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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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편의 짧은 에세이 중에 앞에 5편이 좋았다. 작가의 삶이 담긴 에세이들. 다른 책에서 이 책으로 넘어와 읽기 시작했을 때 문장이 너무나 단정하고 맺힌 곳이 없어 읽기 편하였다. 좋은 문장을 접한다는 실감이 들었다. ‘걱정없이 사는 기술‘은 두고두고 반복해 읽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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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을 끌어내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3
힐러리 맨틀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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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홀]을 먼저 읽었다. 분량이 많았고 휙휙 넘어가는 속도감을 가진 소설은 아니어서 후속작인 이 책을 함께 구매했었지만 연이어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다른 책부터 읽으려고 일단 뒤로 미루어 두었었다. 하지만 반성은커녕 책임지는 모습 하나 없이 용산에 쳐박혀서 나라를 절단내고 있는 현실 인간을 보면서 [시체들을 끌어내라]라는 너무나 시의적절한 제목에 끌려 연말에 읽게 되었다. 연말엔 역시 장편 소설이 좋은 친구이긴 하다.

앞서 읽은 [울프홀]에서 인물들의 특징과 관계 그리고 느리면서도 내면적인 서술 방식에 적응을 한 후여서인지, 앞의 책을 읽을 때보다 500년 전의 세계에 금방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역사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은 작가의 이름을 다른 책을 통해 들은 바가 있어 관심이 있었고 [울프홀]에 이은 두 번의 맨부커상 수상에 대한 호기심도 컸던 차에 문학동네에서 새옷을 입고 나와서였다. 사실 읽기 전에는 극적인 장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빠른 전개를 예상했었다. 소설의 중심에 기구한 운명의 인물인 앤왕비와 문제적 왕인 헨리8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소설을 읽어 보니 역동적이거나 자극적인 재미를 주는 전개 방식은 아니었지만 진중한 재미가 있었다. 영국의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아주 중요한 시대를 다루고 있으니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이 어처구니없고 무섭다 한들 사건들을 제시하는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기는 어렵다. 


이 소설의 재미는 주로 토머스 크롬웰이라는 인물의 인격 묘사와 이 인물이 당대 여러 인물과 시대의 흐름 자체를 어떤 식으로 보고 평가하는가 따라가며 읽는 데서 온다. 그리고 결국 소설이 후반으로 가면 독자는 토머스 크롬웰이라는 인물 자체에 놀라게 된다. 독자는 크롬웰과 시선을 일치시켜서 그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보느라 미처 크롬웰 자체에 대한 평가를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인물이 자기 앞의 재료들을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가차없이 이용하면서 왕의 욕망과 왕의 명분을 충족시키고 완성시켰는지 마지막에서야 깨닫게 된다. 

 

크롬웰 개인에 대한 자료가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데 작가는 그 비어 있는 부분을 공략의 대상으로 삼아 소설의 정체성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역사의 세부와 비어 있는 크롬웰 개인사를 상상하여, 종교적 외교적으로 꼬일대로 꼬여 있던 왕의 결혼 문제를 해결해나간 인물을 만들어냈다. 통제되지 않는 왕의 욕망. 그 욕망에 이어지는 또 다른 욕망은 앞선 욕망을 부정하고 앞선 명분을 뒤집어 엎는다. 새로운 명분을 주기 위해서 새로운 희생은 불가피하다. 크롬웰은 누가 발 밑에 깔려야 무사히 저편으로 건널 수 있을지 교통 정리를 하면서 와중에 자신의 해묵은 빚을 받아낸다.


