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은 혀 - 어느 청춘의 이야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80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김진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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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카네티의 16세까지(1905-1921) 시간을 다룬다. 

후기 글의 상찬을 믿고 시작했는데 [군중과 권력]도 안 읽었고 카네티에 대해 특별한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지 의심이 있었다. 거기다 자서전이라는 갈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 하지만 대다수 좋은 책의 길을 따라 이 책도 뒤로 가면서 점점 기세를 얻고 흥이 더해지며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자전적 소설과는 달라서 구조적, 의미적으로 이야기의 완결성은 기대할 수 없지만 실재의 시공 속에서 한 인간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보는 다이나믹함이 있다. 그리고 어떤 대목들은 실제이니만큼 비판이 가능한 여지를 준다는 생각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부모와의 밀착된 관계였다.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는 카네티가 책과 맺는 관계로 이어진다. 카네티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후엔 어머니와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데 모든 내적, 외적 사건들을 다 공유하며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양, 카네티 본인의 경우는 진심 서로의 인정만이 전부라는 애착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아버지가 한 권씩 가져다 준 책은 독서 후 그 내용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며 카네티 최초의 세계를 형성하고, 어머니가 가져다 주거나 좋아한 책은 어머니와 함께 독서하고 대화하면서 같이 만든 세계로서 카네티에게 말 그대로 흡수된다. 

십 대 초반까지 부모의 영향은 누구에게나 강력하지만 이 가족의 경우, 이 모자의 경우는 프로이드의 사례 중에서도 두드러진 예가 될 법하다.

카네티는 아버지 죽음 후 모자 사이에 무언가의 침입(어머니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으로 틈이 보인다 싶으면 끈질긴 집착과 집요함으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투쟁하여 원상복구시킨다. 또한 어머니는 절대적, 독재자적 영향력을 카네티에게 행사하면서 정신적인 고문에 가까운 언사를 예사로 하며 지배한다. 그 고문은 주로 책과 지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데 쓰이고 공명심을 주입시키는데 쓰이긴 하지만 서로에 대한 극심한 기대와 압박이 이 책 이후의 시기에 다가올 이상 기운을 예감하게 만든다. 남동생이 둘 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 분량이 거의 없다는 점도 특이하다. 동생들과 놀며 있었던 일, 아버지 사후 생길법한 동생들에 대한 감정, 두 동생 각각의 특징이나 주고받은 영향이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마치 자신과 아버지, 자신과 어머니만이 가족인 것 같이 내용을 채워놓고 있었다. 


카네티는 이 책 분량 반을 차지하는 취리히에서의 생활을 아주 만족스럽게 회고한다. 특히 어머니의 요양으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후반부 이 년의 시간 동안을. 교사들과 급우들을 관찰하고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그들에 대한 존경을 고백하며, 읽는 책과 더불어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인하여 자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성장의 기쁨을 느꼈다는 서술이 몇 번 나온다. 이 부분들은 저자의 즐거웠던 기운이 글에서도 묻어나 특히 재미나게 읽었다. 예전에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의 성장 소설들을 읽을 때의 느낌도 나고. 

또한 이 부분은 카네티가 처음으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카네티는 지식욕과 더불어 과시욕이 있어 모든 수업 시간에 언제나 손을 너무 자주, 너무 빨리 드는 학생이고 학급에 있던 또 한 명 유대인 학생은 학습이 아주 쳐지는 애였는데 둘 다 급우들에게 미움을 사고 둘을 묶는 공통점으로 욕설 쪽지(--꺼져라, 우리는 네놈들이 필요없다)를 받고 따돌림을 당한다. 카네티는 학교 전체 유대인 학생들과 모여 탄원서를 써서 제출하고 학교는 요란스러움 없이 실질적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카네티는 시간이 흐른 후 학교 측의 조치를 알게 되고 원래 가졌던 스위스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을 더하게 된다.


