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실은 - 디알북
박대령 지음 / 데일리서프라이즈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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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도 때론 그림책이 필요하다?

그림책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글자를 모르거나 혹은 글을 막 배우려는 유아에게나 해당되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한권의 책을 보고 때론 어른들에게도 그림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 일없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내용이 마무리되는 소설 같은 것보다 이런 책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분량 많은 책을 한자 한자 읽어나가는 것을 불도저 앞의 삽질처럼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해가기도 한다.

실제로 국문과에 다니던 친척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은 국문과를 다녀도 조정래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아니면 간신히 그의 이름은 알고 있고 책들의 제목도 알지만 한권이 아닌 열권씩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는 아예 읽기를 포기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국문과에서 배겨 내냐고 하니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전공 책 가지고 공부하고 시험을 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또 요즘은 인터넷에 두드리면 안 나오는 자료가 없으니 원재료를 날로 감상하기보다 원재료를 홍보하기 위하여 내 논 간략한 홍보문이나 그 밑에 달린 리뷰만 대충 보아도 숙제의 답은 나온다고 하였다.

생각하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장점도 있는 것 같았다. 역으로, 그런 짧은 리뷰들을 읽다가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나도 한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품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 성급한 세대 혹은, 시간 없는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책을 하나 발견하였다. ‘디알북’이라고. 디알북 이라니 그게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할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들은 디알북 그 세 글자도 너무 길어 ‘달북’이라고 한다던가.

▲ <대한민국 사실은>
일명 디알북<대한민국 사실은-데일리 서프라이즈 출판>은 한 네티즌(아이디: 디알)의 ‘도표로 보는 세상이야기’다.

그의 잠재력은 한나라당 김윤환 전 의원의 동생 김태환 의원이 오징어로 골프장 경비원의 뺨을 때린 사건에서 갑자기 분출하였다. 야구선수 강병규의 잠재력이 선수협 대변인 하다 물꼬가 트였다면, 디알 박 대령의 잠재력은 김태환 의원의 오징어에서 출발하였다.

아무튼 그는 날짜지난 신문기사들을 검색해가며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혹은 매일매일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 이야기들의 ‘핵심을 요약’하여 하나의 ‘도표’로 만들었다.

서민경제가 진짜 어려운 이유는? 우리교육이 망해가는 진짜이유는? 대한민국 총리가 특정신문을 나무란 이유는? 서민을 어렵게 만드는 수구 기득권자는 어떤 분들인가 등등의 제목아래 100편의 도표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알짜설명으로 한권의 책을 이루고 있다.

너도 나도 경제가 어렵다는데

기자들은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전하기에 앞서 꼭 재래시장에 가서 손님 없어 애태우는 상인들의 인터뷰를 배경으로 깔며 경제의 어려움을 전한다. 그러면 우리는 재래시장이 그렇게 썰렁하도록 먹지도 입지도 않고 산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진대 그냥 관성적으로 그렇구나 하면서 경제를 살려내라며 대통령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실상은 재래시장에 손님이 없는 것은 대형할인점으로 다 몰리기 때문이 아닌가. 나부터도 언제부터인가 물건 사러 갈 때는 할인점으로 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디알은 소비자들의 이러한 동향을 지난신문을 뒤져서 화살표 두개와 몇 개의 숫자로 간단히 정리해준다.

즉, ‘지난 4년간 대기업 할인점의 매출이 77%증가 할 동안 재래시장의 매출은 35%감소했다’고. ‘대기업 할인점의 연간 매출액이 37조원임에 반해 재래시장 매출액은 13조원’, 1억도 벅찬 나인지로 조 단위는 감이 안 잡히나 할인점이 재래시장 손님을 왕창 빼앗아 간 것은 확실히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말끝마다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에 힘써라’하고 국민들 또한 대통령에게 제일 바라는 것이 경제를 살려 달라는 이야기인데. 대통령이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수 십 년 진행되어온 암 환자가 하루아침에 건강 할 수 없듯이 우리경제 또한 나름의 조치를 취하긴 해도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디알은 ‘실무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회사의 실무적인 일은 회장이 아닌 사장이 하듯이 나랏일의 실무자는 전국 시도지사 및 지방 자치단체장’이라고 정리하였다. 디알 도표를 보니 전라도와 충남을 빼고는 다 한나라당 소속이 시도지사였다. 그뿐인가 ‘시장, 구청장, 군수의 60%가 시도위원71%가 한나라당 소속’이라고 하였다.

