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딸들은 어떻게 여자다운 여자로 만들어지는가
나임윤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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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관습화 된 일상 속에서 비판 의식 없이 살아가기 쉽다. 어떤 한 성이 우위에 있을 수 없음에도 성차별적인 말과 행동이 아직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는 것은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훈육돼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앞으로 아이를 갖고 교육을 담당할 부모, 그리고 지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나임윤경의 <여자의 탄생>(웅진 지식하우스)은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될 것 같다.

기저귀를 갈 때 남자아이는 '고추'를 드러내놓고 자랑스레 갈아준다. 그런데 왜 여자아이는 행여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이름도 없는 그 부분을 가려주는 걸까?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동등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진관에서는 남자아이가 벌거벗은 채 자랑스레 앉아 있는 첫 돌 기념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왜 여자아이에게는 인형만 선물하는 것일까

옷이나 장난감을 선물할 때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꼭 확인해서 선물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여자아이에게는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을, 남자아이에게는 자동차나 변신 로봇 같은 장난감을 선물한다. 그러나 저자 나임윤경은 이런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자아이들이 주로 가지고 노는 자동차·비행기·로봇·집짓기 블록 등은 공간지각 능력·추리력·상상력·창의력을 키워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남자에게만 필요한 능력이 아닌 이상 여자아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장난감을 사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하는 훈련이 남자아이에게도 필요한 이상 인형을 남자아이한테서 멀리 둘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부엌이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인 만큼 부엌과 관계된 장난감 역시 남자아이에게 선물로 주어져야 합니다." - 본문 중에서


남자아이는 파란색 계통의 옷을, 여아에게는 분홍색 계통의 옷을 입혀 굳이 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것은 아이에게 무의식중에 여자다운 색, 혹은 남자다운 색을 강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인식 속에 '남자의 색', '여자의 색'이 굳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모양이 다르듯 좋아하는 색도 다 다르기 마련인데, 그 많지도 않은 색을 남성성과 여성성의 색으로 이분할 필요가 있을까. 어린아이에게는 다양한 색의 옷을 입힐 필요가 있고 아이가 자라면 자연스레 자신들이 좋아하는 옷을 입혀주면 될 것이다.

여자아이의 경우 어릴 때부터 부모가 너무 외모에 신경을 쓰면 이것이 자연스레 아이에게도 이입돼 외모에 상당한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한다. 아이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바로 부모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가벼운 행동 하나라도 거듭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누구를 위한 '긴 생머리'인가

저자는 대부분의 여성이 어깨를 덮을 정도로 머리를 기르는 경향이 있는데 노동에 적합한 머리 모양으로 바꿀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긴 머리는 묶은 머리나 짧은 머리보다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손이 머리에 가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수업 시간 중에는 물론이고 회의 시간에도 긴 생머리의 여성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행위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하고 있다. 그것은 강의나 회의에 그만큼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식사할 때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 여성이 있을까.

저자는 언제 어디에서든 활동하기 좋은 머리모양이나 의복이 좋다고 강조한다. 당사자가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 "자신이 사장의 입장이라면 어떤 여성을 고용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올 것이다.

또한 저자는 결혼식장에서 흔히 "안경 낀 신랑은 볼 수 있는데 왜 안경 낀 신부는 없는가"라고 묻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여성 앵커 중에도 안경 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시력이 월등히 좋아서 그런 건 결코 아닐 것이다. 남자는 이지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지만 여성은 이지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고 다만 아름답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일까?

저자는 여학생들에게 그들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아줌마 정서를 내면화하라고 가르친다. 즉,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여성들의 앞마당쯤으로 생각하고, 남자들의 통제를 가볍게 무시하며 살도 찌고, 맨얼굴로 돌아다니자"고 제안한다. 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미의 기준에 부합하려 애쓰지 말 것이며, 남자들이 원하는 방식의 수동성을 몸에 간직하려고 기를 쓰고 미시족이 되지 말자"고 말한다.

여성 스스로 깨우쳐야 할 부분과, 남성들이 전근대적인 가치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남자와 여자의 불협화음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가벼운 일상을 의미 있게 풀어낸 <여자의 탄생>은 참으로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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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가 사랑한 밀레 - 반 고흐 삶과 예술의 위대한 스승
박홍규 지음 / 아트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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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기독교 신자가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듯 좋은 책과 만나면 누군가에게 권해 주어야 하는 것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더군다나 의도하지 않은 책과의 만남은 반가움의 진동을 더욱 증폭시킬 수밖에 없을 텐데, 이 책도 그랬다.

여느 때처럼 대출할 책의 목록을 작성해 눈부신 봄 햇살을 등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목록에는 없지만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을 때, 제한된 대출 권수로 인해 나머지 한 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면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대출할 책들 못지 않게 읽고 싶은 새 책의 등장은 아쉬움의 크기만큼 반가웠다.

