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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아흔이라는 나이. 상상할 수 있는가. 수시로 '확, 그만 살아버릴까' , '몇 년 정도만 더 살아주자.' 이러면서 오욕의 시간을 삼키곤 하는 당신에게 육십도 칠십도 팔십도 아닌 구십이라니. 왜? 마르께스는 구십 노인이 필요했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한다는 것은 오래 통용되어온 거짓말이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알고도 속아주는, 속기로 하는 사람도 있다. 섹스는 위안일지언정 사랑의 본질과 부합하는 행위는 아니다. 최소한, 사랑을 인간이 지닌 최고의 이타적인 존재의 모험이라는데 동의하면서 섹스의 본질을 대입시켜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위안이 사랑보다 못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흔은커녕 그 나이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당신에게 삶은 고단하고 불안하고 불쾌함 투성이인데? 그리고 전존재를 걸어야 하는 사랑은 차마 제발로 걸어가 마주볼 용기가 나지는 않는 낳자마자 유기한 자식과도 같은 것인데? 평범하고 조금밖에 못 산 우리에게 위안은 너무 소중하겠지.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난 무용지물이오.' 그러자 해방감에 가득 찼다고 한다. 아흔...그것은 섹스할 수 없는 나이라고 추정해 본다. 그래서 비로소 오해없이 사랑을 대면할 수 있는 나이라고.
'백년동안의 고독' 의 기묘하고 막막하고 울림이 있던 읽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르께스 자신의 노년에 대한 예찬으로 읽히기도 하였고 흔해빠진만큼 진지하게 말하기가 나날이 어려워지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대작가의 가공할 시간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옮겨본다.
' 아흔 번째 생일에 델가디나의 행복한 침대 속에서 살아 있는 몸으로 눈을 뜨자,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