즉 껍데기만 집권당이 열린우리당이지 그 속은 한나라당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야당 국회의원들은 혹은 일부 국민들은 막연히 대통령을 향해 아우성을 치기보다 시도지사들을 닦달하거나 혹은 그들의 애로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다들 교육이 문제라는데

어렴풋이 듣고 잊어버렸는데 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실력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OECD회원국(선진 32개국)중 과학이 1위, 수학이 2위, 독해력 6위라고 한다. 재치만점 디알은 넓적한 화살표 속에 ‘이런 아이들을 데려다가’라는 말을 삽입하여 결과를 가리키고 있다.

전 세계 500위권 대학교중에 하버드1위, 도쿄대 20위, 서울대는 화살표를 보아하니 100보다 200에 가까운 등수였다. 고교등급제를 주장하고 실지로 등급을 적용하여 학생을 선발한 연세대와 고려대는 300위와 500위다. '도대체 대학에서는 4년 동안 무엇을 가르쳤던 것일까.'

대학선생의 문제라기보다 학생 스스로 고교 내내 성적에 찌들어 대학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공부를 놓아 버렸다면 그런 학생 더 이상 필요 없으니 과감히 잘라 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혹시 그렇지 못할 속사정이라도?

‘사학재단들의 경우 재정의 80%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 한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국고보조금이었고 재단 전입금은 극히 일부였다. 그러니 대학 관계자의 눈에는 학생의 머리수는 곧 돈이므로 함부로 자르지 못할 것이다.

행정수도는 돈이 많이 든다고 하던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람들은 대부분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한다. 이유를 물으니, 아, 행정수도가 대구에 온다면 모를까. 충남으로 가면 대구 부자들 다 대전으로 이사 가버리고 대구에는 쭉정이만 남을 것이라나.

“이 의근 지사는 경북북부가 살아날 것이라 하여 찬성하던 쪽이던데요? ”
“경북 북부? 그건 모르겠고 암튼 세금 많이 내야 되는 것이 싫어.”

행정수도만이 세금 잡아먹는 도둑일까. 디알 도표를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행정수도 건설비용은 단번에 11조가 드는 것이 아니었고 해마다 1조씩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역시 1억에도 손이 떨리는 나인지라 1조라니 감이 안 잡히는데,

‘매년 수도권이 교통 혼잡으로 지불하는 국가 손실액이 10조이고, 파주 신도시 6조, 일산 신도시 3조, 서울시 환경 공해비 8조, 청계천 문화재 파괴비 12조, 김포 신도시 7조, 강북 뉴타운 건설 100조......’ 왜 유독 행정수도 건설비용 11조에만 인색한 것일까. 그것이 22조로 부풀려 졌다 해도 강북 뉴타운 건설시의 100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진대.

그 외

위에 언급한 것 외에도 <대한민국 사실은>의 100편의 도표전체가 ‘한눈에 쏘옥 들어오는 알짜배기 진실’들이다. 상세한 것은 직접 감상해 보시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특히나 나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한 흥미로운 소재들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한다.

헌법 재판소 나이: 나는 헌재의 나이가 16세 미성년이라는 것을 몰랐다. 나는 8인 법관들의 붉은 옷자락과 근엄한 얼굴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느꼈다. 그랬는데, 실은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하도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가두어 들이다 보니 그에 대한 견제로 어쩔 수 없이 하나 만들어 준 ‘법 해석 기관’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법 해석 기관일 뿐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지존'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한 달 월급: ‘MBC지분 30%, 부산일보 지분 100%, 경향신문 사옥땅 700평을 강탈하여 만든 516장학회(81년 이후 정수 장학회).’ 박근혜씨는 95년부터 10년동안 정수 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직하였고 연봉이 2억5천. 그러면 대략 월 2000만원이었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연봉: 세 아들을 모두 군에 안 보내는 기염을 토한 개신교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조 목사의 연봉은 대략 ‘11억3천만원 (동아일보 송평인 기자)’이라고 한다.

