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접하는 욘 포세의 소설이다. 

이야기 구조가 있는 작품은 아니다. 소설보다는 언어의 리듬감을 중시한 점에서 한 편의 장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고, 죽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을 담은 시적 산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죽음에 대한 해석이라 했지만, 인간의 유한한 삶 속에서 죽음이라는 현실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내용은 아니다. 삶의 입장에서 죽음을 해석하는 내용이 아니고 삶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상상한 글이랄까. 영혼의 존재를 전제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육체가 영혼의 상태로 접어드는 죽음의 과정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추천사 중에 이해인 수녀가 등장했는데 그 이유를 다 읽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죽음으로 접어드는 과정 전반에서 기독교적인 성찰과 신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욘 포세 작가는 아마도 가톨릭 신자인가.


배경이 눈이 내리는 어두워 오는 북쪽 나라의 숲이며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화자가 등장하므로, 이런 면에서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외롭고 너무 큰 추위를 느낄 수 있다. 종교적 분위기는 살짝 눈 감으면서 홀로됨의 체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일상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그 지루함을 피하여 무작정 방향 없이 마구 차를 몰고 가다가 차가 외딴 곳 움푹한 곳에 쳐박히는데 화자는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화자는 차를 버리고 인가를 찾아 나선다. 숲길을 걷는 중에 해가 진다. 화자는 방향을 잃고 차가 있었던 곳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길을 헤멘다. 여기까지가 중반 정도의 내용이다. 

지루함을 피하려 어디든 마구 내달리고 결국 깊은 숲에서 길을 잃는 상황이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인가 싶다.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다 읽고 바로 책장에 꽂을 수는 없는 책이었다. 천천히 다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리언 반스는 이번 책에서도 소설 속의 화자가 특정 대상을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더불어 사색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 시킨다.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생각 나는 책이었다.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탐구 대상이 둘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화자의 선생인 엘리자베스 핀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선생이 소개한 '배교자 율리아누스'이다. 


1장은 삼십 대인 화자가 성인들 대상 수업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에게 매혹되고 그와 인연을 잇게 되는 내용이다. 

화자가 핀치 교수에게 너무 매료되고 있는 앞 부분에서 소설이 가볍게 느껴졌다. 핀치 교수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난 지성의 힘으로 압도하며 뭔가 목마름이 있어 수업을 찾은 나이든 학생들, 그 중 특히 화자의 정신에 시의적절한 강타를 날리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지점들에 동의도 하고 이해도 되었지만 그래도 독자로 하여금 열광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겸연쩍음의 감정을 갖게 만들곤 했다. 핀치 선생이 비상한 인물로 표현되긴 한다. 노트 없이, 메모를 보는 일 없이 강의하면서 말이 글의 문장구조와 같아 쉼표와 세미콜론이 보이는 듯하고 마무리 문장은 예정된 질서를 따라 의도한 도착점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고리타분함에서 멀고 강렬하게 살아 있는 비유를 비롯한 표현력을 구사한다. 골초인데도 목소리는 듣기 좋고 언제나 비슷한 복장과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수업으로 만난 인연은 20년간 이어진다. 화자가 제안하고 핀치가 수정제안하여 일 년에 두세 번 점심을 함께하는 사이로 정착하는데 여기서부터 나는 이 소설에 안심하고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일 년에 두세 번 75분의 식사 시간 동안 화자는 신중하게 주제를(그때 그때의 이야기거리) 선택해서 자신의 지성을 농축하여 대화를 나누려 노력한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더 똑똑해졌다.' 라고 말하는데 나도 상대에 따라 이런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만 느낌일 뿐이라기 보다 집중과 열의가 화자를 변화시킨 시간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형식의 (때로는 머리에 쥐나는)대화를 애정 플러스 존경의 대상과 나눈 경험, 우리 다들 갖고 있지 않을까? 핀치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엄격한 즐거움'의 일종이다. 강의실이 아니라 식사 중의 대화여서 즐거움에 훨씬 치중하지만.

 

2장은 핀치 교수가 쌓아놓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화자가 쓴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에세이다. 

이 황제가 왜 2장을 통째로 차지하는지만 소개한다.

로마가 기독교 탄압의 시대를 끝내고 선대 황제 콘스탄티누스부터 일신교인 기독교를 인정하여 바야흐로 기독교가 널리 퍼지려는 시기에 등장한 율리아누스는 이전의 다신교 로마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한 인물이다. 그래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린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가 된 이후에는 역사적으로 최후의 이교도 황제라고도 한다.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학자이기도 하여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교수가 이 황제 이야기를 1장에서부터 하는데 이와 관련된 관심은 세계관으로, 가치관으로 꾸준히 수업에서 변주되며 제시되었던 것이다. 

