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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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사회 과학 도서에 관심이 많아져 소설을 홀대하고 있는 저에게 괜찮은 소설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책은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습니다. 도서관 책꽂이 가장 아래 외롭게 3권이 꽂혀 있었는데 빳빳한 표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하는 것과 함께 사랑 받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두 가지였습니다.

예전의 저는 홍수처럼 쏟아져 있는 소설 가운데 어떤 것을 읽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홍보가 잘 된 소설 중 하나를 골라 읽곤 했었습니다. 홍보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 그만큼 좋은 작품일 것이라는 막연하고도 위험한 발상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무렵부터는 스스로 좋은 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쓴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출판사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별명이 '똥구멍'인 주인공 한동구는 난독증에 걸린 초등학생으로 어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감정 다툼을 비교적 해학적인 어투로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초등학생의 신분으로 담임선생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늦게 태어난 것을 자책하기도 하는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불쑥불쑥 웃음이 찾아들게 만들게도 했고, 저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무릎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생각들을 이렇게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풀어낼 수 있는 작가의 놀라운 문장력에 감탄하면서 줄곧 흐뭇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할머니의 바지에 그려져 있는 아메바같이 생긴 기이한 모양이 금세라도 꿈틀거리며 기어 나올 것 같다는 표현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첫사랑의 선생님은 암울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 영주마저도 세상을 버리게 되면서 소설은 막바지로 접어들게 됩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70년대 후반부터의 생활상은 우리들에게 아날로그 시대를 회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생각하더라도 애틋하기만 한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아주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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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1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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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창문 너머로 이틀째 소음이 들려온다. 도로를 갈아엎고 무슨 공사를 하는지 하루 종일 굴착기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차가운 날씨에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구슬땀을 흘려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 소음 정도는 투정에 불과한 것이리라.

애꿎은 냉커피를 축내면서 침대를 치워 넓어진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나는 김형경의 소설을 읽고 있다. 호시탐탐 울 기회를 노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울고 싶은 것도 인간의 욕구에 속한다면 <세월>을 읽으며 나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어린 정숙이 친척 아저씨 집에 맡겨져 이별하는 장면이 누선을 자극했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정숙과 남동생은 친척집이 아니라 하숙비를 받는 남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모든 골목이 꺾이는 곳은 기대와 상실의 지점이다'. 뒤에 남겨져, 골목의 에움길을 돌아 사라지는 아버지를 배웅하거나, 떠난 어머니가 길모퉁이를 돌아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 속에 담긴 참된 상실감을 알지 못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고교시절 고모네서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는데, 아마 3권을 다 읽진 못하고 건성으로 읽어 대강의 줄거리조차 희미한 책이어서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먼저 어머니가 떠나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떠나고 친척집에 남겨지게 되는 아이는 그 후로 거듭 겪게 되는 상실의 가장 첫 경험을 한 셈이고, 더 험한 진흙구덩이로 떨어져 내리는 척락에 대한 가벼운 서주일 뿐이었다.. - 본문 중에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면서 정숙은 마침내 남동생과 따로 살게 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그녀는 같은 과 친구인 잿빛바바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는 하현규가 등장한다.

연극동아리에 가입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새롭게 시작된 대학생활을 통해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삶의 의미를 찾아 순탄하게 살 것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점점 더 짙어지게 된다.

한 남자의 열정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그에게서 헤어날 수 없는 그녀가 나는 못내 가슴아프다. 봉건적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키워졌다고는 하지만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서야 마침내 그녀는 홀로서기에 성공하게 된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인가. 누구나 가슴 속에 한두 가지 말하지 못하는 마음들을 밀어 넣은 채, 때로 그 마음을 허공의 빈 공간으로 날려보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인가. 환한 웃음 뒤에 언뜻 드러나는 어두움, 아무 일 없듯 평범하게 주고받는 말 뒤에 있는 고통의 기미들이 잿빛바바리와 그녀 사이를 기민하게 오간다.

