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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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 벡의 시선을 통과한 부랑자, 윤락 여성, 이민자들을 본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를 들어 본다. 그들 안에 있는 합리와 불합리의 기준, 타협과 균형의 묘를 보며 닥과 같은 시야를 갖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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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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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뷰를 올리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에 감상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다. 글을 많이 고쳤다.


책읽기를 너무나 좋아하고 작가들을 숭배하는 소냐(소네치카)는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로베르트와 결혼한다. 사서로 일하던 소냐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로베르트와 만나게 되고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반하여 순식간에 결혼을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소설이 생각났다. 특정한 책도 아니고 단지 책이라는 이유로 혹하는 장면이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이 작품에서 시골 카페에서 일하던 테레자가 여러 손님 중에 토마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그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책'이란 초면의 두 사람을 영원의 끈으로 묶어버리기도 하니 과연 별별 기능을 다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냐는 결혼한 다음 책과 멀어진다. 아이를 키우고 넓은 집을 얻기 위해 가사 일과 더불어 부업에까지 전념하면서 바쁜 일상의 행복에 잠긴다. 남편의 재능과 일이 소냐의 행복이 되고 결혼 생활 자체가 언제나 자신에게 과분한 행복임을 감사해 한다. 소냐는 왜 언제나 과분한 감사를 느낄까. 남편은 자신보다 나이가 아주 많고 유배 생활을 한 예술가라 경제적 형편도 어려운데 말이다. 소냐는 학교 다닐 때 모욕당한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자신을 여성으로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정의하였고 그래서 결혼을 선물로 여기고 남편을 '추앙'하게 된 것일까. 그것만일 리가. 여기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소냐는 딸 친구 야샤와 관계한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후에 이것은 벌써 오래 전에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며, 그와 자신의 결혼 생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사실 알고 있었다고 내면의 독백을 한다. 더 나아가 야샤가 남편의 어린 애인인 동시에 모델이 되어 시리즈 작품의 창작을 가능하게 한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 옆에 그렇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겼다는 건 정말 공평한 일이야.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걸맞게 말이야.' 


왜 이럴까. 고도의 야유가 물론 아니다. 나는 소냐('소네치카'란 소설)를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보았다. 소냐는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했던 자세로 예술가 남편을 대하는 것 같다고. 이것은 소냐가 책벌레였던 성장기에 책에 빠져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던 정신 상태였음을 서술하는 부분을 근거로 한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문단을 옮겨 본다.

  '인쇄된 글자에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상상 속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의 친구들 사이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죽어가는 안드레이 공작 침대맡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타샤 로스토바의 해맑은 고통이 어리석은 부주의로 네 살짜리 딸을 잃은 언니의 격렬한 슬픔과 동등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옆집 여자와 수다를 떨던 언니는 뚱뚱하고 굼뜬 자기 딸이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예술에 전제되는 유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미숙한 어린아이의 덜 깨인 순진한 믿음인가, 상상력의 부재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환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경계 바깥의 모든 것들이 의미와 내용을 상실하는 것일까?'

결혼생활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닫는 부분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귓전에 울리는 투명한 종소리와 함께 그녀는 완전히 텅 비어 몸이 붕 뜬 듯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와 선반에서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골라 중간쯤을 펼치고 누웠다.(중략) 그러자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소냐는 결혼생활이라는 무대가 막을 내리자 다시 책읽기에 빠져든다.


소냐에게 로베르트와의 결혼생활은 일종의 책 속 세상처럼 인식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예술가 남편과의 결혼생활 17년은 책을 통해 알던 세계(예술)의 실사화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소냐는 자아를 잊고 소설에서 배운 가치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소냐에게는 이해 못할 일도 수용 못할 것도 없는가 보았다. 어떤 행사에 소냐, 야샤, 로베르트 세 사람이 함께 동행하여 가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어찌 받아들이는가 같은 것은 신경쓰지도 않는단 말이지. 세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것이 앞서 표현되었던 소냐 자신에 대한 오랜 세월 계속된 자존감 부족의 결과는 혹시 아닌지. 


