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의 주인공 윌헬름은 집을 나왔습니다. 소설에선 은근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서입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도 나오게 되었으니 마흔 중반에 인생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윌헬름은 여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국면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고 경고의 종이 울림에도 충동을 따르는 야무지지 못한 선택을 함으로써 인생의 기반을 자꾸 허물어 뜨렸고 지금은 추락 직전입니다. 그러함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로 평생 일해 얻은 명예와 돈을 기반하여 홀로 주거용 호텔에서 은퇴자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윌헬름은 그 호텔에 방을 얻어 한 지붕 아래 지내고 있어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아버지를 은연중에 의지하는 마음에서 그리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윌헬름의 시리즈로 이어진 잘못된 선택에 더이상 관여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상태입니다. 

윌헬름의 아내는 이혼해 주지 않고 두 자식 부양의 의무는 해야 하는데 돈 나올 곳은 없고 호텔 숙박비도 밀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은 소설이 시작되면 이미 주인공의 조건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소설은 윌헬름의 잔이 마침내 넘치게 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그 꽉 찬 잔의 위태로움, 안절부절함을 지켜 보며 과연 이 인물은 동정의 여지가 있는지, 여기에 이르는 동안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주인공과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은 떨어질 것이고 이 이야기가 행복하게 마무리될 거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읽는 동안 좀 답답했지만 다행히 분량이 짧은 소설입니다.


윌헬름을 제외한 인물들은 노년에 접어들거나 완연한 노년의 연령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것은 윌헬름이지만 돈은 늙은이들에게 있습니다. 젊을 때는 다르게 살겠다고 이름까지 바꾸었으나 중년의 주인공은 아직도 그들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 같습니다. 이 상황을 넘겨 보고자 지푸라기를 잡으려 애쓰는 중에 과거와 현재의 문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소망과 원망과 이해의 사고 과정이 주인공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주인공에게서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데 더하여 머리 속에 명멸하듯 이어지는 생각들의 전개를 읽어나가자니 샐린저 작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윌헬름의 자취를 보면 어리석기도 하고 책임감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도 부족하지만 주어진 틀을 벗어나서 약간 다른 길을 가 보고자 시도하는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와는 다른 어느 정도의 분방함과 꿈꾸는 기질을 소유했다는 것이 이렇게나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되네요. 영악하지 못한 분방함과 도모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떤 결과로 되돌아 오는지, 주어진 길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발밑을 살피며 앞만 보고 가야 했었는가 같은 생각들.   

 

사건 진행에서 오는 재미나 흥미진진함을 가진 소설은 아닌데 큰 사건 없이 인물의 상황과 심리를 촘촘하게 엮어나가는 능력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23-12-16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 정말 좋아하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종이 2023-12-16 19:32   좋아요 1 | URL
본문의 저 문장 내용에 국한해서 그런 비슷한 이미지가 있었다는 것으로 축소해서 생각해 주셔요. 제가 무리한 연결을 한 것인지 몰라요.ㅎ 짐작하시겠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이라 순수함과는 거리가 있고 더 어리석고 인생의 때도 많이 묻은 인물이었어요.
 
기억의 유령 -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제발트의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작품을 소중히 쓰다듬고 있던 어떤 독자들에게 축복과 같다. 기대했던대로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그의 글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시간을 늦추며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며 멈추어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면도날'은 서머싯 몸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이 오래 알고 지낸 인물들 이야기를, 짐짓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인 듯 써나간 소설입니다. 

화자가 관찰한 주요 인물은 래리, 엘리엇, 엘리엇의 조카이며 래리와 약혼했던 이사벨인데, 이들은 대립적인 가치를 지닌 두 세계를 표현합니다. 작가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주인공인 래리의 여정과 그의 사고 추이가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만 반대편의 세계에 있는 엘리엇도 소설 후반까지 존중을 받으며 등장합니다. 

엘리엇은 인생의 목표가 상류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교계의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이었고 인생 초반에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상냥한 천성을 바탕으로 끈기있게 노력을 했고 결국 성공해서 뜻대로 화려하게 산 인물입니다. 이사벨은 삼촌 엘리엇과 기질이 비슷하여 비슷한 경로를 선택하여 살게 되고요. 작가 서머싯 몸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지인의 손에 자란 래리는 1차대전 참전 때 겪은 일로 삶에 대한 의문을 안게 되고 자신이 속했던 사회를 벗어나 공부와 모색의 길을 나섭니다. 

이들과 인연을 맺은 화자가 수십 년에 걸쳐 이들을 접촉하며 레리와 이사벨이 어떤 선택을 하고 인생에서 자리잡는지, 엘리엇의 경우에는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짓는지 대화하거나 관찰하거나 전해들은 것들을 적어나간 소설입니다.


