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에서 휴먼으로 - '잘' 나이 들기 위해 알아야 할 휴먼 12계명
김흥숙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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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를 지나다가나 '우먼'이란 단어가 직감적으로 나를 잡아끄는 것을 느껴 꺼내 들었는데 서해문집에서 발행한 책이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책 중에서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바로 펴서 읽기 시작했다.

 

저자인 김흥숙 님은 지금은 나이 지긋한 언론인으로, 코리아타임즈, 연합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오래 하셨고, 퇴사 후 칼럼리스트, 번역가, 작가로서 활동하며 재능을 통해 사회의 목탁 언론인의 역할을 올곧게 해 나가고 계신 분이다. 블로그 http://www.kimheungsook.com/ 도 운영하시길래 들어가봤더니 과연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고 계신다. 한겨레 김선주 님이나 CBS 유인경 기자 같은 분을 연상시키는 시대의 촛불 한 자루 같다.

 
책은 중년, 그러니까 40대 전후에서 60대 정도의 여성을 타깃 독자로 쓴 책이다. 여성의 역할이 가정 안에서만 규정되는 것을 전제로 키워졌던 우리나라의 많은 여성들은 아직도 보부아르가 말한 ‘제2의 성’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이런 사람들에게 성 역할의 경계를 넘어 ‘제3의 성’인 진정한 휴먼으로 살아가길 권하는 글이다. 성 역할의 구분을 철폐할 것은 남성들에게 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지만 저자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대로 여성 안에서부터 그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야 미국판 강경 페미니스트라 이런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될만큼 진작에 성 역할의 구분은 간단히 뛰어 넘은지 오래이지만 다른 여성들의 각성 수준, 즉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웠는데 이분의 조언을 찬찬히 읽어보자니 아직도 우먼과 맨의 범주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다소 이해도 되고 우리 사회의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보부아르와 버지니아 울프가 일깨워 준 깨달음에서 시작하여 외모지상주의와 자본주의의 세례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 결혼과 비혼에 대한 진솔한 나눔,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 일인지 이야기를 나눠 주신다. 결국은 인생의 모든 맥락에서 우먼에 갇히지 말고 휴먼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인생을 후회없이 살 수 있는 길임을 아름답고 잔잔한 필체로 전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나처럼 늘 전투적인 모드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렇게 한적한 공원에서 찬찬히 대화를 나누듯이 풀어주시는 것 같아 와닿는 내용이 무척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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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예나 지금이나 아이 같은 저는 종이와 펜을 들고 그-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가서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많은 유명 인사들의 사인을 받아 보았지만, 사인을 해달라는 제게 그때 그처럼 반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나도 너의 사인을 받고 싶은데… 내겐 종이가 없네.”라고 했으니까요. 저는 지금도 그가 해 준 사인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p.33

권교수–명지대 권인숙 교수-는 조 변호사–조영래 변호사-가 “실용적이고 가장 타당한 도덕적 기준 외에 허영심이나 명예욕, 고정관념에서 빚어지는 군더더기들은 단칼에 잘라내는 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래서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의견을 주장하면 그 고민이나 주장 속에 담겨 있는 편견이나 고정관념 등의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 내 주셨고, 가장 상식적 기준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하셨다” (권인숙, 《선택》, 웅진닷컴, 2002, 재인용)

 
p.54

제도화된 종교란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남들이 마련해서 계승해 온 해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사유 능력을 잃어버린 상대평가의 고수들은 수학 공식을 받아들이듯 의문 없이 종교를 받아들입니다.

 
p. 63

사실 우리나라처럼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인물을 선택할 때 보던 네 가지 조건 ‘신언서판(身言書判)’에도 외모를 뜻하는 신수가 들어 있고, “고사상에 놓는 돼지도 얼굴 보고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p.94

결혼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지만 결혼과 인격, 혹은 결혼과 행복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습니다.

 
p.105

20세기 초 천재 작가 이상이 소설 《실화失花》에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고 썼듯이, 관계의 유지∙발전을 위해서 얼마간의 비밀은 꼭 필요합니다. 부부 사이에서조차.

