 접어든 동연은 자주 성경애와 부딪쳤다. 자신보다 20년이나 젊고 대학물까지 먹은 마누라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최문술은 동연을 외삼촌네로 보낸다. 지방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동연의 외삼촌은 아이를 무척 싫어하여 아이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동연을 보냈으니 동연이 편할 리 있겠는가.

어쨌든 외삼촌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약국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던 동연은 집을 나와 그때부터 배회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여자 때문에 아이를 버린 것은 최문술의 대표적인 잘못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더한 과오들이 속속 밝혀진다.

돈이 궁했던 동연은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요구했을 것이고, 구두쇠 영감이 순순히 돈을 내놓지는 않았을 테니 동연이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능했다. 어린 동연을 버렸고 어른이 되어 불쌍한 모습으로 나타난 동연을 동정하기보다 매몰차게 대했으니 누가 보더라도 둘 사이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관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또한 실제로 동연의 신발에 최문술의 혈흔이 묻어있으니 현장에 동연이 있었다는 그 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동연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한 국진은 사건을 수사하며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로만 판단했다. 그러나 이 명백한 살인 사건에도 의문을 품는 자가 있으니 바로 최문술의 둘째 아들 성연이었다. 동연이 아무리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기로서니 그래도 살인을 할 만한 인물은 못된다는 게 예비신부인 성연의 생각이었다.

슈퍼 아주머니의 진술대로 동연이 집에 들어왔다 나간 시간이 5분에서 10분 정도라면, 그 시간에 그런 끔찍한 사건을 벌인다는 게 가능한가 하고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국진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지만 사건을 엎을 만큼의 증거는 못된다고 주장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시간 개념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성연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성경애의 딸 혜경를 비롯하여 예전에 자신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던 연옥을 만나러 간다. 연옥은 사팔뜨기에다 고아였다.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생활력이 없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짐꾼일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소설 속 최대 피해자는 연옥이었다. 물론 동연도 최문술도 불쌍한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지만….

아버지처럼 연옥을 업신여겼던 동연은 어느 날 연옥과 단둘이 집에 남겨진다. 해는 기울어 어둑어둑해졌고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연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고 연옥은 바느질에 열심이었다. 그날따라 동연의 눈에 연옥은 천사처럼 예쁘게 보였다.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동연은 그 후 연옥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연옥은 아버지에게 유린을 당하고 있었다.

동연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아이를 밴 연옥은 쫓기다시피 바보 기덕에게 시집을 간다. 별명이 바보일 뿐 기덕은 이미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연옥은 허구헛날 남편 기덕에게 맞았고, 태어난 아이 수길도 따뜻한 아버지의 정이 무엇인지 알 길 없이 냉대 속에서 자라야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들은 나름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때로는 진실이 꼭 밝혀져야 정의롭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다. 누가 누구의 짐을 지고 간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유년의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일종의 보고서 같기도 했다. 현대사의 슬픔이 켜켜이 녹아있기도 했고, 한 개인의 아픔은 대를 이어 계속되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나 강자 편일까.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일 수 있는지, 또 그 대가는 얼마나 큰 것인지 소설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소중한 삶을 얼마나 잘 영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늘 자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껏 잘 알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니 끔찍하게 아픈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보니 모두 낯선 사람들만이 주위에 포진해있었다. 얼마나 낯선 느낌이었을까. 마치 예수처럼 죄지은 자의 죄를 등에 업고 가는 동연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소설 속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산만한 독자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 그것은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소설은 묵직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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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자전거
크리스틴 슈나이더 지음, 에르베 삐넬 그림, 공입분 옮김 / 그린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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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동화책을 보게 되었다. 취학 전 아이들이 보기에 적당한 이 책은 크기가 아주 큼직해서 좋았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조조는 어린아이들이 타는 세발 자전거가 아니라 어른들이 타는 두발 자전거를 타고 싶어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더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아직 조조가 두발 자전거를 탈 만큼 크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좀처럼 조조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어느 날 보조 바퀴가 달린 빨간 자전거를 선물한다.  조조는 뛸듯이 기뻐하며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조조는 그처럼 꿈도 마음껏 펼쳐나갈 것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이런 그림책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동화는 언제보아도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가끔씩 어른들도 동화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

세파에 시달리다가도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건 기실 동화만이 가지고 있는 힘일 것이다. 아이가 있는 어른이라면 1석 2조인 셈이다. 조카 선물용으로도 아주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과 친하게 만들어 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읽히는 게 아니라 놀이가 되는 책읽기가 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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