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일 주일 -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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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불행하게 보이는 사람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불행의 원인은 '소통의 부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불행은 주인공들 자신의 처지에서 드러나기 보다는 주인공이 호기심인지 관심인지의 시선으로 지켜보았던 주변 인물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미쳐버렸거나 견디지 못 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주인공은 아직 불행에 몸 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금방 닫쳐올 불행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주인공의 사적인 생활을 자세히 모르고 그래서 개입하지 않지만 곧 주인공의 일방적인 자기 세계는 깨어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어느 심사위원의 표현처럼 상쾌하게 다가오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방적인 생각으로 구축된 인물의 세계란 결국 유예된 시간 속의 세계일뿐이니까요. 인물이 불행과 불행 사이에서 잠시 휴가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독자의 시선에는 그 한가로움이 무지의 소산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입을 통해서도 미루고 있는 시간의 불안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요. 

 

‘어떤 때에는 내 생각이라는 것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소를 일으길 만큼 우스운 것이어서 적당한 때가 되면 한 번에 무너지고 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아주 막연하고도 깊은 공포였다. 언젠가 꼭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것이었다....언젠가, 때가 되면 불행한 일이 찾아올 것이다.’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미치거나 죽지 않고 주인공과 그의 연인은 어떻게 소통하는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전경린 같은 작가가 이 소재와 관련해서는 문을 통과한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오히려 그 이전의 고요한 행복감을 ‘가벼이’ 다루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문학동네 작가상에 대해 갖고 있는 기준이 형식의 새로움이나 내용의 참신함이라면 그 기준은 선발된 작품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고 또, 기준에 강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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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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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야?

 어떤 체제를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체제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집단이다.   교실에서는 교사가 될 것이고 학교에서는 교장이,  회사에선 오너가,  지금 우리나라는 삼성의 오너들 쯤?.  그 체제의 대부분 구성원들은 불편하고 힘들고 때로는 감당이 안 되어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서기위해 상황을 감수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종류의 체제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인간성에 비추어 볼 때 부당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여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세를 늘이거나 규합하거나 집단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질서는 또 하나의 억압체제일뿐이니까.  그래서?  그렇다면 이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지?  이들은 그저 샛길 찾기에 골몰한다.  역사의 대로를 벗어나 자신의 숨통을 틔어 줄 샛길을 찾는 것.   역사의 주역들이 자신의 주장을 위해 타인을 고생시키거나 파멸시키기도 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 길을 모범으로 삼는데 반해 때로 이들의 샛길찾기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파괴할 수 없는 사람이 저절로 자신을 훼손하게 되는 것.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은유로 이 책을 읽기에는 작가의 삶이 우리를 너무나 압도하고 있다.  삶이 작품을 앞지르고 있어 작품은 그저 삶의 자료 정도로만 느껴질 때, 독자가 할만한 말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삶 앞에, 작품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은 눈길에서 각혈을 하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 샛길이 어디쯤인지 고통스럽게 던졌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되돌려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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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01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샛길이라......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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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이라는 나이.   상상할 수 있는가.   수시로 '확, 그만 살아버릴까' ,   '몇 년 정도만 더 살아주자.'  이러면서 오욕의 시간을 삼키곤 하는 당신에게  육십도 칠십도 팔십도 아닌 구십이라니.   왜?  마르께스는 구십 노인이 필요했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한다는 것은 오래 통용되어온 거짓말이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알고도 속아주는, 속기로 하는 사람도 있다.  섹스는 위안일지언정 사랑의 본질과 부합하는 행위는 아니다.   최소한,  사랑을 인간이 지닌 최고의 이타적인 존재의 모험이라는데 동의하면서 섹스의 본질을 대입시켜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위안이 사랑보다 못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흔은커녕 그 나이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당신에게 삶은 고단하고 불안하고 불쾌함 투성이인데?   그리고 전존재를 걸어야 하는 사랑은 차마 제발로 걸어가 마주볼 용기가 나지는 않는 낳자마자 유기한 자식과도 같은 것인데?   평범하고 조금밖에 못 산 우리에게 위안은 너무 소중하겠지.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난 무용지물이오.'  그러자 해방감에 가득 찼다고 한다.  아흔...그것은 섹스할 수 없는 나이라고 추정해 본다.  그래서 비로소 오해없이 사랑을 대면할 수 있는 나이라고. 

   '백년동안의 고독' 의 기묘하고 막막하고 울림이 있던 읽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르께스 자신의 노년에 대한 예찬으로 읽히기도 하였고  흔해빠진만큼 진지하게 말하기가 나날이 어려워지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대작가의 가공할 시간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을 옮겨본다.