좋은 기회들이 많았고, 조금씩 그 일에 몸을 담가 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제대로 된 직장을 포기하고 만다. 그 대신 영혼을 달구는 독서와 정신을 모조리 쏟아 붓는 습작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생활이 좀 어렵더라도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을 하며, 본성의 이끌림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것, 온전히 소명에 따라서만 사는 일의 만족감에 대해 꿈꾸게 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인텔리 부모를 두고도 그들의 이별로 인해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상실과 슬픔의 극한을 경험하게 된다. 스무살 무렵 찾아온 사랑도 너무 버겁다.

세월이 흐른 후 주인공은 생각한다. 하현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 시절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또 다른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을 것이고 설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너무 많은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했을 것이라고. 거듭되는 과오와 참회의 연속이 바로 인생이라고.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첫 번째 기능으로 왜 자기 위무의 기능을 꼽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자로 하여금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소설 <세월>은 삶과 사랑의 여러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여운이 긴 소설이었다. 다음의 글이 한 번 더 울림이 있는 파장을 남겨준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누구도,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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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9-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연잎차 2007-09-0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에님, 저도 감사합니다. ^^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
이강옥 지음 / 돌베개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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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로 영남대 이강옥 교수께서 쓰신 육아 에세이다. 수 년 전, 사촌 언니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한들 이십대 초반의 내가 육아 에세이를 선뜻 읽기란 애당초 무리였을 터이다.

첫 장부터 저자는 누선을 자극해오는 위대하고 숭고한 체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읊고 있었다. 그 사이로 오늘 막 도착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실황 음반의 선율이 잔잔히 흘러 나와 감동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아이가 아이를 키운다는 냉소적인 말을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최소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절제와 자기감정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교수는 <임꺽정>의 곽오주를 예로 들어 인격 수양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었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입덧이 음식물 속의 유해한 독으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라는 설도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모체의 입덧조차 얼마나 숭고한 보호 본능의 표현인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는 기대한 시각에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아빠를 애타게 부르다, 아빠 마중을 나가자고 할머니를 졸랐다고 한다. 그리고 찬바람 속에서 지나가는 검은 옷 입은 남자마다 가리키며 "아빠, 아빠."라 불렀다. 그러면서 1시간을 서 있었다. 그러다 아빠가 나타나자 큰 소리를 지르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도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이렇게까지 타인의 생존을 위해 절실한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던가? 아이는 내가 자기의 생존을 위해 한없이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해 줌으로써, 이 쓸쓸하고 고단한 나의 삶을 따뜻하게 밝혀주었다. 칠흑 같은 창에 불을 켜 주듯이. - 본문 중에서

주위에 어린 아이는 고모의 둘째 아이 뿐이라 육아 에세이를 읽으며, 자꾸만 그 녀석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는데, 이 책은 결혼할 친구에게 선물하면 참 좋을 책 같다. 어머니가 될 여성은 물론 아버지가 될 남성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발라서 없어지는 화장품이나, 목욕 용품보다 언제 방문해도 그들의 집 책장에 꽂혀 있을 책 한 권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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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음에 관하여
함정임 지음 / 이마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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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거르지 않고 음악을 켜놓곤 한다. 가령 설거지를 할 때나, 책을 읽을 때, 청소를 할 때, 화초에 물을 줄 때 등등…. 나는 적막함을 견딜 수 없어하는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음악이 아닐지라도 라디오 디제이의 음성이라도 들을 수 있어야 외롭지 않은가 보다.

그에 비해 친구 하나는 책을 읽을 땐 오로지 책만 읽고, 음악을 들을 땐 오로지 음악만 듣는다고 했다. 생각하니 책만 읽고, 음악만 들으면 좀 더 그 세계로 심취하기 쉬울 것 같기도 하다.

함정임의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는 우연히 내 시야에 들어온 책이었다. 흰색 표지에 연두색의 글씨체가 귀여웠다. 함정임, 그녀를 떠올리면 우선 마음이 아릿해온다. 세상의 슬픔 가운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다음의 인용문은 소제목 가운데 <그리움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의 일부분이다.

아빠가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부터 아이는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곁에 없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이끌리고, 보고 싶고, 생각하는 마음, 생각하다 못해 섬기는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그리움의 실체라면 다섯 살 아이에게 그리움이란 너무 일찍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다.

그러나 한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란 존재의 그늘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내 유년기를 돌이켜보면 그리움이란 단지 형벌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이에게 그리움이란 나에게 그러했듯이 생을 보다 웅숭깊게 만드는 불행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그녀는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사랑에 대해 정의한다.