크롬웰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사방을 유심히 살피는 주의력을 지닌 일중독자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대한 인물로 느껴지는 이유는 피바람의 중심에서 그 자신 역시 머잖아 사라질 수 있음을, 끝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 끝이 그저 끝이 아닌 하나의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을 서류 더미 속에서 문서를 작성하며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부분은 크롬웰에 작가의 내면이 겹쳐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겨울의 긴 밤, 바람 소리를 들으며 이 작품을 읽을 때 소설이 애써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인간에 대한 주된 정서가 찌르듯이 다가왔다. 그 정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강철 심장을 지니고 여러 사람의 처형장을 세심하게 준비한 크롬웰이 앤의 처형장에서 마음 속으로 '팔을 내리라고, 제발 팔을 내리라고' 소리를 외친 부분을 유심히 읽었다. 이런 것이 역사책과 소설의 차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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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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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정도 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것을 보고 재독했다. 책구매를 알라딘에서 하면 좋은 점 중 하나가 이 책이 집에 있는지, 언제 샀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책보다 비스콘티의 영화를 먼저 보았던 것 같은데 이건 선후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소설도 영화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나는 왜 이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시칠리아, 1860년대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 이탈리아 통일기라는 오래 전 시간이 배경이며 계급적으로도 귀족 신분인 영주가 주인공이다이러한 작품이 나에게 무슨 이유로 마음에 오래 남는 소설이 되었을까처음 읽었을 때는 살리나 영주의 입체적인 면모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영주는 자신이 속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과 새로운 계층이 부상하는 것을 바라본다귀족적 우아함을 타고난 이 인물은 봉건 구조 속에서 영주로서 가장으로서 거칠 것 없이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리고 있으며 동시에 천문학자이기도 하여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에도 익숙하다그는 다가온 변화를 이해하고자 탐색하고 사유하고 판단한

변화에 대처하는 이 인물의 유연함에는어떤 우둔함이나 자기 계급에 대한 퇴행적인 고집이나 심지어 자기 핏줄을 우선하는 맹목도 비켜서 있을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바탕이 되어 있다이런 점에 상당히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물러나는 한 세계의 장엄한 퇴장장엄함만큼 깊게 느껴졌던 쓸쓸함이런 부분들이 소설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에 남았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계층의 성쇠 부분 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인간의 '죽음'이었다소설은 내용상으로 계급의 몰락과 영주의 죽음이 조화롭게 잘 물려 있다파브리초가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부분과 그가 맞이하는 죽음의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왔다무엇보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고 그러자 시간이 흘러도 이 작품의 생명이 끈질기게 유지되는 힘을 알 것 같았다.


파브리초는 구세대의 몰락과 새로운 계층의 대두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의 중개자로 역할한다그 변화는 역겨운 어떤 것(두꺼비를 삼켜야 하는)을 포함하고 있으세상의 악화일 수도 있지만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인다.


파브리초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생각을 이어가는데나는 31페이지 분량의 6장 전체를 차지하는 무도회 부분이 이 소설 전체의 축약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무도회장에서 인간 군상을 보며 영주가 느낀 피로와 혐오감과 흔쾌함과 잠깐의 열기새로운 세대를 위한 배려와 적절한 퇴장에 이르기까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고, 서재에서 홀로 휴식하며 임종의 그림을 보는 장면은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했다. 무도회가 파하고 모두 지쳐 귀가할 때 영주는 마차를 거부하고 새벽별을 보며 홀로 걷는다거리에는 도살된 소를 싣고 가는 수레가 지나가고 있다영주는 별을 보며 위안을 느끼고 언제쯤이면 별과의 만남이 허락될 것인지 생각하면서기꺼이 그 품으로 가길 희망한다. 죽음은 별들의 품으로 가는 일, 그 역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기꺼운 일이다. 6장에 이 소설이 말하는 바가 다 담겨 있음을 깨달으며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에 무도회 장면이 그렇게 인상적으로 유려하면서 긴 분량을 차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무도회를 마치고 홀로 걸어가는 영주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끝낸 것이 영화적으로 무척 적절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소설의 첫 장은 1860영주의 가족이 모여 기도를 드리는 일과로 시작한다기도하는 홀의 천장과 바닥에 그려진 신화를 소재로 한 벽화와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이 집안의 웅장한 규모와 품격을 드러낸다기도 시간이 끝나면 문밖에서 기다리던 사랑받는 영주의 개 벤디코가 안으로 들어오고 자부심으로 빛나는 거구의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1910, 1883년에 죽은 영주의 저택을 소유하고 관리하던 딸 콘체타가 오랜 세월 모으고 지녀왔던 유물들을 교회의 냉담한 기준 하에서 정리하고 버린다그리고 사십 오년 동안 박제되어 있던 벤디코를 내다 버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죽음을 자연의 일부가 되는 일로, 변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른 품에 대한 부러움을 가진다나도 콘체타처럼 과거에 연연하며, 변화를 두려워하고, 붙잡고 살 소품들에 의지하는 인간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어 있는 손을 보며 그나마 찾아 가는 것은 책읽기의 장소이다. 언제쯤, 어느만큼 그런 유연함은 가능할 것인지 알 수 없다. 기꺼운 죽음의 한 모습을 반복하여 읽으며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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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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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욘 포세의 소설이다. 