다음 예를 드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교수는 '모노(mono)-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라며 일신교, 일부일처제, 단조로움, 단종 재배, 단일 문화, 모노폴리 등등을 열거한다. 일신교의 세계가 된 서구 세계, 이 엉망진창의 현재를 둘러볼 때, 고대의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가 성공해서 그 질서가 계속 유지되고 다신교의 종교관이 당연한 세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고  탐문해 볼 것을 제안한다. '율리아누스, 그는 기독교라는 재앙의 큰 물결을 막으려 했죠.' 라면서. 

다음의 말도 옮겨 보겠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 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승부를 예를 들고 '그렇지 않았다면-'을 상상해 보기를 권하며 현재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강자에 이입하지 않기를, 생각을 확장시키기를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율리아누스 황제로 집약되는데 교수가 쓰지 않은 책을 화자가 에세이로 쓰게 된 것이 2장이다. 2장의 본 내용은 소개를 생략한다.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여러 역사적,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존의 정보에 추측과 상상을 더해 정리한 글이다.


3장은 1장과 2장을 통과하면서 더 확인할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이해한 바를 정리하고 있었다. 

화자는 교수의 오빠를 통해 듣게 된 정보와 교수가 남긴 자료들과 생전에 했던 말을 다시 곱씹으며 구멍이 있는 부분을 매우려 애를 쓴다. 교수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과정은 화자 자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만남을 이어왔지만 교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의 기억도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면에서 핀치 선생도 역사 속의 인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 교수의 수업을 함께 들으며 어울린 무리 중에 화자가 잠시 사귄 안나 그리고 당시에 교수에게 반감이 심했던 제프 등과 교수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한다. 

안나는 교수에 대한 화자의 사랑에 근사한 탐구가 독백에 그치지 않는지 조심하라고 충고한다.(아마도 남들 눈에는 과장된 헛소리로 보이지 않을지,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겠다.) 화자는 일찌기 핀치 선생이 독백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독백은 극적 장치로서 극단적 인위성을 지니며 그것이 독백의 뛰어난 점, 이라고 했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이 말은 독백이란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매우 의식적인 공들인 표현방식의 하나라는 뜻인 것 같고 매우 의식적이며 공들인 표현방식이라면 화자는 오히려 자신의 작업에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프는 선생이 자기 스타일은 있었으나 고대식의 느낌이며 수업방식은 방종에 가까웠고 선생 본인은 자기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아마추어'가 더 잘 어울리며 아마추어 학자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화자가 선생을 신화화하여 의지한다고 한심한 듯 표현했다. 내 생각에, 선생에 대한 제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구태의연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기존의 틀을 의심하지 않고 그 틀에 맞추어 대상을 평가하는 흔한 외부자의 시선이라서 자신이 선생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가차없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프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전제는 다 경직된 상태이다. 고대식은 안 좋은 것이며 현대식이 좋다는 의심없는 생각, 제프 자신이 연대기식, 이벤트 중심의 문명사 주입식 수업방식을 원하였다는 것, 독창적인 것과 아마추어적인 것은 동시에 발견되기도 하는 근접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게다가 아마추어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서 아마추어 학자가 도태된 것을 당연하게 본다는 것인가 - 이러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정말 안 독창적인 제프이다.


이 글의 앞 부분에 쓴 불만이랄 것도 없는 불만은(사춘기도 아닌데 선생에게 넘 반하네? 근데 선생은 왜 이렇게 금욕적인 외모에다 지적으로 넓고 깊은지 너무한 거 아니냐?) 결국 해소되었다. 옮긴이 정영목 님의 사족을 보면 엘리자베스 핀치의 모델(어니타 브루크너)이 있다고 하니 영국엔 이런 분의 존재가 '너무한 거' 아니었습니다. 모델이 있다고 하니 엘리자베스 핀치의 비상함에 순순히 설득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같이 일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았다. 저자는 생각으로도 말로도 식용 동물 농장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시작할 즈음에는 일터 사람들에게 나처럼 무지한 독자가 궁금해 할 법한 순진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고 고용주든 함께 일하게 된 고용인이든 간에 그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그들을 보며 자신이 배운 바도 함께 얘기하고 있었다. 저자의 그런 노력이 씨알도 안 먹히는 더러운 고용주 놈도 어김없이 있었지만. 