"사랑은 분명 슬픔을 남기지만, 또한 그 슬픔을 정화시키는 힘도 배양한다. 그래서 사랑은 배반도 상실도 새로 자라난 사랑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 - 본문 중에서

여행에 관한 이야기, 전혜린과 기형도에 관한 이야기, 축구와 사진전에 관한 이야기, 책에 대한 이야기, 남편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을 읽고 난 후,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차가운 인상을 지녔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 대해서 그녀는 만나면 만날수록, 시간이 갈수록 정이 깊어지는 관계를 원하고, 언제든 떠올리면 기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소설가이자 어머니, 딸로서의 다양한 위치 변화를 하고, 그 때마다 순간순간 그녀의 가치관을, 인생관을 엿보는 일은 흐뭇하기까지 했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했던가. 이 산문집으로 말미암아 소설가 함정임을 더 좋아하게 될 것만 같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성찰이 남달랐던 그녀를 독자들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도 그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새삼 내가 거들 것도 없이 그녀는 어디서나 눈을 부시게 하는 사람이다. 찬란해서만은 아니다. 자코메티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 같은 신비한 분위기 때문이며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내력이 고독하게 타자의 내면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녀가 쓴 산문도 그와 같다.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빗소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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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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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오후, 김대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을 들으며 책을 보고 있었다. 오직 음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걸 느껴본 사람이라면 명명할 수 없는 이 황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의 녹턴 E플랫 장조 Op.9-2번은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어 여전히 정겹고, 녹턴 20번 C# 단조는 영화 <피아니스트>와 함께 깊은 감동을 안겨준 곡이었다. 방송국이 폭격을 맞은 상황에서도 주인공이 연주하기를 멈추지 않던 바로 그 곡이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아름다운 피아노곡의 대비는 그야말로 전쟁을 더욱 참담하게, 동시에 피아노곡의 선율을 더욱 아름답게 부각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읽은 책은 시인 최영미가 쓴 미술기행 <시대의 우울>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 쓴 일기를 후일 정리하여 도시별로 묶은 것이라 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의 작품이기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출판사와 출판연도를 먼저 살펴보는 나는 이 작품이 97년에 출간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때는 물론 시인 최영미를 알지도 못했거니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지도 모르던 때였다.

좋은 책을 읽을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진작 읽지 못하고 지금에야 보게 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읽게 된 걸 다행스런 일이라 여기며 감사할 때가 종종 있다.

간간이 만나게 되는 유럽의 멋진 조형물과 고대 유적의 사진들, 그리고 작품들의 매력에 흠뻑 취한 나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 어렵지 않아서 마냥 좋았다.

전문가가 딱딱하고 어렵게 설명한 책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하품이 나오는 반면, 이 책은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잠이 오면 잠을 깨워서라도 계속 읽게 만들며 편안하게 독자를 이끌었다.

이 책에는 많은 작품들이 나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내가 모르는 작가들도 많이 있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내 눈은 특히 렘브란트에 집중되었다. 그녀의 첫 유럽 여행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 글을 읽는 독자도 자연스레 비중있게 눈에 더 들어온 것 같다.

렘브란트의 수많은 자화상에 나타난 표정들은 참으로 오묘했다. 예술가의 뛰어난 감각에 경외감, 그 이상의 감정을 반복해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영미는 렘브란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런던에서, 쾰른에서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자화상들을 어지간히도 많이 대했지만, 볼 때마다 늘 다른 느낌을 준다. 평온하게 가라앉다가도 문득 들끓고, 웃다가 다시 분노하고, 상처받는가 하면 곧 냉소한다. 놀람과 두려움의 차이를, 자포자기와 견인의 미세하고도 심오한 차이를 그보다 더 잘 표현해낸 화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또 다르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표정을 한순간에 포착한 그의 초상은 언제 보아도 신선하고 현대적이다. 조금치의 감상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렘브란트의 그 끔찍한 자의식은 거의 19세기의 보들레르 수준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며 캔버스 밖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작품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느낌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작가 덕분에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책의 도처에서 그녀가 시인임을 상기해주는 시적인 표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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