이야기 구조가 있는 작품은 아니다. 소설보다는 언어의 리듬감을 중시한 점에서 한 편의 장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고, 죽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을 담은 시적 산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죽음에 대한 해석이라 했지만, 인간의 유한한 삶 속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내용은 아니다. 삶의 입장에서 죽음을 해석하는 내용이 아니고 삶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상한 글이랄까. 영혼의 존재를 전제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육체가 영혼의 상태로 접어드는 죽음의 과정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추천사 중에 이해인 수녀가 등장했는데 그 이유를 다 읽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죽음으로 접어드는 과정 전반에서 기독교적인 성찰과 신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욘 포세 작가는 아마도 가톨릭 신자인가.


배경이 눈이 내리는 어두워 오는 북쪽 나라의 숲이며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화자가 등장하므로, 이런 면에서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외롭고 너무 큰 추위를 느낄 수 있다. 종교적 분위기는 살짝 눈 감으면서 홀로됨의 체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일상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그 지루함을 피하여 무작정 방향 없이 마구 차를 몰고 가다가 차가 외딴 곳 움푹한 곳에 쳐박히는데 화자는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화자는 차를 버리고 인가를 찾아 나선다. 숲길을 걷는 중에 해가 진다. 화자는 방향을 잃고 차가 있었던 곳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길을 헤멘다. 여기까지가 중반 정도의 내용이다. 

지루함을 피하려 어디든 마구 내달리고 결국 깊은 숲에서 길을 잃는 상황이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인가 싶다.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다 읽고 바로 책장에 꽂을 수는 없는 책이었다. 천천히 다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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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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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는 이번 책에서도 소설 속의 화자가 특정 대상을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더불어 사색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 시킨다.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생각 나는 책이었다.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탐구 대상이 둘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화자의 선생인 엘리자베스 핀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선생이 소개한 '배교자 율리아누스'이다. 


1장은 삼십 대인 화자가 성인들 대상 수업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에게 매혹되고 그와 인연을 잇게 되는 내용이다. 

화자가 핀치 교수에게 너무 매료되고 있는 앞 부분에서 소설이 가볍게 느껴졌다. 핀치 교수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난 지성의 힘으로 압도하며 뭔가 목마름이 있어 수업을 찾은 나이든 학생들, 그 중 특히 화자의 정신에 시의적절한 강타를 날리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지점들에 동의도 하고 이해도 되었지만 그래도 독자로 하여금 열광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겸연쩍음의 감정을 갖게 만들곤 했다. 핀치 선생이 비상한 인물로 표현되긴 한다. 노트 없이, 메모를 보는 일 없이 강의하면서 말이 글의 문장구조와 같아 쉼표와 세미콜론이 보이는 듯하고 마무리 문장은 예정된 질서를 따라 의도한 도착점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고리타분함에서 멀고 강렬하게 살아 있는 비유를 비롯한 표현력을 구사한다. 골초인데도 목소리는 듣기 좋고 언제나 비슷한 복장과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수업으로 만난 인연은 20년간 이어진다. 화자가 제안하고 핀치가 수정제안하여 일 년에 두세 번 점심을 함께하는 사이로 정착하는데 여기서부터 나는 이 소설에 안심하고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일 년에 두세 번 75분의 식사 시간 동안 화자는 신중하게 주제를(그때 그때의 이야기거리) 선택해서 자신의 지성을 농축하여 대화를 나누려 노력한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더 똑똑해졌다.' 라고 말하는데 나도 상대에 따라 이런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만 느낌일 뿐이라기 보다 집중과 열의가 화자를 변화시킨 시간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형식의 (때로는 머리에 쥐나는)대화를 애정 플러스 존경의 대상과 나눈 경험, 우리 다들 갖고 있지 않을까? 핀치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엄격한 즐거움'의 일종이다. 강의실이 아니라 식사 중의 대화여서 즐거움에 훨씬 치중하지만.

 

2장은 핀치 교수가 쌓아놓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화자가 쓴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에세이다. 

이 황제가 왜 2장을 통째로 차지하는지만 소개한다.