 
p.110

전쟁터에서 피는 꽃처럼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p.124

(대학 졸업 후 12년간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중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 한 후..) 하는 수 없이 제가 왜 그만두는지 털어놓았습니다. 그건 제가 ‘좋은 기자’가 되느라 바빠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을 문득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 노릇 12년이 되어 가던 어느 날 문득, 기자로선 유능한 기자가 되었지만 사람으로선 제가 원치 않는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일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바람이 들어 기사 못 쓰는 동료들을 우습게 여겼고,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며 대접을 받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얼굴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에 현혹되어 제가 정말 잘난 줄 알고, 제 직함에 대한 대접을 제 인격에 대한 대접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칭찬이 사람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p.147

일본에선 은퇴한 후 아내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남편을 ‘소다이고미そだいでみ’ 또는 ‘누레오치바めれおちば’라고 부르는데, ‘소다이고미’는 동사무소에 친고를 하고 버려야 하는 냉장고나 소파 같은 대형 폐기물을 뜻합니다. ‘누레오치바’는 ‘젖은 낙엽’이라는 뜻으로, 줄곧 아내를 따라다니는 남편이 신발 바닥에 붙은 ‘젖은 낙엽’ 같다고 해서 이런 표현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p.158

인간의 역사는 고통을 위대함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없었다면 자신 속의 위대함을 끌어내어 역사에 기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은 자신 속 위대함을 발견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당사자나 주변인들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겠지만요. 안락이 낭비와 태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어두운 인생에도 무수한 반짝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도 ‘더 나쁠 수 있었다’고 깨닫는 순간 견딜 만한 것이 되고 행복의 실마리가 됩니다.

 
p.161

자유로운 사람은 밥을 혼자 먹든 여럿이 먹든, 보석이나 명품이 있든 없든 행복합니다. 영영 마르지 않는 시내 하나를 알고 있는 사막의 낙타처럼 말입니다.

 
p.175

사회적 존재로서 남자와 여자가, 또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을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쏟아 부어 공동선에 기여할 때 내 인생은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제1의 성’과 ‘제2의 성’을 벗어나 ‘제3의 성’으로 자신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자유는 법과 제도를 통해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자유를 누리는 건 개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p.191

영국 속담엔 “걱정이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흔들의자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 움직임으로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는 말이 있고, 터키엔 “나무를 파괴하는 것은 벌레들, 사람을 파괴하는 건 걱정”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p.203

저 자신은 죽음을 출산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스물일곱 살에 아기를 낳을 날이 다가올 때 두려운 마음이 들면,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낳아 오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두렵지 않았습니다.

 
p.210

지금 우리 사회가 성 에너지와 남성적∙여성적 가치에 탐닉하고 집착하며 인간적 추구를 게을리 하게 된 것은 죽음을 잊게 하는 생활과 환경의 탓이 큽니다. 무덤이 있는 마을의 사람들은 적어도 가끔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가끔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큰 욕심을 부리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죽음을 한 번 생각할 때마다 나를 맑히니까요.

 
p.217

<개그콘서트> 중 ‘남보원’의 남성 출연자들의 구호를 보면 ‘요즘 젊은 여성들’의 모순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애프터는 필요없다! 계산서나 들고 가라!

들고 가라 들고 가라! 카운터는 왼쪽이다!

네 잘못엔 울면 되고! 내 잘못엔 뺨 때리냐!

울면 되냐 울면 되냐! 연기자로 데뷔해라!

네가 울면 천상 여자! 내가 울면 찌질이냐!

애교 떤다 치지 말라! 네 주먹에 눈물 난다!

벗어 달라 강요 말라! 가을밤엔 나도 춥다!

나도 안에 반팔이다! 체지방은 네가 많다!

이런 여성들,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여성들이 있는 한 진정한 남녀평등은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어쩌면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그러나 남녀가 정말로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법률∙제도∙풍습∙여론,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할까?”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도 바로 이런 여성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p.219

1968년 6월 보부아르가 여권 운동을 벌이며 외쳤던 구호를 상기하며 (우먼에서)‘휴먼’으로 진입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오늘, 생활을 고치자, 미래에 맡기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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