특히 농장의 노동자들 - 관리자급인 한국인과 조선족, 중국인, 동남아시아에서 온 고용인들의 성품과 장기를 언급하고, 출신이든 나이든 묶어서 일반화하지 않고 개별 인간의 생생함을 살려 전달한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완독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외면하고 싶은 하고 많은 세상사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에 드는 분야인데 견디기 힘든 수위는 아닐까 했던 것이다. 일의 내용도 그렇고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의 환경도 그렇고. 그렇지만 직접 현장에서 일한 사람도 있는데 책으로도 못 읽겠다는 건 세상을 살며 알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너무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일터에 있으면서도 같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인, 짬밥(개밥, 음식물쓰레기) 운송을 맡은 김 실장은 조선족 봉휘 아저씨와 태국인 수리얀에 대해 국민성 운운하며 게으르다고 말했고, 저자는 이렇게 서술했다. '나는 김 실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국민성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가 봉휘 아저씨, 수리얀과 일주일만 같이 일해보면 그들이 자신 못지않게 부지런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될 텐데.' 라고. 앞서 봉휘, 수리얀과 일하고 대화하는 장면들을 읽은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김 실장 보다는 편견에서 벗어난 인간이 되었지 않겠는가. 아마도 김 실장은 어느 자리에선가 내가 걔들하고 일해 봐서 아는데~라며 또 되도 않은 썰을 풀지도 모르겠다. 


문체라는 단어를 쓰기보다 말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어울리는 편안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저자는 하루 일과 후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 일기가 이 책의 원본이었을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 무거운 내용을 각오했지만 저자는 쉽고 유머까지 겸비한 말투로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을 중화시키고 있었는데, 예를 하나 들면, 개 농장에서 짬밥 수거를 맡은 사람이(김 실장) 요크셔테리어를 13년 키우다 보냈다는 말을 하며 애틋해 하자 저자는 그러면 이 일이 부담스럽지 않은지 묻는다. '아아니! 그거는 애완견이고 이거는 식용으로 키우는 거니까. 두 개는 완전히 다른 거야.' 라고 한다. 참 자의적이다. 나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구분해서 목적을 정하고 '다르다' 라고 정리한다. 이 부분에 저자가 주를 달아 놓았다. [주 : 역사학자 키스 토마스는 "애완동물이란 집 안에 들이고 이름을 붙이며 절대 먹지 않는 대상"이라고 정의했다. 또 인류 동물학자 제임스 서펠은 애완동물에 대해 "우리와 함께 살지만 뚜렷한 역할은 없는 동물"인 것이라 했다. 학자들의 견해에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어째선지 두 경우 모두 백수로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시절의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이다.]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쉽고 편하게 구분하다 보면 이렇게 애완동물=백수가 되기도 한다. 


