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서민 지음 / 다밋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저자가 참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라는 직업은 보람이 없으면 하기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다. 늘 아픈 사람들만 대하다 보면 스스로 먼저 지치지 않을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일텐데, 그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강도를 말로 표현한들 얼마나 재현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있자니 너무 바빠서 1년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친구가 생각났다. 인턴 생활을 하느라 학생일 때 비해 10킬로그램 정도 빠진 모습을 보고서 나는 그 친구가 얼마나 고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이 10킬로그램이지 정상 체중에서 빠진 모습은 보는 이를 애처롭게 만든다.

그래도 강단이 있는 친구기에 그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일 게다. 가끔 휴가를 받아서 친구를 만날 때, 그 친구는 언제나 밝은 모습이다. 모처럼의 휴가를 확실하게 즐기고 들어간다. 연극도 보고 영화도 보고, 부모님과 짧은 여행도 다녀오고. 나는 어서 인턴 생활이 끝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책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한겨레>에 가끔 칼럼을 쓰는 서민 교수의 책이라니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헬리코박터가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모양이지. 그러면 한번 들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이 책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알던 상식을 제대로 짚어준다. 가려운 곳을 손 안대고 긁어준다고 할까.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의학 상식들도 듬뿍 알려준다. 그것도 심각한 이야기를 전혀 심각하지 않게 저자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양념해 공급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요절복통 의학 상식서가 여기 있었다. 한 호흡에 읽어나갈 수 있을 만큼 술술 읽히면서 곳곳에 폭탄 같은 웃음을 심어놓았다.

변비 환자들에게 제안한다. 그대들의 고통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고.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좋지만, 아이 낳는 것과 무관한 거짓산통처럼 그 신호가 대변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면, 미련없이 화장실을 나와 주면 안 될까.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신호가 나면 그때 들어가야지, 지금처럼 신호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오기로 뭔가를 밀어내 보려는 건 모두의 고통이다. 변비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밖에서 변을 참느라 온갖 기묘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설사 환자에게도. 변비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늦게 나오는 - 신문을 본다든지, 담배를 피운다든지 - 사람은 더더욱 반성할 일이다. 화장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변비 환자 때문에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 저자가 지하철역이며 인근 서점에까지 들러 볼일을 해결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술한 것인데, 저자는 학생을 가르치며 환자도 돌보는 직업말고 저자만이 가진 유머러스함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다른 직업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겨울 감기에 걸린 나는 내과를 찾았고, 의사에게 비타민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비타민 제제를 먹으면 감기에 덜 걸릴까요?" 라는 물음에 의사는 흥쾌히 대답했다.
"비타민 좋지요. 비타민을 먹으면 감기에 덜 걸립니다. 건강에 좋아요. "

나는 이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타민 제제를 사들고 와서는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 알약이 너무 큰 까닭에 한번 먹어 본 사람들은 먹지 않으려 들었다. 비타민 제제보다는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비타민이 진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감기에 걸려서 허약해진 마음에 의사말도 촉매제가 되어 비타민 제제를 샀던 나, 지금은 후회한다.

의사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약보다는 음식에서 얻는 게 진짜 비타민이지요.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충분한 휴식과 과일을 많이 드세요."라고 했더라면 그날 약국에 들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저자는 비타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비타민도 지용성일 경우 몸에 축적되어 부작용을 일으키고 수용성비타민도 과용하면 설사를 일으킨다고.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은 미량이므로 음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데 굳이 비타민 제제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비타민 제제는 음식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속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저자는 의료소송에 대한 이야기, 제왕절개와 포경 수술에 대한 이야기, 육식은 무조건 나쁘고 채식은 무조건 좋다는 이야기에도 일격을 가하고,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성장 호르몬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 등 우리가 평소 궁금했지만 얻을 수 없던 이야기들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퀴즈도 내고 있다. 물론 나는 100점을 맞았다. 문제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아마도 애초에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100점이 되도록 쉽게 만든 것 같다.

어려운 의학 상식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풀어서 해설해주고 있는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놓고 있다. 책은 읽은 이들이라면 주저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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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3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잎차 2006-04-03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고 나서 다른 분들의 서재를 방문하다가 마태우스님이 이 책의 저자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무척 놀랐습니다^^ 이렇게 방문까지 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기실 좋은 책이었고 진심으로 쓴 서평이랍니다. 4월은 너무 보내기 아까운 달인 것 같습니다. 행복한 4월 되시길..
 
