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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줄리언 반스는 이번 책에서도 소설 속의 화자가 특정 대상을 탐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더불어 사색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 시킨다.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생각 나는 책이었다.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탐구 대상이 둘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화자의 선생인 엘리자베스 핀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선생이 소개한 '배교자 율리아누스'이다.
1장은 삼십 대인 화자가 성인들 대상 수업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에게 매혹되고 그와 인연을 잇게 되는 내용이다.
화자가 핀치 교수에게 너무 매료되고 있는 앞 부분에서 소설이 가볍게 느껴졌다. 핀치 교수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난 지성의 힘으로 압도하며 뭔가 목마름이 있어 수업을 찾은 나이든 학생들, 그 중 특히 화자의 정신에 시의적절한 강타를 날리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지점들에 동의도 하고 이해도 되었지만 그래도 독자로 하여금 열광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겸연쩍음의 감정을 갖게 만들곤 했다. 핀치 선생이 비상한 인물로 표현되긴 한다. 노트 없이, 메모를 보는 일 없이 강의하면서 말이 글의 문장구조와 같아 쉼표와 세미콜론이 보이는 듯하고 마무리 문장은 예정된 질서를 따라 의도한 도착점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고리타분함에서 멀고 강렬하게 살아 있는 비유를 비롯한 표현력을 구사한다. 골초인데도 목소리는 듣기 좋고 언제나 비슷한 복장과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수업으로 만난 인연은 20년간 이어진다. 화자가 제안하고 핀치가 수정제안하여 일 년에 두세 번 점심을 함께하는 사이로 정착하는데 여기서부터 나는 이 소설에 안심하고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일 년에 두세 번 75분의 식사 시간 동안 화자는 신중하게 주제를(그때 그때의 이야기거리) 선택해서 자신의 지성을 농축하여 대화를 나누려 노력한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더 똑똑해졌다.' 라고 말하는데 나도 상대에 따라 이런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만 느낌일 뿐이라기 보다 집중과 열의가 화자를 변화시킨 시간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형식의 (때로는 머리에 쥐나는)대화를 애정 플러스 존경의 대상과 나눈 경험, 우리 다들 갖고 있지 않을까? 핀치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엄격한 즐거움'의 일종이다. 강의실이 아니라 식사 중의 대화여서 즐거움에 훨씬 치중하지만.
2장은 핀치 교수가 쌓아놓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화자가 쓴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에세이다.
이 황제가 왜 2장을 통째로 차지하는지만 소개한다.
로마가 기독교 탄압의 시대를 끝내고 선대 황제 콘스탄티누스부터 일신교인 기독교를 인정하여 바야흐로 기독교가 널리 퍼지려는 시기에 등장한 율리아누스는 이전의 다신교 로마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한 인물이다. 그래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린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가 된 이후에는 역사적으로 최후의 이교도 황제라고도 한다.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학자이기도 하여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교수가 이 황제 이야기를 1장에서부터 하는데 이와 관련된 관심은 세계관으로, 가치관으로 꾸준히 수업에서 변주되며 제시되었던 것이다.
다음 예를 드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교수는 '모노(mono)-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라며 일신교, 일부일처제, 단조로움, 단종 재배, 단일 문화, 모노폴리 등등을 열거한다. 일신교의 세계가 된 서구 세계, 이 엉망진창의 현재를 둘러볼 때, 고대의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가 성공해서 그 질서가 계속 유지되고 다신교의 종교관이 당연한 세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고 탐문해 볼 것을 제안한다. '율리아누스, 그는 기독교라는 재앙의 큰 물결을 막으려 했죠.' 라면서.
다음의 말도 옮겨 보겠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 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승부를 예를 들고 '그렇지 않았다면-'을 상상해 보기를 권하며 현재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강자에 이입하지 않기를, 생각을 확장시키기를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율리아누스 황제로 집약되는데 교수가 쓰지 않은 책을 화자가 에세이로 쓰게 된 것이 2장이다. 2장의 본 내용은 소개를 생략한다.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여러 역사적,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존의 정보에 추측과 상상을 더해 정리한 글이다.
3장은 1장과 2장을 통과하면서 더 확인할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이해한 바를 정리하고 있었다.
화자는 교수의 오빠를 통해 듣게 된 정보와 교수가 남긴 자료들과 생전에 했던 말을 다시 곱씹으며 구멍이 있는 부분을 매우려 애를 쓴다. 교수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과정은 화자 자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만남을 이어왔지만 교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의 기억도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면에서 핀치 선생도 역사 속의 인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 교수의 수업을 함께 들으며 어울린 무리 중에 화자가 잠시 사귄 안나 그리고 당시에 교수에게 반감이 심했던 제프 등과 교수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한다.
안나는 교수에 대한 화자의 사랑에 근사한 탐구가 독백에 그치지 않는지 조심하라고 충고한다.(아마도 남들 눈에는 과장된 헛소리로 보이지 않을지,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겠다.) 화자는 일찌기 핀치 선생이 독백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독백은 극적 장치로서 극단적 인위성을 지니며 그것이 독백의 뛰어난 점, 이라고 했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이 말은 독백이란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매우 의식적인 공들인 표현방식의 하나라는 뜻인 것 같고 매우 의식적이며 공들인 표현방식이라면 화자는 오히려 자신의 작업에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프는 선생이 자기 스타일은 있었으나 고대식의 느낌이며 수업방식은 방종에 가까웠고 선생 본인은 자기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아마추어'가 더 잘 어울리며 아마추어 학자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화자가 선생을 신화화하여 의지한다고 한심한 듯 표현했다. 내 생각에, 선생에 대한 제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구태의연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기존의 틀을 의심하지 않고 그 틀에 맞추어 대상을 평가하는 흔한 외부자의 시선이라서 자신이 선생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가차없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프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전제는 다 경직된 상태이다. 고대식은 안 좋은 것이며 현대식이 좋다는 의심없는 생각, 제프 자신이 연대기식, 이벤트 중심의 문명사 주입식 수업방식을 원하였다는 것, 독창적인 것과 아마추어적인 것은 동시에 발견되기도 하는 근접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게다가 아마추어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서 아마추어 학자가 도태된 것을 당연하게 본다는 것인가 - 이러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정말 안 독창적인 제프이다.
이 글의 앞 부분에 쓴 불만이랄 것도 없는 불만은(사춘기도 아닌데 선생에게 넘 반하네? 근데 선생은 왜 이렇게 금욕적인 외모에다 지적으로 넓고 깊은지 너무한 거 아니냐?) 결국 해소되었다. 옮긴이 정영목 님의 사족을 보면 엘리자베스 핀치의 모델(어니타 브루크너)이 있다고 하니 영국엔 이런 분의 존재가 '너무한 거' 아니었습니다. 모델이 있다고 하니 엘리자베스 핀치의 비상함에 순순히 설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