화자에 의해 이 중 어떤 인물의 이상적 성향이 비현실적이라고, 또 다른 인물의 현실 우선주의가 속물적이라고 섣불리 비난되거나 절교 등으로 단죄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도 그러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독자 주변에 이 작품 속의 딱 이러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대도 변화했지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교류의 기회가 있다면 과연 노회한 화자처럼 얘도 이유가 있지, 쟤도 이유가 있으니 괜찮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만 인생을 보는 눈의 깊이나 여유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인지도 생각합니다. 

 

이사벨은 나서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기 계급 상식'의 틀을 벗어날 생각이 없고 그것이 때로는 현명하게 보이지만 대체로는 속물적인 상류층 여성입니다. 삼촌인 엘리엇은 임종에 임박해 상상하는 천국조차도 자신이 가는 곳이 화려한 상류 계층의 환경일 것이라고, 그곳에 '빌어먹을 평등' 따윈 없을 거라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예수의 말을 근거로요. 그 성경 구절이 누구나 환영한다는 뜻이지 계층별로 방이 나뉘어 있다는 뜻이랍니까. 저는 이들과 오래 인연을 이어가는, 엘리엇의 경우 임종까지 지키는 우정을 이어가는 작가인 화자의 속내가 의아했습니다. 엘리엇의 경우 비열한 사람이 아니며,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장점을 미리 얘기하긴 했어요. 이사벨의 경우엔...... 네, 아름답다고 하네요.

서머싯 모옴 같은 작가라면 다종다양한 인생 경험이 많아서 타인의 장점으로 단점을 덮어가며 두루 사귐을 이어갈 줄 알고 그 결과 글의 풍요로움이 얻어진 것일지도요. 그러나 일개 독자인 저는 엘리엇과 같은 인물과 오랜 사귐을 이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이 인물을 이렇게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에 의문이 듭니다.

저는 그냥 작가(화자)가 자신의 속물성을 인정하고 품은 결과가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는 우리 안의 속물성을 충분히 알고 시시때때 굴복하고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경계선은 있지 않을까하고요, 저는 엘리엇과 같은 가치관은 덮을 수 있는 단점 정도라고 보이진 않았습니다. 


래리의 경우 책을 다 읽고 나니 당시의 여건이 되던 미국인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돌아다니던 것과 크게 다르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 호텔과 관광지를 돈으로 주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가난 속에서 노동하며 공부가 목표인 진지한 방랑이었지만요. 래리가 알자스의 수도원 경험 후에 기독교에 대해 실망 섞인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을 들어 보면 신학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 부분은 이어질 동양 사상에의 경도에 균형 맞추기로 넣었을까 싶기도 했네요. 인도에서의 수행 생활을 통해 접한 신비한 체험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하거든요. 익숙한 것에는 평가가 박하고 낯선 것엔 더욱 진지한 모양새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자인 제가 힌두교 등 인도 사상을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이 옮겨 다니는 유럽의 여러 장소들이 서머싯 모옴이 실제로 지냈던 곳과 겹쳤습니다. 특히 남프랑스의 해안가 동네들이 그렇습니다. 서머싯 모옴은 니스에서 영면했다고 하네요. 제목이 왜 '면도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래리의 위태로운 여정, 인생의 위태로움을 의미하는 것인가 짐작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죄와 속죄의 저편
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후 독일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가야 한다는 대세의 흐름 속에서 나의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도 원한에 차 있다‘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쓴 선언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츠 갬빗 - 여섯 편의 추리소설
윌리엄 포크너 지음, 신혜빈 옮김 / 미행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9년에 나온 책으로 1932년부터 1949년까지 발표된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들, '연기, 몽크, 수면 위의 손, 내일, 화학적 실수, 나이츠 갬빗'이 발표순으로 묶여 있습니다.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문학동네)를 - '고함과 분노'(열린책들), '음향과 분노'(그 밖의 출판사) - 읽을 때는 예사롭지 않은 장애를 지닌 인물의 특성과 작가의 문체가 결합되어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문장에 쉼표와 대시( - )가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쉼표의 잦은 사용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끊어지는 인물의 어수선한 사고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그럴 듯했어요. 또 지시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애매하게 느껴지는 점도 상황과 어울리며 적절하고 절묘하달까 그랬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 '내가 누워 죽어갈 때'(부클래식) - 역시 일가가 겪는 상식적이지 않은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구성원들 내면의 웅얼거림 같은 것이 작가의 문체와 어울렸고 묘하게 빠져드는 면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위의 두 소설에서 내용과 문체가 어울리는 포크너 소설의 맛을 보게 되었고, 내용이 갖는 특유의 막막함에 매력을 느꼈고, 호감을 가지며 작가의 이름을 머릿속에 갈무리 했지만 읽는 동안은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고 자주 앞 부분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가며 읽는 수고가 따라야 했습니다.(이 문장 쓰고 보니 포크너 문장스럽습니다) 역자의 탓은 아니지 싶었으나 때로는 번역 탓도 하게 되고요. 작가가 어찌 썼든 안 그래도 어려운 소설, 번역의 과정에서 좀 친절한 다듬질이 필요했지 않을까 그래도 되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지시어가 뭘 가리키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거듭되자 에라이 모르겠다, 심정으로 대충 넘어가게 될 때도 있었고요. 그 중에서도 매우 대충 읽어서 읽은 걸로 치기 어려운 소설이 '곰'(문학동네)이고요.