정혜
우애령 지음 / 하늘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몇 해 전 <여자, 정혜>라는 영화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어떤 영화일까 대강의 줄거리는 친구에게 들었고,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도 마음에 들어 영화관을 찾으리라 마음먹었는데 어쩌다가 영화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 비디오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우리 동네 조그만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가 다음 방문에서는 찾는 이가 적어 반품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눈에 밟히는 것이 비디오 가게였는데, 이럴 수가. 그 많던 비디오 가게는 어디로 갔을까. 각종 할인 혜택 덕분에 영화관에서 보나 비디오로 보나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비디오 가게가 많이 문을 닫아버렸다. 동네에 유일한 비디오 가게에서 구할 수 없다니 영화 채널에서 한번 보게 되기를 소망하는 수밖에.  

그러다가 신문을 통해 <여자, 정혜>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된 사실로부터 읽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에라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장편소설 쓰는 것보다는 단편을 쓰는 것이 훨씬 힘든 일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나는 우애령의 단편 <정혜>를 보고 이 말에 수긍하게 되었는데, 단편은 정말 힘이 셌다. 이 짧은 분량의 글에서 어떻게 그토록 강렬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번 읽었다.

방금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아까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새로 각인되었다. 다시 한번 읽으면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소설을 읽으며 영화의 두 주인공이 소설의 주인공에 자꾸만 겹쳐지며 읽히는 것이었다. 김지수의 하얀 얼굴과 매력적인 황정민의 모습 때문에 영화를 본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만 일렁거린다.

정혜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꺼린다.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유리문 밖의 사람들을 늘 응시하면서도 정작 그들 사이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는 여린 아이 같은 사람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받은 상처 때문에 어른이 되는 일이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정혜는 단정하게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갖추어 입고 기름을 부은 듯한 매끄러운 음성으로 다가오는 구둣방의 남자 점원들이 부담스러웠다. … 그녀는 여자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접근하는 이런 부류의 남자들이 싫었다. 그녀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버린 남자들과 이들은 다 비슷한 부류들이었다. … 그녀는 점포를 나오면서 카운터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좀더 인간적으로 손님을 대하면 좋겠어요. 여자 구두를 파는 데 꼭 남자를 고용해야만 되나요? 어리둥절한 카운터의 여자의 얼굴 앞에서 돌아서 허둥지둥 문을 빠져나오는 정혜의 뒤로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정혜는 귀를 막고 걸었다. - 본문 중에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소통하려 할 때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그럴 때면 읽던 어려운 책들을 덮고 안데르센 동화와 같은 책으로 정혜는 마음의 평안을 되찾곤 했다. 그렇게 상처만 받아온 정혜에게도 운명처럼 사랑이 찾아온다. 정혜는 아니라고 되뇌이면서도 준석을 기다리는 자신과 종종 마주친다. 작가 지망생으로 비춰지는 준석은 때때로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르면서 정혜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입은 회색빛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고. 정혜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본 일이 없기에 낯설기만 하다.

그 후로도 날씨가 좋다던가 비가 온다던가 하는 말을 건네며 정혜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준석을 정혜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저녁 초대를 한다. 준석은 며칠 밤샘 작업을 한 덕에 힘들겠다고 했지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정혜를 거절할 수 없어 가겠노라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 준석은 나타나지 않고 정혜는 상처받았다.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만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준석은 정혜에게 자신이 약속을 못 지킨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만 정혜는 냉정하다. 그 후 한동안 우체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후줄근한 준석이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정혜 앞에 나타났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며 아직도 그 초대가 유효한지 묻는다. 정혜는 여전히 냉정했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악마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환기하게 되자 정혜는 분노한다. 그와는 반대로 애꿎은 피해자는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에 친척 아저씨를 헤치려고 정혜는 길을 나섰다. 그때 준석이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혜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눈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아마도 정혜는 살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의 상처는 모두 잊고 준석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준석은 정혜의 아픈 상처들을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준석으로 인해 모든 편견을 던져 버린 정혜는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야지 세상이 공평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모든 장면을 방부 처리한다. 인물의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장면 장면마다 영화를 보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끔 살아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정혜>는 상처로 얼룩진 가여운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자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만큼 강한 힘을 가졌는지 오히려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겨주는 것인지 의문을 던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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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거나 미치거나 - 권지예 그림소설
권지예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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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면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그 가운데 미술 서적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보면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흘러가 버리는지. 나의 호흡과 잘 맞는 해설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좋은 책을 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권지예의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독특한 형식으로 그림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작가와 미술 작품들을 '소설'이라는 외피로 포장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새로운 그림소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그렇게 탄생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귀고리 소녀>와 마찬가지로 미술 작품을 통한 무한한 상상력까지는 아니지만,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소설쯤 될 것 같다. 딱딱하게 전 생애를 아우르는 해설서보다 차라리 부드럽게 다가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0편의 그림소설 가운데 내가 주목한 소설은 빈센트 반 고흐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을 그린 세 편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예술가들에게 기울어지는 시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빈센트 반 고흐