그리고 병역을 면제 받은 국회의원은 왜 그리도 많은지. 굴비사건의 안상수,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는 이명박, 한나라 경제통 이한구, 강릉사나이 최돈웅, 법사위의 짱 최연희 등등 손가락 발가락 다 합쳐도 모자라고 자식들까지 합치면? 머리에서 김이 난다.

각설하고. 30년 군사 독재와 그에 기생한 수구 기득권들에게 찌든 우리의 내면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또, 잘못 알고 있는 우리의 현대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한강>과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산책 시리즈> 그리고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1, 2>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 대령의 <대한민국 사실은>을 꼭 추천하고 싶다.

성질이 급해서 혹은 사업이 바빠서 진득하니 위의 책들을 다 못 읽겠는 사람들에게는 급한 대로 디알 박 대령의 <대한민국 사실은>을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렇게 숨고르기를 한 다음 훼손된 영혼의 복원하기 위하여 꼭 나머지 책들을 찬찬히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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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 해피? - 우리 이웃 50명이 오마이뉴스에 올린 행복 이야기
박상규 외 지음 / 한길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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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오마이뉴스>에서 전화가 왔다. '사는 이야기'에 소개되었던 기사 중 오십 편을 골라 책을 한 권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에 내 글도 한편 포함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전화를 건 이유는 동의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50명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니 오히려 내쪽에서 영광이라고 하였다. 한길사는 지명도 있는 출판사인 만큼 책도 좀 팔리겠고(?), 50분의 1이라는 미미한 참여지만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그렇게 <오마이뉴스>로 부터 전화를 받고 난 다음, 잊은 듯하면서도 늘 마음 한켠엔 책이 언제쯤 나온다더니 왜 아직 안 나오지 하며 내심 궁금해 했다.

시간이 흘러 8월 하순경, 드디어 책이 나왔다는 소식과 함께 책을 부쳐주겠다고 하였고 책은 빠르게도 바로 다음날 도착하였다. 때 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내 집에서 2박3일을 보내게 된 두 친구가 있어 그들에게 각각 한권씩 나눠주었다.

친구들은 신기해하며 내 기사 '그때 정말 내 한테 삐삐 안쳤나?'를 먼저 읽었다. 그리고는 재미있다고 하였다.

관련기사
"그때 정말 내 인데 삐삐 안 쳤나?"
'디알북'이 뭐예요?


“정말?”
“그래.”
“뭐 그렇기까지야.”
“아니야, 정말 재미있어. 컴퓨터로 볼 때 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네.”

그러면서 친구들은 앞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나 또한 읽어보니 처음 보는 내용들이 많아서 새 책을 산 느낌이었고 나름대로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조각 천을 바느질해서 만드는 퀼트 제품이 아름답듯이 <아유해피> 또한 퀼트 못지 않은 매력이 있었다.

팥빙수를 매개로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맛있게 그려준 김은식 기자, 남의 양복지어주는 일을 업으로 하다 기성복이 창궐하는 바람에 양복점을 접고, 양복 만들던 고운 손이 막일로 거칠어진 단벌신사 아버지에게 육순선물로 새 양복 한 벌 해드렸다는 효자 이봉렬 기자, 아빠가 가난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을 뱃속의 아기도 아는지 전진한 기자의 아내는 모처럼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입덧의 시기에 겨우 먹고 싶은 것이 호떡이었다나.

편완범 기자의 기사 '내 직업은 예식장 전속 주례사'는 주례사의 이면을 볼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그 짭짤한 수입에 군침이 흘렀다. 그리고, 사위될 사람에게 어려운 한자시험을 치르게 했던 김령희 기자의 아버지 얘기는 읽는 내내 김 기자의 아버지가 내 옆에 계시는 것처럼 떨렸다.