시기가 시기라 눈에 들어온 것도 있겠지만 책 속에서 어머니의 태도를 통해 유대인들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그냥 '유대인'이라서가 아니다. '세파라드 유대인'임을 강조하는데 15세기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반 유럽계 유대인, 독일계 유대인을 차별하여 그들과는 결혼도 해선 안 된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세파라드 유대인 중에서도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가 엄청나며 그 자부심의 근거는 카네티의 말에 의하면 오로지 부유함에 있다는 것이다. 가문 내에서 친척들이 유산 문제로 마지막 한 푼까지 파산시키려고 소송을 거듭하는 추함을 보면서도 가문에 대한 자랑과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어머니는 아무 모순을 못 느끼더라고 카네티는 적고 있었다. 같은 유대인끼리도 구분하여 차별하며 부를 이룬 소수 유대인 가문만의 결집을 통해 자부심을 갖는 모습을 보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오래 차별 받은 세월 속에서 아무런 배움이 없었던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세파라드 유대인도 스페인에서 쫓겨나서 동유럽으로 옮긴 상태이면서 말이다. 자기 객관화가 이렇게나 어려운 모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군중과 권력]이 가깝게 느껴지는 효과가 생겨 일단 보관함에 넣었다. 

참, '내 삶의 이야기 속에 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라고 책 뒷면에 적혀 있었으나 완전히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었다. 왜 이런 언급을 했는지는 자서전 나머지가 번역돼 나와야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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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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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머싯 몸의 소설을 [면도날]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면도날]도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 느낌을 갖는다. 내가 기대하는 성격의 소설이 아니라 그런 것 같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대한 방향에서 오는 재미가 아니었고 작가의 유명세를 생각할 때 기대한 만큼의 재미는 아니었다. 

몸은 활동 당시에 대중적인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였지 않을까. 깊이를 천착하는 작가는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중심인물 세 명 중에 내면의 생각과 그 변화를 따라가 보게 하는 인물은 키티 한 사람이다. 남편 월터의 성격이나 인간됨은 키티의 눈에 비친 모습이나 키티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불륜 상대인 찰스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 내면이랄 것이 없다. 따라서 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으로써 인물이 성장하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이야기는 외부의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사실상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키티, 그녀,라고 지칭되어 있으나 이야기는 키티만을 따라가고 외부 세계는 그녀의 시선을 통해서 전달된다. 사실상 1인칭 주인공 시점인데 표면적으로 3인칭 시점으로 전개한 것은 키티의 성격적 가벼움과 천박함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키티의 가족 비롯 주변 인물과 갖는 관계의 부실함을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그릴 필요없이,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유용성도. 이런 의도를 생각해 보았으나 한편으로는 표면적으로 3인칭이나 실질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월터라는 인물을 깊이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쉽다. 생각해 보면 3인칭이면서 실질 1인칭으로 전개하였다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의 내면을 '조금만' 다루겠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된 것 같다. 


키티가 변화하고 성숙하게 되는 장치들도 무척 도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키티는 월터에게 불륜을 들키고 찰스의 본색을 확인한다. 이후에 냉혹하고 자기파괴적인 월터의 결정으로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의 농촌 지역에 끌려가듯이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일생을 헌신하는 프랑스 수녀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의 자연에 감화받는다. 이국에 이국을 더하며 생경함에 생경함을 더하는 극단적인 외적 조건들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단 두세 달 지속되는데 키티는 무척 변화하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람이 그렇게 금방 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홍콩에 돌아온 키티를 통해 작가가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도 불평을 조금 하자면 인간의 나약함을 이렇게 보여 준다면 앞서 농촌에서의 장면들에 신뢰가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굴곡을 거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단련되어 간다, 라는 면도 있겠으나 그래봤자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라는 김빠지는 장면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1920년대 영국인이었다면 이 책이 많이 흥미로웠을까. [면도날]에 이어 다시 서머싯 몸 책을 시도한 것은 조지 오웰의 언급 때문이었는데...아쉽다. 대표작인 [인간의 굴레]나 [달과 6펜스]를 읽었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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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톨스토이인가요, 도스토옙스키인가요? 라고 선호를 굳이 묻는다면 나는 도스토옙스키 쪽이라 생각해왔다.