어떤 책을 읽을 생각만으로도 하루가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퇴근 후나 되어야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동반한다. 읽고 싶은 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어디에 비할 바 없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책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스승이자 친절한 조언자니까.

ⓒ 아트북스
박홍규의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는 새로운 시각에서 빈센트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 <내 친구 빈센트>를 읽었을 때도 빈센트가 밀레의 영향을 받은 화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표지만으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대부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지하듯 밀레는 최초의 농민화가다. 밀레는 저자의 말처럼 "꾸밈없는 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노동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존엄성을 찬양하여 인간적이고 대중적인 주제로 승화" 시켰다. 밀레는 빈센트를 제자로 인정한 적이 없지만, 빈센트는 밀레를 평생 동안 존경했다. 그의 예술뿐만 아니라 그의 삶까지 진정한 스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빈센트가 그림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스승' 밀레는 세상을 떠났다. 밀레도 빈센트가 자신을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의 입장에서도 빈센트 같은 제자를 두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더구나 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저자의 경우 스승에 대한 생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사제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제자가 자기 스스로 스승을 찾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신뢰로 모방하면서 배우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창조하는 경우. 또 실제로 만나지도 않고, 또는 만나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스승을 모시는 경우 더 진정한 사제관계가 이루어지리라."

제자가 스승의 학문만을 존경할 수도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제자들의 생각은 스승이 추구하는 어떤 삶의 모습까지 본받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런 스승을 두었다면 이미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언제까지나 그 스승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스승이 펴낸 책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 쓴 글을 통해 제자는 언제나 스승의 생각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빈센트처럼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익히는 독학이다. 스승이 있다고 해도 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스승에 중독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중독을 제대로 된 공부라고 보는 봉건적인 모방법만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참된 예술의 창조란 있을 수 없다.

밀레와 빈센트는 참된 예술창조를 위한 이상적인 사제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스승은 마음속에 두고 사랑하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스승의 본질을 끝없이 묻는 것이되, 절대로 스승의 모방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사랑만큼이나 스승을 뛰어넘어 자신의 예술과 삶을 재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빈센트는 밀레의 그림을 참으로 많이 따라 그렸다. 그림을 배우던 초창기뿐 아니라 배울 단계는 이미 지난 완숙기에도 여전히 밀레의 그림을 즐겨 모사했다. 빈센트는 그 작업을 일종의 '번역'이라 표현했는데, 저자는 이에 덧붙여 '색채 번역'이나 '형태 번역'이라는 말로 '모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림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림을 그릴 생각도 없었던 빈센트가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다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나비처럼 온몸을 불살라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색상을 뽐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깊이를 숨기지 못한다.

빈센트는 부유한 귀족들의 행복한 모습이 아니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것은 <감자를 먹는 사람들>로 대표될 수 있다. 그런 그림들이 당시 부르주아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오늘의 부르주아는 빈센트의 그림을 사랑하여 비싼 값에 그림을 사들인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빈센트 반 고흐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밀레의 그림을 오늘날 우리가 왜 주목해야 하는지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또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의 깊은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는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빈센트의 생가를 비롯해 빈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밤의 카페테라스, 오베르의 교회나 보리밭의 실제 모습을 직접 담은 사진도 빈센트를 아끼는 독자에게는 소중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예술가들이 빈센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삶과 예술에 대한 치열한 자세일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 분야에 깊어지면 다른 분야에도 깊어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저자는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다방면에 정통한 학자다. 저자의 방대한 저작활동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실패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노라고 읊조리는 저자의 바람처럼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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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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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광활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양떼들의 움직임과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는데 소설을 읽으니 눈에 담았던 영상들이 자연스레 하나씩 차례로 떠올랐다.


이안 감독은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알았다. 이 이야기를 놓쳐버린다면 남은 생애 내내 후회하게 될 거라는 것을…’ 기실 그는 그의 생애에 길이 빛날 작품을 빚어냈다. 소설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종합예술로 완성한 감독의 작업은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났다. 주위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영화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힐난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다. 원작 소설도 마찬가지.


원작 소설은 영화와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저자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독자들에게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만큼 탁월했다. 영화와 소설 모두 완벽한 하나의 그림이었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은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신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표현하기 힘든 그 여운은 노력하지 않아도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창고에 남게 될 것 같다.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는 어려운 형편으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스무 살도 안 된 청년 시기에 일자리를 찾다가 만나게 된다. 말을 좋아하는 에니스는 목장이 문을 닫게 되자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했고 로데오에 미쳐있던 잭과 방목을 위해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세상과 격리된 산, 아무도 없는 산에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두 사람이 잘 알았다. 운명의 신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표현은 너무 애매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감정이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서로를 배려하고 그러는 동안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차츰 싹트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두터워서 그들은 드러내 놓고 사랑할 수 없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산에서 내려오게 되자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에니스에게는 약혼한 여자가 있어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고 잭은 다시 로데오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후 4년, 잭에게서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에니스의 눈은 희망과 기쁨의 충만으로 빛이 났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고 마침내 둘은 4년만의 해후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원했는지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현실적으로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속수무책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에니스는 그런 만남이 아쉽기는 하였어도 가정을 버릴 수는 없었고, 잭은 모든 걸 포기하고라도 에니스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아주 가끔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잭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저자 의 말처럼 ‘북쪽 평원 같은 거대한 슬픔’이 에니스를 짓눌렀다.