아무튼 50인이 함께 만든 이 '퀼트 제품'이 대박까지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조금은 회자되길 바랐다. 그렇게 그저 누군가 읽어주길 마음으로 바라기만 할 뿐 나는 아무런 노력 내지는 판촉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랬듯이 <아유해피>를 출산해놓고 기자들 모두가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는지. 워낙 책이 안 읽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50명 중에는 이미 단행본을 낸 분들도 있던데, 혹여 자신들의 단행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무심히 대한 것은 아닌지, 혹은, 단지 50분의 1일 뿐이므로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니라 생각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나는 무엇보다 <아유해피>가 나름의 향기가 나는 책이라 생각하였기에 모두의 무관심이 안타까웠다. 내게 돌아올 몇 만 원 원고료 때문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것 때문에 아무에게도 얘기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권의 가격으로 50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명분을 발견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선 나부터 <아유해피>의 독자가 되기로 하였다. 가끔 책 선물을 주고받는 지인에게는 다른 책이 아닌 <아유해피>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요즘은 뭔 책을 사야 할지 몰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파리의 연인>의 수혁 버전으로 <아유해피>를 이야기하였다.

“한길사에서 펴낸 <아유해피>란 책이 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다.”
“그게 무슨 말이고?”
“궁금하면 사봐, 줘. 그 속에 내가 있다고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 속에 내가 있다고 해봐야 막상 사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부터도 두세 번 <아유해피>를 보내니, 더 이상 부칠 데가 없었다. 그렇게 <아유해피>를 나도 잊고 남도 잊고 모두들 잊어가던 찰나, 서프라이즈'의 <도표로 보는 대한민국 사실은>(디알북)이 그 구성원들의 엄청난 관심과 노력으로 급속도로 퍼저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오마이뉴스가 자신들이 가진 인프라를 이용할 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십이월의 끝자락에서 잊었던 <아유해피>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냥 이대로 소멸이 아닌, 부활을 꿈꿀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내가 너무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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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과 그의 아내 - 33쌍과의 인터뷰, 우리 시대의 남성.여성.가족
김현주 지음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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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 이런 저런 맞선이 들어오면 올케언니가 첫째로 묻는 질문이 "그런데 그 사람 그 집에서 장남이에요?"였다. 자기도 장남에게 시집왔으면서 아니, 자신이 장남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에 장남은 안 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은 어땠나 하면. 멋모르던 시절에는 내가 막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왕이면 장남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본 장남들은 듬직했으며 이해심이 있었으며 차남처럼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한두 살씩 더 먹어가다 보니 배우자의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 위라든가 거기다 장남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남이고 나이가 서너 살 위이기 때문에 너그럽고 믿음직하고 내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그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은근히 더 위압적으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장남과 결혼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결혼을 하고 나니 듬직함과 너그러움은 오간 데 없고 일방적이고 권위적이고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라며 푸념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장남도 많으리라. 그러나 한국사회에 부여된 장남에 대한 과잉기대와 의무는 장남의 어깨만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의 어깨도 무겁게 한다.

▲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표지
ⓒ2004 명진출판
윤영무 기자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명진출판)를 아픈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내용이 장남이지만 장남을 거부하고 룰루랄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더 이상 장남 생활에 찌들지 말고 '내키는 대로 살자' 뭐 그런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읽어보니 이 책은 그런 룰루랄라 장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어른들이 옛날에 생각했던 장남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는 성실하고 믿음직한 장남의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행간에서 장남 아내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자녀들의 눈물도 보았다.

장남 역할이 동생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는 든든하기 그지없으나 그의 아내 입장에서는 오로지 수고만이 두 어깨를 짓누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로서는 자신들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장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들을 성실히 수행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 같은 것은 별로 없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생들 제 앞가림하게 도와주고 격려하고 또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시골 친척들을 구워삶는(?) 법 등 자신감 있고 상냥하고 듬직한 이 장남은 어딜 가나 팔방미인으로 환영받고 척척박사였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제수씨의 생일까지 챙기는 꼼꼼함은 물론 처가댁에도 잘한다. 사위가 미리 온다고 하면 이것저것 준비하시느라 부담스러울까봐 마침 지나는 길이라 들렀다면서 마실 것을 내놓으며 달콤한 말과 함께 용돈을 살짝 놓고 가는 애교에 어느 장모인들 넘어가지 않으랴.

