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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수전노 최문술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한편의 추리소설 같다. 범인이 누군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파렴치한 역사가 밝혀진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자는 최문술의 장남 동연이다. 최문술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했는데 사이에서 동연과 성연을 두었고 재혼하여 막내 지엽을 얻었다. 두 번째 부인 성경애가 데리고 온 딸 혜경을 포함하면 공식적으로 최문술의 자녀는 넷이다.
성경애와 재혼 후 사춘기에 접어든 동연은 자주 성경애와 부딪쳤다. 자신보다 20년이나 젊고 대학물까지 먹은 마누라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최문술은 동연을 외삼촌네로 보낸다. 지방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동연의 외삼촌은 아이를 무척 싫어하여 아이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동연을 보냈으니 동연이 편할 리 있겠는가.
어쨌든 외삼촌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약국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던 동연은 집을 나와 그때부터 배회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여자 때문에 아이를 버린 것은 최문술의 대표적인 잘못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더한 과오들이 속속 밝혀진다.
돈이 궁했던 동연은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요구했을 것이고, 구두쇠 영감이 순순히 돈을 내놓지는 않았을 테니 동연이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능했다. 어린 동연을 버렸고 어른이 되어 불쌍한 모습으로 나타난 동연을 동정하기보다 매몰차게 대했으니 누가 보더라도 둘 사이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관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또한 실제로 동연의 신발에 최문술의 혈흔이 묻어있으니 현장에 동연이 있었다는 그 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동연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한 국진은 사건을 수사하며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로만 판단했다. 그러나 이 명백한 살인 사건에도 의문을 품는 자가 있으니 바로 최문술의 둘째 아들 성연이었다. 동연이 아무리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기로서니 그래도 살인을 할 만한 인물은 못된다는 게 예비신부인 성연의 생각이었다.
슈퍼 아주머니의 진술대로 동연이 집에 들어왔다 나간 시간이 5분에서 10분 정도라면, 그 시간에 그런 끔찍한 사건을 벌인다는 게 가능한가 하고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국진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지만 사건을 엎을 만큼의 증거는 못된다고 주장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시간 개념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성연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성경애의 딸 혜경를 비롯하여 예전에 자신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던 연옥을 만나러 간다. 연옥은 사팔뜨기에다 고아였다.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생활력이 없는 남편과 아이를 두고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짐꾼일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소설 속 최대 피해자는 연옥이었다. 물론 동연도 최문술도 불쌍한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지만….
아버지처럼 연옥을 업신여겼던 동연은 어느 날 연옥과 단둘이 집에 남겨진다. 해는 기울어 어둑어둑해졌고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연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고 연옥은 바느질에 열심이었다. 그날따라 동연의 눈에 연옥은 천사처럼 예쁘게 보였다.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동연은 그 후 연옥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연옥은 아버지에게 유린을 당하고 있었다.
동연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아이를 밴 연옥은 쫓기다시피 바보 기덕에게 시집을 간다. 별명이 바보일 뿐 기덕은 이미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연옥은 허구헛날 남편 기덕에게 맞았고, 태어난 아이 수길도 따뜻한 아버지의 정이 무엇인지 알 길 없이 냉대 속에서 자라야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들은 나름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때로는 진실이 꼭 밝혀져야 정의롭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다. 누가 누구의 짐을 지고 간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유년의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일종의 보고서 같기도 했다. 현대사의 슬픔이 켜켜이 녹아있기도 했고, 한 개인의 아픔은 대를 이어 계속되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나 강자 편일까.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일 수 있는지, 또 그 대가는 얼마나 큰 것인지 소설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소중한 삶을 얼마나 잘 영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늘 자각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껏 잘 알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니 끔찍하게 아픈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보니 모두 낯선 사람들만이 주위에 포진해있었다. 얼마나 낯선 느낌이었을까. 마치 예수처럼 죄지은 자의 죄를 등에 업고 가는 동연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소설 속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산만한 독자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 그것은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소설은 묵직한 여운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