내용은 먼저 닭 그 다음이 돼지 마지막이 개 농장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의 유머는 줄고 분위기는 무거워진다. 보통 새로운 농장에 취직해서 컨테이너 숙소에서 보내는 첫 날 밤을 전하는 글에선 외롭고 두려운 정서가 느껴졌다. 이 숙소라는 곳의 형편을 보면, 켜켜이 쌓인 먼지구덩이 바닥 한켠에 이불 비슷한 것을 깔고 몸을 누이면,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마지막 농장에선 이 정서가 강하게 느껴졌다. 저자의 개인적인 아픔도 슬몃 드러나고. 그래도 며칠 시간이 지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대화의 재미나 식사의 즐거움 같은 것으로 처음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희석되는데 마지막 농장은 고용인조차 본인 뿐이었다. 사장과 고용인인 저자 두 사람이 농장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개 농장을 두 군데 경험하는데 닭이나 돼지와 달리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곳의 환경은, 경험할수록 저자가(독자도) 감당할 수준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할수록 내면에 상처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적응할수록 영혼이 찌그러져 간달까. 개 농장의 특수함은 모든 조건들이 맞물려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기본 조건이 법적으로 식품으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점과 음식물 쓰레기를 사료로 쓴다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가 닭이나 돼지 농장과는 비교 수준을 훌쩍 넘는 험악하고 혐오스러운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제목만 봤을 때 동물권에 초점을 맞춘 책인가 생각했는데 본문은 이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구조와 구체적인 일의 내용 그리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비중이 컸다. 물론 저자가 한 일의 내용을 상세하게 전개시킨 부분을 읽다 보면 동물들의 환경에 경악하게 되는 지식은 자연히 따라온다. 필요한 통계 자료 같은 경우 주를 달아 보충하고 있었다. 본문만 놓고 볼 때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이 두드러지는 책은 아니다. 마지막 40페이지 정도 되는 마무리 파트에 가서야 저자는 이 모든 경험을 따라온 독자가 보기에 결코 과하지 않은 소박한 방식으로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채식을 하자는 주장은 없다.(저자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하는 점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우리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지금과 같은 농장 시스템에 대한 의심을 해 보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는 너무 단순한 결론 아닌가를 비롯해서 글쓴이의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가질 여지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성격이 그러하다. 아마도 기대하는 바와 다르다면 그에 부응하는 다른 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글을 쉽게, 솔직하게 쓰며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객관화에 저자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어 한층 신뢰하며 다른 책을 기대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른의 죽음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도시의 여러 명 화자를 통해 동독 사회를 그림. 호른의 죽음을 중심으로 연결된 화자들이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모순과 아픔을 드러낸다. 나치의 시대와 공산화된 동독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밀고로 비극을 만드는데, 정당한 듯 진행되는 표면적 삶에 대항하여 ‘기억‘(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치우성이라는 열일곱 살 소년의 성장 소설이자 시대물이다. 공간은 대만, 시간은 1970년대 중반에서 80대 중반 십 년 정도인데 이는 화자인 치우성을 따라가는 시간이고 이 소설을 추리물로 분류하게 하는 중심 사건은 역사적 굴곡을 품은 긴 세월을 배경으로 한다. 국민당 소속으로 중국에서 건너 온 예치우성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살아온 시간은 중일전쟁, 내전, 대만으로 와서 정착하기까지 이어지고 이들 세대의 삶은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그대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대를 이어 전해지는 핏줄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매우 활기차고 박력 있고 에너지가 충만한 소설이었다. 이웃이나 가족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인지 다툼인지 경계가 애매한 말들과 흔한 웃옷을 벗어젖히고 배를 내놓은 거리의 아저씨들과 날라리 친구로 인해 엮여서 질주하게 되는 사건들과 번화가 노점상 거리에서의 첫사랑과 데이트, 사람을 피해 날아다니는 닭과 출몰하는 바퀴벌레 등등이 글을 읽는 중에 청각적으로 뭔가 와글와글시끌벅적했다. 지금 나열한 이런 장면들에서 활력이 느껴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장면들 속에 잔잔히 녹아 있는 폭력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장면들의 기저에 다 폭력이 깔려 있거나 드러내놓고 폭력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런 바탕에 깔린 긴장이 일상을 부글거리고 과열되게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냥 일과 중 사소한 실수에도 부모나 선생은 아파야 배움이 따른다며 매질을 하고, 학교 급우들 간에도 눈만 잘못 마주치면 맞짱뜨기를 해야 하고, 군대 가서도 체벌은 기본이다. 소설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주인공은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매우 중요한 각오를 하기도 한다. 죽고자(죽이고자) 했더니 제3의 손에 의해 살아났다는 식으로 당사자 둘은 서로에게 직접 피를 내지 않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긴 하는데, 이 소설 전반에서 폭력의 사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위에 쓴 내용들 때문에 현재 나오는 소설과는 다른, 80년대나 90년대의 소설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15년에 나왔다고 한다. 개인이 세대로 이어지는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한다는 정서도 그렇고 소설 전반에 과잉된 가족 중심 서사는 요즘 소설이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만은 80년대 중반까지 계엄령이 수십 년 계속되었으므로 그 즈음엔 생활 깊이 폭력성이 내면화, 일상화 되어 있었음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문장의 주저없음과 위에서 말한 활기와 유머 등이 가독성을 높였다는 것은 중요한 장점이라고 봤다. 

중심 사건이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물려 있다는 점은 작품에 무게감을 주어 호평하게 되는 큰 이유일 듯하다. 

그런데 일본 평단의 반응은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70년대 대만이 배경이라 가능했을 혈연의 강조와 폭력적 문제해결이라는 배포 있어 보이고 거침없는 요소들이 최근 시점에서 이 소설을 오히려 신선하게 느낀다거나 보기 드문 소설적 재미가 있다는 평을 얻을 수 있게 한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균형을 잘 잡고 중국, 대만, 일본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듯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 내전은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먹을 거 주는 쪽에 붙어서 목숨을 이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익숙한 이야기로(낮에는 경찰, 밤에는 산사람) 많은 비극을 불러왔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침략기에 일본에 협조한 쪽도 같은 무게로 취급하는 것은 의아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명백한 원인을 지우고 모두 개인사로, 이 역시 개인적인 비극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모 인물의 앞뒤 설명을 들으면 오히려 정당성을 주는 느낌도 들었다. '가정을 지키고자 한 아버지'....그러면 역사의 무게는 어디로 가는지. 작가는 대만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내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균형잡힌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어서 읽는 동안은 재미있었지만 다 읽고 생각해 보니 찜찜함이 없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