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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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뷰를 올리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에 감상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다. 글을 많이 고쳤다.


책읽기를 너무나 좋아하고 작가들을 숭배하는 소냐(소네치카)는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로베르트와 결혼한다. 사서로 일하던 소냐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온 로베르트와 만나게 되고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반하여 순식간에 결혼을 결정한다. 이 부분에서 다른 소설이 생각났다. 특정한 책도 아니고 단지 책이라는 이유로 혹하는 장면이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이 작품에서 시골 카페에서 일하던 테레자가 여러 손님 중에 토마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그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책'이란 초면의 두 사람을 영원의 끈으로 묶어버리기도 하니 과연 별별 기능을 다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냐는 결혼한 다음 책과 멀어진다. 아이를 키우고 넓은 집을 얻기 위해 가사 일과 더불어 부업에까지 전념하면서 바쁜 일상의 행복에 잠긴다. 남편의 재능과 일이 소냐의 행복이 되고 결혼 생활 자체가 언제나 자신에게 과분한 행복임을 감사해 한다. 소냐는 왜 언제나 과분한 감사를 느낄까. 남편은 자신보다 나이가 아주 많고 유배 생활을 한 예술가라 경제적 형편도 어려운데 말이다. 소냐는 학교 다닐 때 모욕당한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자신을 여성으로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정의하였고 그래서 결혼을 선물로 여기고 남편을 '추앙'하게 된 것일까. 그것만일 리가. 여기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소냐는 딸 친구 야샤와 관계한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후에 이것은 벌써 오래 전에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며, 그와 자신의 결혼 생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사실 알고 있었다고 내면의 독백을 한다. 더 나아가 야샤가 남편의 어린 애인인 동시에 모델이 되어 시리즈 작품의 창작을 가능하게 한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 옆에 그렇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겼다는 건 정말 공평한 일이야.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걸맞게 말이야.' 


왜 이럴까. 고도의 야유가 물론 아니다. 나는 소냐('소네치카'란 소설)를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보았다. 소냐는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했던 자세로 예술가 남편을 대하는 것 같다고. 이것은 소냐가 책벌레였던 성장기에 책에 빠져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던 정신 상태였음을 서술하는 부분을 근거로 한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문단을 옮겨 본다.

  '인쇄된 글자에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상상 속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의 친구들 사이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죽어가는 안드레이 공작 침대맡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나타샤 로스토바의 해맑은 고통이 어리석은 부주의로 네 살짜리 딸을 잃은 언니의 격렬한 슬픔과 동등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옆집 여자와 수다를 떨던 언니는 뚱뚱하고 굼뜬 자기 딸이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예술에 전제되는 유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미숙한 어린아이의 덜 깨인 순진한 믿음인가, 상상력의 부재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환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경계 바깥의 모든 것들이 의미와 내용을 상실하는 것일까?'

결혼생활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닫는 부분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귓전에 울리는 투명한 종소리와 함께 그녀는 완전히 텅 비어 몸이 붕 뜬 듯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와 선반에서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골라 중간쯤을 펼치고 누웠다.(중략) 그러자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소냐는 결혼생활이라는 무대가 막을 내리자 다시 책읽기에 빠져든다.


소냐에게 로베르트와의 결혼생활은 일종의 책 속 세상처럼 인식된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예술가 남편과의 결혼생활 17년은 책을 통해 알던 세계(예술)의 실사화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소냐는 자아를 잊고 소설에서 배운 가치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소냐에게는 이해 못할 일도 수용 못할 것도 없는가 보았다. 어떤 행사에 소냐, 야샤, 로베르트 세 사람이 함께 동행하여 가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어찌 받아들이는가 같은 것은 신경쓰지도 않는단 말이지. 세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것이 앞서 표현되었던 소냐 자신에 대한 오랜 세월 계속된 자존감 부족의 결과는 혹시 아닌지. 


소냐는 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그렇게 없는지? 독자(소냐)는 창작자(로베르트) 앞에서 그렇게 겸양해야 하는지? 예술이 인간에 대한 존중에 우선하는 다른 차원의 것인지? 생각하다 보니 마치 예술에 가스라이팅 당한 억압된 여성의 일생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남편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다. 로베르트는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그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 행동에 책임은 져야한다. 아마도 딸친구와의 외도 문제에 책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훨씬 뛰어난 그림이 나올 수도 있고. 그냥 셋이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행위는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이 저 남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며 예술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읽히지 않고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면, 세 사람이 어울린다해도 그러고 싶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이해를 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소냐에게는 책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 표현된 책에서 얻는 행복이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로베르트와 계속 별문제 없이 살았다면 소냐는 책읽기를 했을까 안 했을까. 이 작품은 제 이해가 부족한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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