나보코프는 문학이 자신을 흥미롭게 하는 관점이 되는, 탁월한 수많은 예술가의 창조물이라는 기준에서 보았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고 유머가 있긴 하나 진부함과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언급을 할라치면 난처함과 곤란함을 느낀다고.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가 다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를 가르칠 만큼 학술적인 교수가 못 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체를 폭로하길 간절히 원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일반 독자들은 이 가치 체계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교수로서의 나보코프는 명쾌하다. 확신에 차서 자신의 문학관과 취향을 옹호하고 말투는 신랄하다. 

나보코프는 네 번 - 열두 살, 열아홉 살, 스물여덟 살, 그리고 이 강의 즈음에 [죄와 벌]을 읽었다고 한다. 열두 살 때는 황홀했으나 열아홉 살 때부터 의심을 가졌고 최근에 결함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내 경우 [죄와 벌]을 고2 때 푹 빠져서 읽고 20대 후반에 다시 읽었다. 수십 년이 흘렀으니 지금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뭔가 조금 억울한 감정이 생겼다. 나보코프가 지적하는 도스토옙스키의 결점들과 [죄와 벌]의 결함에 수긍이 가니 더 억울한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지적들. 묘사는 극히 부족하고 히스테리, 간질 발작, 정신이상의 인물들 천지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관념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인물들, 미학적 성과는 부족한 역겨운 범죄에 대한 집착과 개연성 결핍의 감상주의적 전개...... 특히 [죄와 벌]에서 살인자와 매춘부가 함께 영원의 책(성경)을 읽는다는 문장은 최악이라고 했다. 추잡한 살인자와 불운한 소녀 매춘부라는, 차원이 다른 둘을 성경과 함께 트리오로 엮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 이런 지적들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 읽었던 지적도 있고. 

내가 희미하게 느끼는 억울함이랄까 반발의 마음은 좀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다. 

나보코프는 사람들이 이 글의 첫 줄에 있는 질문들을 나누는 것 자체가 불쾌했던 게 아닌가 짐작해 보았다. 톨스토이의 우아함, 거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생생하게 이를 떠받치는 세밀한 사건과 묘사, 생생한 인물들의 설득력 겸비한 감동적인 행보. 이 위대한 작가를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위치지어 언급하곤 하는 것이 보기 싫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조목조목 비판한 결점을 읽어 보면.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아주 다른 작가이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균형과 불균형이라는 대비를 떠올려 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 자신이 불균형한 삶의 여정을 거쳤고 그가 만든 작품 역시 불균형한 사람들이 불균형한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이다. 자기가 잘 아는 이들을 데리고 자기가 잘 못하는 묘사를 생략하면서 자기가 잘 아는 납득이 어려운 인간사를 펼쳐놨다는 생각을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성격에 비해 과평가가 된 부분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울퉁불퉁하고 기이하고 균형과 우아함을 찾기 어려운, 어떻게 보면 왜곡된 눈으로 본 인간 이야기에 이입하는 사람(독자)들의 에너지를 긍정한다.  

