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노동에세이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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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라고 표현한 것은 창세기에서 따 온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책의 맨 뒤쪽에 창세기 128절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여라."

이어서 또다른 인용문이 있다.

"극도의 권리는 극도의 불의다." -테렌티우스 <자학하는 자>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마치 인간에게 극도의 권리를 준 것이고 그 결과가 이렇게 참혹하다는, 그래서 극도의 권리가 극도의 불의를 낳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 생각엔 하나님이 인간이 이렇게까지 생태계를 망쳐 놓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을 믿고 최대한 많은 권한과 자율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역시나 인간의 탐욕이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고. 그리고 앞 인용문에서는 '바다의 고기'라고 하였으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닭, 돼지, 개와는 다른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설픈 지식이지만 땅의 생물을 먹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라고 알고 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세기 92-3

왜 이때부터는 땅의 생물도 먹는 것을 허락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하나님이 부여한 권한을 잘 사용했다면 지금보다 풍요롭고 자연과 조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에 얽힌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런데 아직 표지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 표지의 제목 옆에 한승태 노동에세이라고 작게 쓰여있고 작가의 앞선 작품 <인간의 조건> 표지에는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라고 덧붙여 있다. 작가의 관점이 그들-축산업 종사자들-을 대상화하지 않는 묘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도 아니고 육식을 금지하고 채식을 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자신 또한 동물을 학대하는 측면에서는 잔인해 보이는 업주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백까지 쉽게 넘어가게 만드는 독특한 관점이 있다. 4년여 동안 닭, 돼지, 개를 기르는 농장을 체험하면서 일기를 기록하고 책을 쓰기까지 이르렀다. 삶의 태도와 글쓰기의 태도에 대해 많은 깨달음과 질문을 던져 주는 노동에세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무감각해졌을까. 처음부터 이런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닭의 케이지는 처음부터 이렇게 좁지는 않았을 거고, 돼지, 개가 처한 환경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거다. 조금씩 조금씩 욕심에 맞는 현실과 타협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겪은 게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축산업도 극단적인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무감각도 점점 진행 중인 것 같다.

심해도 너무 심하다.’ 르포가 목적인 책은 아니지만 읽다보면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런 탄식이 나오는 지점이 현실에 한 군데 더 있다. 축산업 같이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생들의 학업 노동 현실이 알면 알수록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탄식이 나오는 상황이다. 책가방 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추석 때 할머니댁에 가면서 영어, 수학을 챙겨 간다. 물론 공부하는데 머리가 뛰어나서 조기 교육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아이들이 학교 방과 후 사교육에 내몰리고 있는 것 같다. 닭의 케이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공부를 잘 한다는 친지 고등학생이 있는데, 이번 겨울방학에 다니는 학원 스케줄이 무려 아침 7시부터 밤12시까지라고 한다. 귀를 의심할 뻔 했다. 고등학생이 어떤 학문에 매진하기라도 하는 걸까. 작가가 다음번엔 학생으로 변장해서 학습노동실태를 고발하면 어떨까. , 정말 이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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