처가에 하나를 잘하면 아내가 시가에서 열을 잘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실천했다. 그가 지금의 아내를 택한 이유도 심성이 곱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잘 모셔줄 것 같아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윤 기자 세대의 장남들은 배우자를 고르는 제일 조건이 둘 사이의 사랑보다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어줄 여자를 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친척 아저씨 중 한 분, 그도 여섯 형제의 장남이었다. 예전엔 결혼이 본인의 선택보다 그 부모의 선택이었는데 친척아저씨 역시 그의 아버지가 점찍어준 여자와 결혼하였다.

나이 드신 분들은 부모님 말씀이라면 대개 만족하며 따르는 것으로 보여 그 아저씨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랬는데 70을 바라보는 그 아저씨의 넋두리는 인생을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한스러웠다.

'지금의 마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아버지에게 사정했는데 아버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이가.'

▲ <장남과 그의 아내> 표지
ⓒ2004 새물결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읽은 사람들은 몇 해 전 나온 <장남과 그의 아내>(새물결)를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가 장남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는 장남의 입장만 있다면 <장남과 그의 아내>에는 장남의 입장과 그 아내의 입장 둘 다 있다.

<장남과 그의 아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장남부부 33쌍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장남은 그의 아내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장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장남과 그의 아내>는 장남과 그의 아내만이 아닌, 결혼을 했거나 또 앞으로 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이다.

'아, 우리의 갈등이 사실은 이런 카테고리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었구나' 혹은, '결혼 속에는 그동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런 갈등도 있구나' 등등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읽고 나서 나는 윤영무 기자보다 윤영무 기자의 아내에게 짠한 마음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나는 여자이므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많은 아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이다. 윤 기자가 차기작으로 '장남의 아내도 행복했다'라는 행복한 책을 쓸 수 있게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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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헌책이다 - 함께살기 최종규의 헌책방 나들이
최종규 글 사진 / 그물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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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도 한때는 헌책방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언저리, 아주 깨끗한 <현대문학>이 단지 날짜가 며칠 더 지나서 지난호로 밀려났다는 이유로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당장 샀다.

그 뿐인가, 새로운 호가 나오면 그 달 사지 않고 그 달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헌책방에서 보이면 냅다 사곤 하였다. 그런 얌체 짓을 조금은 찔려하기도 하였으나 내 돈이 굳고(?) 같은 돈으로 책을 배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멀어 작가들의 창작의욕이고 뭐고는 안면 몰수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던 것 같다. 헌책방이 좋긴 하지만 헌책방이 보여주는 무질서한 진열과 중구난방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책들의 혼잡함이 지겨워졌다. 게다가 기관지가 좋지 않은 나인지라 무엇보다 손끝에 묻어나는 먼지가 싫었다.

사람의 습관은 묘해서 헌책방에 발길을 한번 끊으니 좀처럼 다시 가지지 않았다. 새 책을 파는 대형서점에서 매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따끈따끈한 신간을 구경하는 재미에 헌책방은 한번 잊으니 오래도록 잊혀졌다.

내가 다시 헌책방의 존재를 상기하게 된 것은 최종규 기자의 헌책방 순례기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솔직히 처음 얼마간은 재미있게 봤어도 점점 클릭할 재미를 못 느꼈다. 최종규 기자도 얘기했듯이 헌책방이 자꾸 사라진다고 하니 내 관심도 시들시들해졌다.

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헌책방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하나둘 책을 내는 것을 보고 ‘이 인간(?) 이쯤에서 책 한 권 낼 법한데…’ 하면서 검색해본 결과 책은 이미 지난 5월에 나온 것이 아닌가.

 
▲ <모든 책은 헌책이다> 표지
ⓒ2005 그물코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 그동안 최 기자의 헌책방 시리즈 읽기를 게을리한 것이 오히려 그의 단행본을 읽는 데는 신선한 도움이 되었다. 택배로 보내져 온 책은 보통 책보다 약간 두툼하였고 속지는 재생지로 되어있었다.

그의 헌책 사랑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가졌던 헌책에 대한 세 가지 선입견을 수정해야 했다.