에니스는 브로크백 마운틴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잭의 유언을 위해 잭의 부모님댁을 찾아갔다. 어린 시절 잭이 쓰던 방을 구경하던 중 에니스는 낯익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옷장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잭이 입던 낡은 셔츠가 걸려있었고 그 안에는 자신의 체크무늬 셔츠가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에니스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두 셔츠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입었던 셔츠였다. 두 셔츠에는 그들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레 에니스는 그것을 꺼내어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에니스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그려진 엽서를 벽에 붙이고 그 밑에다 이 셔츠들을 걸어두며 읊조렸다. “잭, 맹세컨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근원 깊은 슬픔은 언제나 에니스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물로 때때로 베개가 젖고, 시트가 젖었다. 사랑은 가고 그리움만 남았다. 사랑을 잃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저자의 말처럼 ‘고칠 수 없다면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잭은 에니스보다 자아가 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면 에니스보다 잭의 사랑이 더 큰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은 행간을 타고 독자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 것이다.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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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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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번역은 장영희 교수가 맡았다. 원제는 'The Ballad Of The Sad Cafe'로 제목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 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 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 를 읽고서 기형도의 <빈집>이 떠올랐다. 화자처럼 아밀리아는 외롭게 빈집에 갇혀 버렸다.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 본문 중에서


저자는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고 말한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고.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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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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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이야기는 곧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이나 그림을 통해 소통하고 싶은 무언가를 남긴다. 눈부신 햇살과 신록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안락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는 이의 얼굴 표정은 마냥 평화롭다. 이처럼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겉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우리는 책을 읽는 정지된 순간을 아름다운 그림의 형태로 만끽하며 덤으로 13세기부터 21세기까지 독서의 역사까지 알게 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렘브란트, 베르메르, 마티스, 고흐, 호퍼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혹시킨 책 읽는 여자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떤 상념에 잠겨 있는 걸까.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과는 달리 놀랍게도 그 옛날에는 책읽기가 권장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실용성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실한 시민 계층인 가장은 아이들에게 독서를 권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서는 '시간 낭비이고 게으름뱅이나 하는 나쁜 습관'이며 '다독은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했고 아이들이 그 병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고 하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수긍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밖에. 책읽기의 좋은 점은 어디에 꼭꼭 숨어버리고 나쁜 점만이 부각되어 나타난 걸까.

여자에게 무제한적으로 허용된 독서는 고작 성서와 종교서적뿐이었다는데 아버지가 무섭긴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있는 책 읽기를 거둘 수는 없는 법. 여자들은 가장의 눈길을 피해 침실로 숨어들어 독서를 하기에 이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책을 읽을 때의 긴장감, 아마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되었을 것 같다.

지나친 독서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이든 엘리트적 남자의 지적 우월감이 깔려 있었다. 즉 독서란 지적 능력을 지닌 특정한 남자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여자와 교양이 없는 대중은 계몽의 주체가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의 모든 지식인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자에게 책은 잠재된 위험이며,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가장의 임무를 지닌 남자는 그런 위험을 감지하고 예방해야만 했다. 이제 가정에서 독서는 가장의 도덕적이고 엄격한 시선에 노출되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여자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지식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자여야 한다는 남성 우월주의적 시각이 아니라면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말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여성들은 비로소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 여자들은 숨어서 책을 읽다가 양지로 나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단지 책을 읽기만 하는 독자에서 급기야는 책을 집필하기에 이르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때문에 더 이상 독서 장소는 침실로 제한되지 않았고 거실이나 부엌 정원 등에서도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역사는 진보하기 마련이고 아무도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오히려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책 읽기의 기능 중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책에 몰입함으로써 우리는 잠시 버거운 현실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현실 세계와 책의 세계를 혼동하지 않는 한 지속적인 몰입은 불가능하므로 아주 잠깐 동안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유희에 불과하지 않을까.

책을 통해 더 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우리의 몸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 머물러 있지만, 책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와 만날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에나 다다를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 속 세상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화폭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과 무언가에 홀린 듯,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 여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대와 역사를 읽고, 독서가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그런 점에서 이채로운 책이었고 수록된 그림과 함께 독자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각인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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