  ' 아흔 번째 생일에 델가디나의 행복한 침대 속에서 살아 있는 몸으로 눈을 뜨자,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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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1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의 옮겨놓으신 문장 기가 막힙니다.
종이라는 분이 계셨군요.
자명한 산책님 따라 와봤습니다.
리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제 마음에 들어봐봤자겠지만!^^)

종이 2005-05-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비해 북리뷰는 왠지 버겁고 부담이 되어서 거의 안 쓰고 삽니다만 좋게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책 동네에서 만나 반갑습니다.
 

 

   

  '신파가 뭐 어때서라고 말할 수 있는 감독도 있어야 한다.'고 류승완 감독은 말했다.(조선일보 기사 중)

 사실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었는데 감독이 했다는 위의 말을 기사를 통해 읽으며 조금 적어 보기로 한다. 나는 영화와 관련된 잡문들은 몇 권 읽었지만 제대로 된 이론서는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그래도 영화를 봐 온지 수십 년의 세월이 있어서 내 나름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겨나 있는 것 같다. 그 취향이라는 걸 정리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좋아하는 장르나 감독이나)  모르지만.  뭔가가 내가 본 영화들을 걸러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영화 '주먹이 운다.'에 대해 개봉이후 이건 '신파'이고 그게 뭐가 문제인가, 라고 감독 스스로 들이댄(?) 것이 씁쓸한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거 신파아냐.' 했을 때 그 말은 신파 자체가 좋다, 나쁘다,의 의미를 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류승완 감독에게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 못 미쳤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었을까. 뜨겁게 가는 거 좋지만 사실 누군들 오늘 당장에라도 잠들기 전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저마다의 곡절이 없을까.(이 말은 영화 속에서 천호진이 맡은 식당 주인이 뱉는 대사에도 나온다.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어' 든가?)  그거 그대로 보자고 극장을 찾지는 않는다. 집에서 인간시대류 프로그램을  텔레비젼 통해서 보면 되는 것이지.

 이전의 영화가 보여 주었던 전달 방법의 새로움과 속도감이 이런 신파성 내용과 어우러져 어떤 결과물이 나올 것인가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성의 있는 자기 평가를 제시하기에는 이 작품과의 필요한 거리가 생길 시간이 더 흘러야겠지만 좀 말이 과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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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을 잡다'. 

이 영화는 '겉멋'에 대한 집중탐구이다.  '겉멋'에 집착하는 자의식에 대한 탐구이다.

선우는 대단히 겉멋을 부리며 살고 있고 거기에 집착한다. 자신이 결국 양아치이며 해결사라는 것을 잊고 부정할 정도로. 보스는 자기 주제를 잊어가는 선우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선우는  마지막에 보스에게 '왜'라고 묻는다. 왜 자신을 여기에까지 오도록 만들었느냐고. 보스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있을 때 맞은 편 유리에는 선우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선우는 자신을 본다. 여전히 멋 있다. 비록 흠집이 여기저기 나 있긴 해도 총을 들고 선 자신의 모습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멋 있다. 살며 진정한 멋스러움을 차지할 수 없다면 겉멋이라도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가야 할 것이다.

보스의 여자가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선우의 뒤통수. 아랑드롱을 그대로 베낀(아마 김지운감독은 '암흑가의 -' 시리즈 같은 테잎을 건네며 아랑드롱의 스타일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의 뒤통수는 영화에서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두 번 되풀이 되는 뒤통수 장면에서 두 번째엔 카메라는 선우의 머리를 통과하여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비춘다. 그는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얄팎한 겉멋으로 유지되는 그의 삶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달콤함'이다.

케잌이나 달고 찐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 시간과 돈과 노력과 의지와 스승과......뭐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주어야 한다. 즉 인생이 달라야 되는 것.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달콤함'인 것이다.

그런 원칙을 개폼으로 무시하려고 하다니. 의식하지 못했다해도 어쨋든 훼손하려 하였으니 '개폼'의 원칙과 원리에 빠삭한 오야가 보기엔 징벌감이다.

모든 '달콤함'에는 댓가가 따른다. 크든 작든.

선우도 댓가를 치루었다. 아름다움에 홀릴 줄 아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홀린 댓가.

아름다움에 홀린 자, 예술에 홀린 자. 모두 댓가를 지불할 결심을 단단히 하고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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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5-04-0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해석은 정말 생각지 못했던 해석이네요. 전 반전으로 인해 받은 충격으로 인해 아직도 정신이 어질한데요...^^

종이 2005-04-0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님. 폐허비스므리한 제 방에 오셔서 댓글을 남겨 주시다니 미안하고 부끄럽네요. 게으르고 느려서 글쓰기를 미루거나 타이밍을 놓쳐서 관둬버리거나 뭐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볼거리 없는 방이 되었어요.

LAYLA 2005-04-0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녜요 영화평을 잘 하시는 분 같은데요? ^^ 앞으로도 자주 들를게요...^^ 볼거리는 지금도 채워나가시고 계시니...^^

로드무비 2005-05-1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멋이라도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