나보코프에게는 그 불균형이 예술적, 미학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하수로만 보였겠지만 조화와 균형과 세련미로 우리를 고양시키는 훌륭한 작품의 한편에는 그런 것을 잘 하기 싫은, 잘 하려고 해도 잘 할 수 없는 부류의 작가의 훌륭한 작품도 있으며 독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작품에 애정을 더욱 느끼는 부류가 있다. 나의 경우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보이는 감상적 수습이나 병으로 퉁치거나 하는 즐기기 어려운 장치들에 껄끄러움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 담긴 기이함과 묘사 없이 길게 이어지는 대화들과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거리를 방황하는 인물들에 지금까지도 애정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균형감과 안정을 해치는 독서 경험이었고 어떤 장면에서는 가슴을 쥐어짜는 잊을 수 없는 독서 경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에 대한 매혹으로 이끈 경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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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인 레온과 예술학교 준비 중인 펠릭스가 펠릭스 엄마 소유의 별장에 도착하고 거기서 만나게 된 나디아와 인명구조원 데비드와 어울리는 며칠 간의 이야기이다. 

레온을 제외한 인물들은 수영도 하고 집도 고치고 베드민턴도 치고 음식도 돌아가며 하고...서로 어울리고 사귀고 즐기지만  

레온은 다른 인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레온은 언제나 '일(소설쓰기)'이 중요하다는 어필을 하고 다른 행위들은 무시해도 되는, 무시해야 되는 것인 듯 군다. 레온을 제외한 인물들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으며 유연하고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 소통에 어려움이 없어 금방 격의 없이 지낸다. 

이들 중에서 좀더 정보가 풍부한 나디아란 인물에 대해 얘기 하자면, 페촐트 감독의 이전 영화 '운디네'에 물의 요정으로 나온 폴라 비어가 연기하는데 내가 보기에 나디아는 마치 인간으로 환생한 물의 요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다. 학위를 준비 중인 문학도이면서 자신을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알고 있는 레온에게 (레온과는 달리)자기 전공에 대해 티를 내지 않는다. 감추는 것도 아니지만 묻지 않았으니 말하지도 않는다. 문학 전공자라는 것이 아이스크림 판매원과 다른 특별한 정체성이라는 식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나디아는 주변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인생의 순간들을 즐긴다. 뭔가 생명의 꽃같은 존재다. 페촐트 감독에 의하면 부러 헌자전거와 투박한 신을 장착시켰음에도 한 순간에 그것들을 포함해서 나디아를 이루는 모든 것을 우아하게 변모시켰다고 한다.(애초에 폴라 비어에게 맡겼으면서 이런 말은 좀...) 


레온은 이런 인물들 안에 속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다. 처음에는 나는 작가니까 이런 태도가 맞고 쟤들과 달라도 괜찮아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자신의 작가 정체성이 얼마나 알량한 지를 느끼고 다른 이들의 유연함에 위축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바라봄'마저도 '나는 작가니까'라는 생각 때문에 방해를 받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작업 중인 형편없는 글을 붙잡고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편의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볼 뿐이다. 다른 이들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이 더욱 협소한 마음을 고집하게 하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자연에 대한 관심도 기울일 줄 모른다. 사람이 죽고 자연이 죽어나갈 때까지. 

이랬던 레온이 사건의 연속 속에서, 아주 조금 마음의 확장이 일어나고 아주 조금 더 나은 글을 쓰는 작가로 나아가는 결말이었다.

레온은 어리석고 편협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안에 있는 그런 결함을 끝내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결함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 좋은 작가가 될 가능성이 더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나디아처럼 완벽한 인간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결함과 삐죽삐죽한 정서를 지닌 사람으로서 레온의 저 해안에 어울리지 않는 거무튀튀한 복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거든.

이 영화는 끝까지 레온이라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거의 주지 않았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형편없었던 그의 원고가 출판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아주 조금 변화에의 기대를 남기는 것 같다.   


영화의 방향과는 좀 다르지만, 작가가 글을 쓰자면 언제 살겠는가? 잘 사는데 시간을 쓴다면 언제 쓰겠는가?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잘 바라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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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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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해야>하며 결국 우리가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길을 고집스레 가는 게 옳다는 것이다.‘ 앞 인용문 안의 인용은 레닌이 한 말이라는데, 카레르가 본문에서 세 번 언급, 카레르의 모든 작품들 특히 이번 소설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책읽기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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