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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면도날'은 서머싯 몸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이 오래 알고 지낸 인물들 이야기를, 짐짓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인 듯 써나간 소설입니다.
화자가 관찰한 주요 인물은 래리, 엘리엇, 엘리엇의 조카이며 래리와 약혼했던 이사벨인데, 이들은 대립적인 가치를 지닌 두 세계를 표현합니다. 작가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주인공인 래리의 여정과 그의 사고 추이가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만 반대편의 세계에 있는 엘리엇도 소설 후반까지 존중을 받으며 등장합니다.
엘리엇은 인생의 목표가 상류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교계의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이었고 인생 초반에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상냥한 천성을 바탕으로 끈기있게 노력을 했고 결국 성공해서 뜻대로 화려하게 산 인물입니다. 이사벨은 삼촌 엘리엇과 기질이 비슷하여 비슷한 경로를 선택하여 살게 되고요. 작가 서머싯 몸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지인의 손에 자란 래리는 1차대전 참전 때 겪은 일로 삶에 대한 의문을 안게 되고 자신이 속했던 사회를 벗어나 공부와 모색의 길을 나섭니다.
이들과 인연을 맺은 화자가 수십 년에 걸쳐 이들을 접촉하며 레리와 이사벨이 어떤 선택을 하고 인생에서 자리잡는지, 엘리엇의 경우에는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짓는지 대화하거나 관찰하거나 전해들은 것들을 적어나간 소설입니다.
화자에 의해 이 중 어떤 인물의 이상적 성향이 비현실적이라고, 또 다른 인물의 현실 우선주의가 속물적이라고 섣불리 비난되거나 절교 등으로 단죄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도 그러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독자 주변에 이 작품 속의 딱 이러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대도 변화했지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교류의 기회가 있다면 과연 노회한 화자처럼 얘도 이유가 있지, 쟤도 이유가 있으니 괜찮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만 인생을 보는 눈의 깊이나 여유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인지도 생각합니다.
이사벨은 나서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기 계급 상식'의 틀을 벗어날 생각이 없고 그것이 때로는 현명하게 보이지만 대체로는 속물적인 상류층 여성입니다. 삼촌인 엘리엇은 임종에 임박해 상상하는 천국조차도 자신이 가는 곳이 화려한 상류 계층의 환경일 것이라고, 그곳에 '빌어먹을 평등' 따윈 없을 거라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예수의 말을 근거로요. 그 성경 구절이 누구나 환영한다는 뜻이지 계층별로 방이 나뉘어 있다는 뜻이랍니까. 저는 이들과 오래 인연을 이어가는, 엘리엇의 경우 임종까지 지키는 우정을 이어가는 작가인 화자의 속내가 의아했습니다. 엘리엇의 경우 비열한 사람이 아니며,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장점을 미리 얘기하긴 했어요. 이사벨의 경우엔...... 네, 아름답다고 하네요.
서머싯 모옴 같은 작가라면 다종다양한 인생 경험이 많아서 타인의 장점으로 단점을 덮어가며 두루 사귐을 이어갈 줄 알고 그 결과 글의 풍요로움이 얻어진 것일지도요. 그러나 일개 독자인 저는 엘리엇과 같은 인물과 오랜 사귐을 이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이 인물을 이렇게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에 의문이 듭니다.
저는 그냥 작가(화자)가 자신의 속물성을 인정하고 품은 결과가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는 우리 안의 속물성을 충분히 알고 시시때때 굴복하고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경계선은 있지 않을까하고요, 저는 엘리엇과 같은 가치관은 덮을 수 있는 단점 정도라고 보이진 않았습니다.
래리의 경우 책을 다 읽고 나니 당시의 여건이 되던 미국인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돌아다니던 것과 크게 다르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 호텔과 관광지를 돈으로 주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가난 속에서 노동하며 공부가 목표인 진지한 방랑이었지만요. 래리가 알자스의 수도원 경험 후에 기독교에 대해 실망 섞인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을 들어 보면 신학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 부분은 이어질 동양 사상에의 경도에 균형 맞추기로 넣었을까 싶기도 했네요. 인도에서의 수행 생활을 통해 접한 신비한 체험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하거든요. 익숙한 것에는 평가가 박하고 낯선 것엔 더욱 진지한 모양새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자인 제가 힌두교 등 인도 사상을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이 옮겨 다니는 유럽의 여러 장소들이 서머싯 모옴이 실제로 지냈던 곳과 겹쳤습니다. 특히 남프랑스의 해안가 동네들이 그렇습니다. 서머싯 모옴은 니스에서 영면했다고 하네요. 제목이 왜 '면도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래리의 위태로운 여정, 인생의 위태로움을 의미하는 것인가 짐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