첫째, 헌책방의 헌책이란 별 볼일 없는 책이 아니라 ‘다시 읽힐 만한 책’이라는 것이었다. 헌책방 아저씨는 ‘맞돈(현금)’을 주고 헌책을 사오기에 누군가 사가지 않으면 그대로 손해이므로 그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싶은 책을 선별해서 사온다고 하였다.

둘째, 헌책만큼 헌책방 아저씨도 후지다? 천만의 말씀. 헌책방 아저씨로 자리 잡으려면 한 몇 년은 수련(?)해야 나름의 안목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 즉, 좋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헌책방 아저씨들은 좋은 책만큼 눈이 높은 분들이었다.

셋째, 헌책방엔 삼류소설이나 만화가 주류다? 땡! 귀중한 자료가 될만한 소중한 책들이 헌책방에 즐비하고, 서점 주인들은 좋은 책이 나오면 가끔은 숨겨두었다가 그 책이 꼭 필요할 법한 단골에게 먼저 선보인다고 하였다. 밀실 뒷거래(?)가 나쁘지만 헌책방의 그것은 오히려 그 정반대인 듯했다.

헌책과 헌책방 사정이 이러하거늘, 나는 그것도 모르고 헌책방이란 별 볼 일 없는 구닥다리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한물간 서점, 조만간 사라질 시대에 맞지 않는 공간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 무지의 소치였고, 최종규 기자의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헌책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갈 뻔했다.

조만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헌책방을 수소문해보고 나도, '안 보고 지나쳤으면 크게 후회할' 책을 바야흐로 사기 시작해야겠다.
 
 
'헌책’이라는 이름이 좀 아쉽네요. 헌책 말고 좀 더 친숙하고 헌책을 빛나게 하는 말은 없을까요. ‘다시 보고 싶은 책’, ‘어제의 책’, ‘숨어있는 책’, ‘옛 책’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어떤 낱말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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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2
교육출판기획실 엮음 / 푸른나무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인터넷에서 '펌글'의 형태로 떠돌던 유시민의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을 책으로 다시 읽었다. 인터넷으로 읽고 난 다음 한 번의 클릭으로 잊어버리기엔 너무 아쉬워 이런 저런 검색 끝에 그 원본이 실렸던 책을 발견한 것.

다름 아닌,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도서출판 푸른 나무)였다. 초판은 88년이었고 내가 사게 된 것은 2003년 개정판이었다. 활자화 된 것을 읽으니 인터넷으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꺾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 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그가 바라는 미래란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 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 셋방살이 한맺힌 가난한 이들이 작지만 자기 집을 갖는 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나라, 이런 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그가 원하는 그 소박한 미래를 얻지 못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유시민처럼 어울리지 않는 국회의원도 없을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보다 글을 쓰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인다.

이 책에는 유시민 외에도 아픔을 먹고 자란, 지금은 다들 한 이름 걸고 사는 '젊은 활동가들의 성장 체험'이 뼈저리게 녹아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감동적인 시인과 소설가가 되는 길이 쉽지 않음을 알고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그들은 정말이지 가난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멱을 감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도 늘 배가 고팠고, 그 고픈 와중에도 공부가 하고 싶어 눈에 불을 켰고, 늘 월사금이 밀려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어린 시절을 보낸 최인석은 밥은 굶지 않았어도 늘 자신의 마음과 불일치하는 부모님과의 의견 차이로 고통스런 성장기를 보냈다. 방학숙제를 계기로 일기 쓰기에 재미를 붙이고, 책읽기를 좋아하게 된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그의 아버지는 전망 밝은 전자공학과를 추천하였다. 제2외국어로 불어를 공부하고 싶었던 그에게 그의 부모는 독일어를 배우라고 하였으며 문과가 적성이 맞는 그에게 이과반을 강요했다.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시절이라 초등시절부터 늘 과외공부와 산더미 같은 숙제에 시달렸다고 했는데, 지금 학생들의 상황도 그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세상은 변하지 않고 시간만 흐른 듯하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청춘을 보내면서 누구나 다 성장통을 겪었을 것이다. 나 또한 무언가 의식이 깨어나던 스물부터 서른까지가 가장 괴로웠다. 그러나 아픔이 없으면 성숙도 꿈꿀 수 없기에 지금은 머리가 어지럽던 그 시절의 아파했던 기억이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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