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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클래식 - 우리 시대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
정민 외 36명 지음, 어수웅 엮음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다른 사람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은 항상 재미있다. 온라인 서재로는 알라딘 서재를 비롯해 다른 인터넷서점의 서재도 그렇고 포털에서 기획한 명사들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온라인 서재보다 좀더 기획이 가미된 '책에 관한 책'들도 좋아한다. 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서지번호 029로 시작하는 도서들의 서가에서 길을 잃고 책을 보던 경험은 지금도 두근두근 새로운 기대감과 떨림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일간지 주말판의 북센션도 매주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펴든다.
다른 사람들의 의식이 확장된 경험을 간접적으로 읽는 것이 흥미롭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보다 책에 대한 관심이다. 책에는 사람들이 나오고 책을 읽으면 저자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만나게 된다.
명사 37명이 꼽은 고전과 이유, 그리고 고전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덧붙여진 글이다. 여기에 꼽힌 고전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볼 수 있을 만큼 추천자들의 이야기와 해설이 재미있고 편집도 훌륭하다. 그런데 어째 명사들의 이야기톤이 대부분 비슷해서 한 사람이 작성한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고전은 정말 그 명성에 걸맞는 값어치를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이 책을 통해서 관심을 갖게 된 책들을 꼭 읽어보고 싶다.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1851~185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 ~1880
《세 자매》 안톤 체호프, 1900
《토지》 박경리, 1969~1994
《사기》 사마천,
《소유나 존재냐》 에리히 프롬, 1976
《총, 균, 쇠》 제러드 다이아몬드, 1998
p** 마흔을 불혹의 나이라고 한다. 쉽사리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과 조화를 이룬 성숙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현실과의 타협을 가리키기도 한다.
p** 롤랑 바르트는 “플로베르에 이르러 글쓰기는 그 내용과 형식의 대립 자체가 사라진다. 글을 쓰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차이가 사라지며 글쓰기는 어떤 총체적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플로베르의 문장들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사물이 된다.”라고 했다.
p**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탄 이 위대한 극작가의 영감의 원천은 불행한 가족사였다. 깊고 어두운 우물 속에서 외롭에 물을 길어올리듯 그의 작업은 고독한 내면과의 투쟁이었을 것이다.
p** 자유는 죄를 낳고 죄는 벌을 낳는다. 이건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부산에 이른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죄의 단계에서 놀라운 가능성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 인류 문명의 기초가 여기에 있다는 건 바로 이 두 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간 수많은 살육과 보복 행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절멸하지 않고 21세기까지 이른 이유 역시 바로 이 두 개의 가능성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그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언이다. 그래서 인간은 파괴하는 자유를 선택한다. 그것도 그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인간은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 인류는 이 세 개의 명제를 밟고 서 있다.
p** 《변신》은 벌레라는 실체를 통해 현대 문명속에서 기능으로만 평가되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서로 유리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타성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정말 내 삶이 단지 한 마리의 벌레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섬뜩섬뜩 놀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검은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이다.
p** 언젠가 우리 고전을 잘 읽으려면 중국 고전을 널리 봐야 하는데 한 종의 책으로 풍부한 지식을 듬뿍 얻을 수 있는 책이 <<사기>>이니 꼭 읽어보라고...
p**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여기서의 쾌감은 위험 부담을 전가하고 얻는 쾌감이다. 즉 일상생활 중에서는 배출될 수 없었던 감정의 격한 스릴을 비극이라는 문예장르의 안전판 위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이라느 장르가 없었다면 현실에서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였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1년에 한두번씩 디오니소스 제전 때 비극을 관람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그들의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통제할 수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