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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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만성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절약형질 가설이라고 부릅니다. ... 이 가설에 따르면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기 당뇨병 발생의 원인이 되는 것은 태아 입장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임산부인 어머니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영양분이 부족할 때 태아는 생명체로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한정된 영양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답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아는 뇌와 같이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기관에 먼저 영양분을 사용하고 당장 내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췌장과 같은 기관을 발달시키는 데에는 영양분을 적게 사용합니다. 설사 그 선택이 먼 훗날 당뇨병을 유발해 수명을 단축시킨다 할지랃 지금의 생존을 위해 먼 훗날 발생할 수 있는 성인병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 우리 모두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경험을 하지요. 그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오래전 사회가 남긴 상처가 인간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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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그 원인의 그물망이 마치 처음부터 주어진 것인 양 생각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은 주어진 고정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인데도, 왜 질병의 원인을 항상 개인 차원의 고정된 요인으로만 가정하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유전적 요소인 가족력조차도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질병 발생에 영향을 주는데, 질병의 원인을 개별적으로 개인 차원에서만 고려할 때 우리가 놓치는 점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지요. 어떤 이가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결핵에 걸리고 또 다른 이가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린다고 이야기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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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습니다. ... 외부에서 온 연구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 몇 년 뒤 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사로 충남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근무지를 선택할 때, 저는 교도소 근무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근무한 곳은 만 23세 이하 재소자가 있는 소년교도소와 재판을 앞둔 성인 재소자가 머무는 구치소였어요. 교도소에서 의사로 일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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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제가 했던 활동들이 제게는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같은 것들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면 의과대학 본과 1학년 겨울방학 때, 산업재해를 당한 분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한달 동안 지원상근을 한 적이 있는데요. ...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었어요. 그때 느꼈던 묘한 낯섦 같은 거요. ... 산업재해를 당한 후 유일한 직업이 되어 버린 우유배달을 하러 가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오토바이를 끌고 새벽에 나가던 그 뒷모습에서 느꼈던 삶의 끈질긴 생명력 같은 거요. ...

그 아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아이들보다 하루만 더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감당해내는 부모들을 보면서 느꼈던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들이 저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경험들을 계속하고 그것들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간직할 수 있기를 또 길러나갈 수 있기를, 그것이 가능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욕심이 훨씬 커요. 어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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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것’ ... 이것이 이 분 삶의 내러티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질병의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의 의미와 지금 한국 사회에 처져 있는 거미줄에 대한 고민과 함께 나는 어떤 지향점을 갖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해 준다.

그리고 깊숙이 숨어 있던 나의 내러티브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부르심을 따라 살고 있는가, 그 뜻을 되새기며 살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게 될 것 같은,

이 책을 내 놓은

동아시아의 밝은 눈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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