소냐는 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그렇게 없는지? 독자(소냐)는 창작자(로베르트) 앞에서 그렇게 겸양해야 하는지? 예술이 인간에 대한 존중에 우선하는 다른 차원의 것인지? 생각하다 보니 마치 예술에 가스라이팅 당한 억압된 여성의 일생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남편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다. 로베르트는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그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 행동에 책임은 져야한다. 아마도 딸친구와의 외도 문제에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훨씬 뛰어난 그림이 나올 수도 있고. 그냥 셋이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행위는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이 저 남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며 예술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읽히지 않고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면, 세 사람이 어울린다해도 그러고 싶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이해를 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소냐에게는 책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 표현된 책에서 얻는 행복이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로베르트와 계속 별문제 없이 살았다면 소냐는 책읽기를 했을까 안 했을까. 이 작품은 제 이해가 부족한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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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았다.

영화는 이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략 인물들은 예전(80년대?) 스타일인 가운데 언제인지 시간을 특정하기 어렵다. 전체적인 느낌을 먼저 쓰자면 현실의 구차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함이나 단정함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힘이 느껴졌다.

핀란드, 하면 생각나는 것 중에 노키아도 있는데 영화는 스마트 폰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 영화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을 당한 뉴스가 구식 라디오에서 여러 차례 나와 지금 현재 시간대인 척하지만 이 세계는 감독이 임의로 설정한 시간으로 봐야하겠다. 주인공 두 사람은 나중에 보니 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서 주고받는다.(영화 후반에 주소도 종이로 전달) 종이는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날아가고 연락을 못하게 되네. 만난지 얼마 안 되었으나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의 마음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숙성하게 되는데는 이런 종류의 장치가 필요하겠지. 연락 단절이라는 사건. 그 사이 '시간' 말이다. 


이 글 제목이 왜 저러냐면 요즘 읽고 있는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와 영화가 묘하게 연결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으나 영화를 본 후 어째서 연관짓게 되었는지 책의 내용을 조금만 소개하면 

과거에는 완결된 '그림'이나 진보를 향한 '선'의 형태였던 시간이 지금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로 흩어져 있는 형태가 되었다, 연결은 끊어져 있고 점들 사이엔 권태를 불러오는 공허만이 존재한다, 지금의 시간에는 적절한 때라든가 완결이라든가의 성격은 없고 사람들은 이 사건 저 사건, 이 정보 저 정보, 이 이미지 저 이미지 사이를 황급히 이동하며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시간은 불시에 나타났다 불시에 사라지므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도 없고 다만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업데이트만이 거듭되고 이전의 것은 덮어쓰기가 되며 잊혀진다.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닌데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한병철의 글에 수긍하게 되는 것이 인터넷 뉴스를 보다보면 그런 증상이 참으로 진하게 느껴진다. 엄청 중요한 사건 같은데 하루이틀이 지나면 또 다른 센세이셔널한 사건이나 발표 같은 것이 등장해서 며칠 안에 이전 것은 잊혀지고, 그것을 권력자들이 이용하기도 하고...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거 어떻게 되었지, 궁금하면 애써 검색해야만 하고 그나마 끈기 있게 다루는 후속 기사도 드물다.


이 영화에서 시간 특정이 어렵다고 했는데 뉴스에 현재 사건이 나오지만 두 사람의 관계 형성은 매우 아날로그적인, 디지털 이전의 구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감독은 아마도 인간의 관계에서만은, 서로를 향하는 마음에 필요한 시간의 문턱을 지나야 함을 말하고 있는 거 같다.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잃어버렸으니 구두가 닳도록 찾아다녀야 하겠고, 술에 맺힌 게 많은 여자와 술꾼인 남자가 만나려면 각자 견디는 시간이자 공감을 형성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늘상 폰을 들여다 보며, 사방에 흩어져 순간으로 존재하는 문자, 인스타, 트윗과 숏폼 등의 대체 가능한 시간에 휩쓸려 있다면 이 관계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다른 사람의 옷을 이어받아 입는 장면도 시간은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리게 했고, 또한 마지막 장면은 영화 '모던 타임즈'의 시간을 이어받는 것 같은 결말을 보여 준다. 하지만 '모던 타임즈'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 이 영화의 결말엔 인간이(에게) 곁을 내 주는 동물 친구까지 끼워넣어 놨다는 점이다. 