'인생의 고통은 살아있는 그 자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생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짐작하게 하는 문구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프랑스 파리 오르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지난 여름 동생은 이 작품을 실제로 보고 와서는 손가락에 묻어날 것만 같은 강렬한 붓터치로 인해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그 별 하나 하나가 마치 실제로 빛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으며, 형언할 수 없이 노란 색감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평생 동생에게 짐이 된 고흐는 그 스스로도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물감을 살 돈이 있어야 하지만, 가난한 화가에게 그림을 사는 이들은 없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대신 동생이 매달 월급의 일정부분을 떼어 형에게 부쳐야 했다.

생전에 그림이 좀 팔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귀를 자르는 지경에까지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불운하게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빛나는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림을 그린 자신은 그토록 괴로운 생을 살다 갔는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는 정 반대로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게 하다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가끔 만날 때마다 그림 속의 목이 긴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했다.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바로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 에뷔테른이었다. 슬프게도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고, 잔은 그 이튿날 투신 자살을 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이 책은 들려주고 있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다는 반증일 테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스물 둘의 잔은 너무 어렸다. 사랑 없는 세상에 살아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 사랑이 떠나버린 마당에 무슨 미련이 있을 텐가. 가여운 것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들의 첫 아이뿐이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초상화를 무려 26편이나 남겼다고 한다. 모딜리아니 역시 아내를 무척 사랑했나보다. 서른 여섯 짧은 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은 미술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 <키스>는 철없던 시절, 서울에 있는 친구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황금빛 유혹'이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충만한 시절, 그 그림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각인되기에 충분한 강렬함 자체였다. 저자는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어 작품 <키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구릿빛 살결의 아주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몸을 숙여 가냘프고 우아한 여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키스를 하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무릎을 꿇은 채 남자에게 모든 걸 맡긴 듯 황홀경에 빠져있다. … 홍조를 띤 그녀의 입술과 뺨 위로 사랑 받는 여자의 부드러운 순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치 양귀비꽃밭 위에 있는 듯하다. 붉은 꽃들과 부드럽게 늘어진 작은 잎사귀의 귀여운 덩굴식물이 그녀로부터 휘늘어져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황홀한 무늬의 금색의상에 싸여있다. - 본문 중에서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혼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들에서 빛이 나는 것일 게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독특한 기법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함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의 그림은 작품을 감상한 이들에게 그림의 잔영이 쉽사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나아가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서도 환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판에 박힌 해설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미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도록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미술 작품과 관련된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이 보다 많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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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리 - 옛 글 속에 떠오르는 옛 사람의 내면 풍경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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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리>를 읽고 있자니 문득 학부 시절 고전문학사를 들었던 기억이 몰려왔다. 학점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끝까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던 과목이기에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졸업이 싫은 이유는 취업 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존경하는 교수의 강의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그러나 사실이었다. 졸업을 한 지 몇 해가 흘렀지만 아직도 마음은 캠퍼스 어느 구석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산수유와 매화가 만발해 있을 그 곳에,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강의를 들으러 가던 이즈음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책 읽는 소리>는 옛 사람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글들을 많이 수록해 놓았다. 이에 정민 교수가 덧붙여 해설을 하는 형식으로 채워져 있는데, 선인들의 아름다운 글을 선별해 묶고 향기로운 문장으로 해설한 저자의 노력이 눈부셨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생각에는 별 차이가 없다. 다만 현대적인 언어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우리가 옛 글 읽는 것을 꺼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인들의 글을 읽고 있으니 우선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거문고 소리와 해금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한 편의 사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사이로 맑고 향기로운 정신이 시나브로 온몸을 휘감아 나가는 듯하다.

