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쪽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일까.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이번에 예수는 '고집'을 겨냥한다.
고집이 뭘가. 내가 세운 '잣대의 성벽'이다. 사람들은 내 땅을 지키기 우ㅟ해 성벽을 쌓는ㄴ다.
그 성벽이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아군에게는 성문을 열고 적군에게는 성문을 닫는다.
그래야 내 땅이 지켜지니까.
예수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그건 성벽이 아니라 감옥이다. 신의 속성은 이 우주에 가득하다.
이를 외면한 채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감독이다. 산상설교의 메시지는 이처럼 역설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129족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해라"라고 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창고를 채우는 것, 그건 바로 집착이다.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가득 찬다. 집착을 비울 대면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 예수는 그저 소박하게 살라고,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 비로소 '없이 계신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의 창고를 비워야 하느님 나라와 통하게 된다.
'가난한 마음'이 곧 '하느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아무런 집착도 달라붙지 않는 자리. 거기다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163쪽
배추잎은 처음에는 빳빳하다. 고집이 있고 에고가 있다. 그런데 소금과 만나는 순간 풀이 죽는다.
왜 그럴까. 에고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176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선인이고
내게 못하는 사람은 악인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이다.
나의 이익, 나의 철학, 나의 잣대가 기준이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이쪽은 선, 저쪽은 악으로 나뉜다.
아담과 이브도 그랬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에는 선악이 없었다.
...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비로소 인류 최호의 부부 싸움도 벌어졌으리라.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 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에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놓은 숱한 선들이 뭉친 것이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선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에덴동산을 만날 테니까.
262쪽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자는 결핍을 채우려면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맛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습니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습니다. 성경에선 하느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 관점)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관이나 교리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는 굳이 산성설교를 설하지 않았을 터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관점'을 설하지 않았다.
삶의 사막에서 허덕대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는 건 관점이 아니다. 대신 예수는 생수를 건넸다. 마음의 버튼을 누르고 마음이 작동하게 하는
진짜 물이다. 거기에 길이 있다.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진작에 이렇게 표현해 주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십자가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나의 자아라는 것 말이다.
가끔 경험하기는 한다. 지금 이렇게 힘든 이유가 내 고집 때문이라는 걸 깨닫을 때가 있다.
내가 그걸 좀 포기하면 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포기를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거나 주변의 평화를 위해서 특별히 희생하는 차원에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보편 인간에게 있는 에고를 죽이는 과정이라는 걸 이해했다면 좀더 쉽게 그 시기를 보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오셔서까지 전하고 보여줬어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지금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 오해하고 있다고, 그게 아니라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직접 말씀해 주시기 위해 굳이 달려오셨을 것 같다.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해 주셨어야 할 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성경을 읽고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데 좀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무척 적절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