안사의 친구가 안사에게 오늘따라 왜 말이 없냐?라고 하는 순간 웃음이 났다. 아마 의도적으로 넣은 대사가 아닐까 짐작하는데, 이 감독님 영화의 인물들은 여전히 정말 말수가 적고, 전철로 출퇴근 중에도 폰은 어디 있는지 그냥 생각에 잠겨 앉아 있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무슨 새로운 시도를 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도 소박한데 이 영화를 다들 좋아하는 것을 보면 이런 영화, 이런 이야기를 그리워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병철 저자의 지금 읽는 책은 앞 부분에 조금 헤맸지만 점점 빠져드는 중. 이번 책까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아마 또 만날 거 같다. 책이 얇은데도 금방 읽게 되진 않고 좀 감탄하고 있다. 어찌 이런 생각들을 빼곡하게 한단 말이지? 생각 전문가들인 철학자들은 새삼 대단하다 싶다. 철학 관련 책을 한병철 저서로 정말 오랜만에 읽게 되어서인지 어디선가 이런 생각의 집들을 짓고 있는 이들이 지금도, 여전히 있다는 것을 헤아리자 숙연함마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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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7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는데, 한병철 저자의 책과 연결하신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향기>는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종이 2024-03-27 15:15   좋아요 1 | URL
우연히 한병철의 책을 읽는 중에 영화를 보게 되어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시간‘ 개념과 관련한 다른 철학자 인용이 어려운 대목도 있었으나 다 읽고 나니 저자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느 정도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적적한 제 서재에 오셔서 이래저래 흔적을 남겨 주셨네요.ㅎ 제가 감사합니다.
 
젤트빌라 사람들 창비세계문학 29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권선형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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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스위스를 배경으로 한 노벨레-중편소설 4편. 10편으로 된 원작이 다 번역되었다면 진면목이 드러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렸는데 우스꽝스러운 한편 당시의 관심과 풍속을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는 재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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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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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면 그때그때 사서 읽으면서 전작을 모은 시리즈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처음이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도 나올 때마다 읽고 모았으나 전작이 번역된 것은 아니고 일부만 번역된 것으로 안다.

마이 셰발, 페르 발뢰 두 작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김명남 역자의 번역으로 2017년에 시작되어 며칠 전 열 번째인 [테러리스트]가 나오면서 7년만에 완간이 되었다.

우선은 번역자에게 감사하고 싶다. 오랜 시간 걸쳐 한 시리즈를 완간 해 준 것 자체가 감사하다. 호칭과 경어 등에서 차별적이지 않은 세심한 단어의 선택이나 인물들의 특성을 살리는 말투와 전체적인 소설의 차분한 분위기 등은 번역자의 이바지가 컸다고 생각한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인물들의 개성이었다. 

주인공 베크는 말수가 적고 유머감각도 부족한 지루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성격적 결함으로 또는 승진에 있어 약점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베크는 여가에 활발한 사교활동 대신 모형 배를 조립하거나 항구를 산책한다. 그러는 간간이 풀리지 않는 사건의 실마리를 곰곰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베크는 자신을 싫어하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이를 포함하여 주변의 누구에게도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공격성이 안 느껴지는 사람, 믿음이 가는 사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경찰임에도 말이다. 사건을 맡으면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되새김질하며 부산함 없이 분투하여 일을 완결시킨다.

