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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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오후, 김대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을 들으며 책을 보고 있었다. 오직 음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걸 느껴본 사람이라면 명명할 수 없는 이 황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의 녹턴 E플랫 장조 Op.9-2번은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어 여전히 정겹고, 녹턴 20번 C# 단조는 영화 <피아니스트>와 함께 깊은 감동을 안겨준 곡이었다. 방송국이 폭격을 맞은 상황에서도 주인공이 연주하기를 멈추지 않던 바로 그 곡이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아름다운 피아노곡의 대비는 그야말로 전쟁을 더욱 참담하게, 동시에 피아노곡의 선율을 더욱 아름답게 부각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읽은 책은 시인 최영미가 쓴 미술기행 <시대의 우울>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 쓴 일기를 후일 정리하여 도시별로 묶은 것이라 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의 작품이기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출판사와 출판연도를 먼저 살펴보는 나는 이 작품이 97년에 출간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때는 물론 시인 최영미를 알지도 못했거니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지도 모르던 때였다.

좋은 책을 읽을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진작 읽지 못하고 지금에야 보게 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읽게 된 걸 다행스런 일이라 여기며 감사할 때가 종종 있다.

간간이 만나게 되는 유럽의 멋진 조형물과 고대 유적의 사진들, 그리고 작품들의 매력에 흠뻑 취한 나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 어렵지 않아서 마냥 좋았다.

전문가가 딱딱하고 어렵게 설명한 책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하품이 나오는 반면, 이 책은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잠이 오면 잠을 깨워서라도 계속 읽게 만들며 편안하게 독자를 이끌었다.

이 책에는 많은 작품들이 나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내가 모르는 작가들도 많이 있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내 눈은 특히 렘브란트에 집중되었다. 그녀의 첫 유럽 여행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 글을 읽는 독자도 자연스레 비중있게 눈에 더 들어온 것 같다.

렘브란트의 수많은 자화상에 나타난 표정들은 참으로 오묘했다. 예술가의 뛰어난 감각에 경외감, 그 이상의 감정을 반복해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영미는 렘브란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런던에서, 쾰른에서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자화상들을 어지간히도 많이 대했지만, 볼 때마다 늘 다른 느낌을 준다. 평온하게 가라앉다가도 문득 들끓고, 웃다가 다시 분노하고, 상처받는가 하면 곧 냉소한다. 놀람과 두려움의 차이를, 자포자기와 견인의 미세하고도 심오한 차이를 그보다 더 잘 표현해낸 화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또 다르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표정을 한순간에 포착한 그의 초상은 언제 보아도 신선하고 현대적이다. 조금치의 감상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렘브란트의 그 끔찍한 자의식은 거의 19세기의 보들레르 수준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며 캔버스 밖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작품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느낌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작가 덕분에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책의 도처에서 그녀가 시인임을 상기해주는 시적인 표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 반가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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