고요하고 싶으나 고요할 수 없게 만들고, 휴식하고 싶으나 휴식할 수 없게 만드는 소음 일색의 도시 속에서 '텅 빈 충만'을 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 저자가 인용한 명나라 진계유의  글이 눈에 띤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 명나라 진계유의 <안득장자언> 중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아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청과물 상인의 녹음된 목소리. 쉬지 않고 반복되어 한참이나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화들짝 놀라는 저자의 모습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한가롭게 책 좀 읽을라치면 창문 너머로 멀쩡하던 보도 블럭을 갈아엎고 다시 블록을 정비하는 기계의 굉음 때문에 한동안 괴로웠던 지난 여름이 떠오른다. 

<한가하게 거처하는 즐거움은 다른 것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한다. 집안을 물 뿌리며 비질하고, 아침 해가 비쳐들면 향로를 비로소 피운다. 책상을 정돈하고 책을 펼쳐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옛 사람이 마음을 쏟은 곳을 엿보기라도 하면 이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말로 형용하기는 어렵고 가만히 혼자 알 뿐이다.> - 이만부의 <한가로운 생활의 즐거움>에서

옛 선비의 아침 풍경이 수묵화처럼 그려진다.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에서 참 행복을 찾는 선비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 걸까. 바쁘고 여유없는 생활 속에서 잠시 벗어나 일상을 돌아보고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며 참 행복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과거는 현재와 통하고 미래와 만나게 하며, 역사는 과거를 현재로 이어주는 가교'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옛일을 기억하는 것은 옛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날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옛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도구적 지식이 판을 치는 사회에는 깊이가 없다. 깊이가 만들어내는 그늘도 없다. 우주를 읽고 사물을 관찰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인문적 소양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는 저자의 말을 가슴에 오롯이 새겨본다.


봄 향기 가득한 3월, 선인들의 글귀와 만나는 기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마음이 벅차다. 죽비 소리와도 같은 깨달음을 책의 곳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정민의 <책 읽는 소리>는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휴식하며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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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3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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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가끔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화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지인에게 상담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지인은 별 것도 아닌 것에 오버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조언을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왜이리 매사를 까칠하게 대하는 걸까. 태도를 좀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난 돌은 정을 맞기 쉽다지 않는가. 쉽게 상처받고 쉽게 다치면 결국 나만 손해다.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평화가 어디 있겠는가.

틱낫한의 <화>를 통해 화내는 것도 습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를 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도 같다는데 어찌하면 화를 다스리며 살 수 있을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정도 길이 보일 것 같은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화가 날수록 말을 삼가라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말이나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러면 우리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그 사람은 더욱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쌍방 모두가 갈수록 더 마음이 아파질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애정과 도움이다. 어느 쪽도 앙갚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 본문 중에서

화가 날수록 말을 아끼라고? 화가 나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게 된다. 화를 참지 못하면 결국은 자신과 상대에게 생채기를 낼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남을 응징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응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 또 다른 전쟁을 부르는 것처럼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화가 날수록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화를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바로 '보행 명상'이다. 즉 숨을 들이쉴 때는 "인"이라고 말하고, 내쉴 때는 "아웃"이라고 말하며 걸으면서 명상하라는 것이다. 발이 땅에 닿는 그 순간을 자각하고, 또 호흡을 자각하면서 걷는 보행 명상이 습관이 되게 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했다.

화를 내뱉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가장 깊은 위안을 얻기 위한 최선을 길임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늘 자각하면서 살 때 누구나가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이다. 그 통찰이 나와 타인들 사이에 평화와 조화를 되찾아준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본문 중에서

'연민은 이해심이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저자는 '의식적으로 호흡'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과 타인의 고통의 실체가 보일 것'이라고, 그러면 이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마음의 문을 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입장에서도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것, 그러면 어느 정도 상대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이해는 곧 연민으로 바뀌어 나타난다고. 이렇게 모든 것은 마음이 다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화를 내는 것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전에 마음 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평소에 감정을 쌓아두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그때 처리하여 감정의 찌꺼기가 마음에 쌓이지 않도록 말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저마다 철학이 담겨 있었다. 대화하기가 어려우면 편지를 쓰는 방법을, 화가 났을 때 도리어 상대에게 선물을 하면 놀랍게도 화가 풀린다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을 준다.

몇 해 전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이 책을 만났지만 그때는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는데, 만약 그때 읽었더라면 좀더 일찍 화를 다스릴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 행복은 그다지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틱낫한의 <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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