로마가 기독교 탄압의 시대를 끝내고 선대 황제 콘스탄티누스부터 일신교인 기독교를 인정하여 바야흐로 기독교가 널리 퍼지려는 시기에 등장한 율리아누스는 이전의 다신교 로마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한 인물이다. 그래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린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가 된 이후에는 역사적으로 최후의 이교도 황제라고도 한다.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학자이기도 하여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교수가 이 황제 이야기를 1장에서부터 하는데 이와 관련된 관심은 세계관으로, 가치관으로 꾸준히 수업에서 변주되며 제시되었던 것이다. 

다음 예를 드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교수는 '모노(mono)-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라며 일신교, 일부일처제, 단조로움, 단종 재배, 단일 문화, 모노폴리 등등을 열거한다. 일신교의 세계가 된 서구 세계, 이 엉망진창의 현재를 둘러볼 때, 고대의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가 성공해서 그 질서가 계속 유지되고 다신교의 종교관이 당연한 세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고  탐문해 볼 것을 제안한다. '율리아누스, 그는 기독교라는 재앙의 큰 물결을 막으려 했죠.' 라면서. 

다음의 말도 옮겨 보겠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 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승부를 예를 들고 '그렇지 않았다면-'을 상상해 보기를 권하며 현재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강자에 이입하지 않기를, 생각을 확장시키기를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율리아누스 황제로 집약되는데 교수가 쓰지 않은 책을 화자가 에세이로 쓰게 된 것이 2장이다. 2장의 본 내용은 소개를 생략한다.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여러 역사적,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존의 정보에 추측과 상상을 더해 정리한 글이다.


3장은 1장과 2장을 통과하면서 더 확인할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이해한 바를 정리하고 있었다. 

화자는 교수의 오빠를 통해 듣게 된 정보와 교수가 남긴 자료들과 생전에 했던 말을 다시 곱씹으며 구멍이 있는 부분을 매우려 애를 쓴다. 교수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과정은 화자 자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만남을 이어왔지만 교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의 기억도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면에서 핀치 선생도 역사 속의 인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 교수의 수업을 함께 들으며 어울린 무리 중에 화자가 잠시 사귄 안나 그리고 당시에 교수에게 반감이 심했던 제프 등과 교수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한다. 

안나는 교수에 대한 화자의 사랑에 근사한 탐구가 독백에 그치지 않는지 조심하라고 충고한다.(아마도 남들 눈에는 과장된 헛소리로 보이지 않을지,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겠다.) 화자는 일찌기 핀치 선생이 독백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독백은 극적 장치로서 극단적 인위성을 지니며 그것이 독백의 뛰어난 점, 이라고 했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이 말은 독백이란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매우 의식적인 공들인 표현방식의 하나라는 뜻인 것 같고 매우 의식적이며 공들인 표현방식이라면 화자는 오히려 자신의 작업에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프는 선생이 자기 스타일은 있었으나 고대식의 느낌이며 수업방식은 방종에 가까웠고 선생 본인은 자기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아마추어'가 더 잘 어울리며 아마추어 학자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화자가 선생을 신화화하여 의지한다고 한심한 듯 표현했다. 내 생각에, 선생에 대한 제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구태의연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기존의 틀을 의심하지 않고 그 틀에 맞추어 대상을 평가하는 흔한 외부자의 시선이라서 자신이 선생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가차없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프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전제는 다 경직된 상태이다. 고대식은 안 좋은 것이며 현대식이 좋다는 의심없는 생각, 제프 자신이 연대기식, 이벤트 중심의 문명사 주입식 수업방식을 원하였다는 것, 독창적인 것과 아마추어적인 것은 동시에 발견되기도 하는 근접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게다가 아마추어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서 아마추어 학자가 도태된 것을 당연하게 본다는 것인가 - 이러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정말 안 독창적인 제프이다.


이 글의 앞 부분에 쓴 불만이랄 것도 없는 불만은(사춘기도 아닌데 선생에게 넘 반하네? 근데 선생은 왜 이렇게 금욕적인 외모에다 지적으로 넓고 깊은지 너무한 거 아니냐?) 결국 해소되었다. 옮긴이 정영목 님의 사족을 보면 엘리자베스 핀치의 모델(어니타 브루크너)이 있다고 하니 영국엔 이런 분의 존재가 '너무한 거' 아니었습니다. 모델이 있다고 하니 엘리자베스 핀치의 비상함에 순순히 설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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