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거나 미치거나 - 권지예 그림소설
권지예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도서관에 가면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그 가운데 미술 서적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보면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흘러가 버리는지. 나의 호흡과 잘 맞는 해설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좋은 책을 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권지예의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독특한 형식으로 그림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작가와 미술 작품들을 '소설'이라는 외피로 포장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새로운 그림소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그렇게 탄생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귀고리 소녀>와 마찬가지로 미술 작품을 통한 무한한 상상력까지는 아니지만,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소설쯤 될 것 같다. 딱딱하게 전 생애를 아우르는 해설서보다 차라리 부드럽게 다가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0편의 그림소설 가운데 내가 주목한 소설은 빈센트 반 고흐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을 그린 세 편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예술가들에게 기울어지는 시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빈센트 반 고흐

'인생의 고통은 살아있는 그 자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생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짐작하게 하는 문구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프랑스 파리 오르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지난 여름 동생은 이 작품을 실제로 보고 와서는 손가락에 묻어날 것만 같은 강렬한 붓터치로 인해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그 별 하나 하나가 마치 실제로 빛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으며, 형언할 수 없이 노란 색감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평생 동생에게 짐이 된 고흐는 그 스스로도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물감을 살 돈이 있어야 하지만, 가난한 화가에게 그림을 사는 이들은 없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대신 동생이 매달 월급의 일정부분을 떼어 형에게 부쳐야 했다.

생전에 그림이 좀 팔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귀를 자르는 지경에까지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불운하게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빛나는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림을 그린 자신은 그토록 괴로운 생을 살다 갔는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는 정 반대로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게 하다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가끔 만날 때마다 그림 속의 목이 긴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했다.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바로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 에뷔테른이었다. 슬프게도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고, 잔은 그 이튿날 투신 자살을 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이 책은 들려주고 있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다는 반증일 테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스물 둘의 잔은 너무 어렸다. 사랑 없는 세상에 살아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 사랑이 떠나버린 마당에 무슨 미련이 있을 텐가. 가여운 것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들의 첫 아이뿐이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초상화를 무려 26편이나 남겼다고 한다. 모딜리아니 역시 아내를 무척 사랑했나보다. 서른 여섯 짧은 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은 미술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 <키스>는 철없던 시절, 서울에 있는 친구를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황금빛 유혹'이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충만한 시절, 그 그림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각인되기에 충분한 강렬함 자체였다. 저자는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어 작품 <키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구릿빛 살결의 아주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몸을 숙여 가냘프고 우아한 여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키스를 하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무릎을 꿇은 채 남자에게 모든 걸 맡긴 듯 황홀경에 빠져있다. … 홍조를 띤 그녀의 입술과 뺨 위로 사랑 받는 여자의 부드러운 순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치 양귀비꽃밭 위에 있는 듯하다. 붉은 꽃들과 부드럽게 늘어진 작은 잎사귀의 귀여운 덩굴식물이 그녀로부터 휘늘어져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황홀한 무늬의 금색의상에 싸여있다. - 본문 중에서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혼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들에서 빛이 나는 것일 게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독특한 기법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함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의 그림은 작품을 감상한 이들에게 그림의 잔영이 쉽사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 나아가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서도 환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판에 박힌 해설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미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도록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미술 작품과 관련된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이 보다 많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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