   

우리는 마르틴 베크처럼 본인은 우울하고 타인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성격이 현대 사회에서 결점으로 취급된다는 것과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인물의 면면이 험담거리로 취급되는 것을 보아왔다. 긍정적 마인드와 활력을 지닌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작든 크든 압박이 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 소설의 중심 인물들이 갖는 인격의 울퉁불퉁함과 우울에서부터 다혈질에 이르기까지 성격의 다채로움은 문학작품이 주는 위안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특히 작품의 내용이 그것을 예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지점은 인상적으로 사랑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 문장에서 중심 인물'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시리즈의 마지막 소설인 이번 작품 [테러리스트]에서 맹활약을 보인 군발드 라르손만 조금 더 소개하자면, 거구에 걸맞는 완력의 소유자이며 분량이 늘어나면서 들여다볼수록 두뇌 회전도 빠른 경찰이다. 듣기 좋은 소리로 걸러서 표현하는 일이 없고 호오가 분명하고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라 적도 많다. 맞춤 양복과 수제 구두, 실크 잠옷을 좋아하며, 퇴근하면 자신이 경찰임을 잊어버리며, 파시스트를 싫어하는 경찰이다. 경찰 조직내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개인적 관심을 나누는 이가 없다. 경찰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경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점잖은 마르틴 베크조차도 군발드 라르손을 마음 속으로 좋게 평가하게 되고 의논 상대로 여기기까지엔 시리즈의 여러 권이 지나야 했다. 앞 권 [경찰살해자]에서 퇴직해버린 베크의 측근 동료이자 친구인 콜베리의 자리를 군발드 라르손이 대신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시리즈는 영영 막을 내렸다.


이야기의 규모와 내용이 알찼다는 점도 좋았다. 너무 큰 이야기나 너무 강한 능력의 소유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60,70년대의 스웨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작가들이 느낀 그 시대의 문제들. 자본이 잠식하여 발생하는 사회문제, 관료체제의 문제들을 위에 소개한 나름의 결점들과 작은 능력을 지닌 경찰들이 해결할 만한 규모의 크기로 짜서 전개시켰다는 점이다. 사건 외형이 비대하다거나 장식적으로 무게를 잡는 느낌이 없다. 발생한 사건과 해결의 과정은 폼잡는 설정 없이 다만 끈기와 발품의 성실성으로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전개의 과정에 촘촘하게 사회 비판의 시선을 심어놓았다. 

덧붙이자면 마지막 소설인 [테러리스트]는 예외적으로 규모가 큰 이야기였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는 면도 있었지만(대표적으로 50줄 경찰간부 세 명이 테러리스트 은신처를 습격한다는 것) 애초 계획했던 시리즈 마지막 소설이기도 했고 작가 발뢰의 심각한 병세가 작가들로 하여금 시도하고 싶었던 일과 발언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담아보고자 했음을 이해하고 싶다.


작가들이 소설을 쓸 당시엔 지금보다 세계가 다이나믹했고 일말의 전망도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실제로 굴러가는 현실은 비관적이었으므로 이런 작품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리즈를 돌아보니 작가들의 진보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고전 영화에서 받는 느낌과 비슷한 감상이 든다. 시리즈 마지막 소설 이후 5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으므로 그간 있었던 역사적 변화로 인해 생긴 60,70년대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이런 감상을 가져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소설 자체의 분위기가 그렇다. 아마도 춥고 진눈깨비 날리는 나라의 우울하고 성실한 주인공이 비염으로 재채기를 하면서 캐비넷에 팔을 올리고 기대서서 동료들의 대화를 귀기울여 듣는 장면이 뇌리에 박혔나 보다.


믿을 수 있는 노선의 주제. 호감가는 중심 인물들. 억지스러운 심각함과 거창함이 없으면서 촘촘하게 들어가 있는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 게다가 무뚝뚝한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은근 유머러스하기까지.

읽는 동안의 행복감을 담보해 준 고맙고 보기드문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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