 

아마도 영어권 사람들은 문장에서 리듬감도 느낄 것이고 단어의 뉘앙스가 주는 분위기도 있을 거고, 술술 읽기 어렵다 해도 우리보다 이 작가의 소설들을 즐길 여지가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이츠 갬빗'을 읽으면서는 여기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을 댁들도 추리 소설로 정말 즐겼냐고 물어 보고 싶었네요... 그러합니다. 추리 소설에서 이 작가가 그렇게도 즐겨쓰는 지시어가 뭘 지시하는지 혼동을 거듭하고 결국 이해를 못 하는 지경이 되자 읽어나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가장 그랬던 작품이 표제작인 '나이츠 갬빗'이었고요. '그'는 앞서 서술한 이들 중에 누군가? '그것'이라니 무엇 말인가? 게다가 쉼표가 여럿 들어간 긴 문장에서 마지막에 서술어를 딱 봤을 때 이 서술어의 주인이 뭐였지? 대체 누구에 대한, 무엇을 설명하는 문장인지 길을 잃습니다.

  

포크너를 많이 좋아하시면 당연히 이 소설집도 좋으실 겁니다. 저는 이 작가의 글의 특징이 이번 소설들에선 더 난이도가 높았고 다 읽고 난 후의 보람은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님이 확실한 것이 책 뒤에 신혜빈 옮긴이가 후기 끝에 각 소설에 대한 짧은 요약을 첨부했네요. '포크너가 설계한 미로에서 서성이는 독자가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면서요. 하지만 세부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큰 맥락의 줄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 제가 번역이 좀 친절했어야 한다는 불만을 썼는데 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옮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포크너 특유의 길고 복잡한 문장과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역시나 두드러지는 소설이라, 단순히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매끄럽게, 짧은 길이로 토막 내지 않는 것을 번역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포크너의 문장은 이해를 거부하는 듯 장황하고 난해해 보여도 읽다 보면 묘하게 구어체 같은 특유의 호흡과 리듬이 있다. 번역문에서 이를 구현하는 것이 번역자로서 세운 큰 목표이자 도전이었다.' 라고요. 삼 년 동안 고생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의 후기도 드물게 첨부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워낙'까진 아니라도 좋아하는 작가이고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 등이 저와 비슷한 지점이 있어 조금 옮겨 봅니다. '이 책을 담당한 나는 이 책을 안고 있던 삼 년 간 포크너를 악마라고 불렀다. (중략) 끝나지 않는 문장들, 그 안에 얽혀 있는 미로 같은 서사, 불분명한 호칭들, 쉼 없고 장엄한 거인의 호흡 같은 진행, 은연중 읽히는 수법, 필력, 잘 따라가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지만 그런 의심에는 심드렁한 작가관...(중략)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고 그래서 고유의 문체에서 오는 어려움도 다루면서 내내 기쁠 것 같았고, 또한 포크너지만 문학성을 짙게 띠기보다는 추리소설이니 약간 대중성 있게 쉽게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했는데 그건 오해라는 게 작업 초기에 바로 판명되었다.' 라고요. 


결론적으로 포크너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한두 번 읽기로 안 되면 서너 번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옮긴이의 말처럼 구어체의 흐름을 타려면 반복 읽기가 필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한 독자의 자질을 요구하는 작가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단지 이해를 위해 세 번, 네 번 읽을 용의가 잘 안 생기니 문제입니다. 하지만 '소리와 분노'나 '내가 누워 죽어갈 때' 같은 소설은 언젠가 다시 읽을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음을 투덜대는 글이 된 거 같은데 이것도 리뷰란에 올려도 되나 모르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