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들 - [할인행사]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안소니 홉킨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비디오를 보다보니 '안소니 홉킨스'를 많이 만나게 되었다. 구미인 답지 않게 좀 작았으며, 오동통해서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였다. 시선을 끄는 타고난 외모는 아니었으나, 그의 영화를 거듭 볼수록 그의 진한 매력에 빠져 들었다.

자신만만함과 야무져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그의 영화들은 조리 있었고 엉성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영화인생' 전반에 걸친 영화를 다 보고 싶지만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 사정상 그럴 수 없음이 아쉽다.

다음은 <양들의 침묵>에서 맨 처음 그를 인상적으로 보고 난 다음 그의 영화들을 좇다가 발견한 세 편의 잔잔하면서도 좋은 영화들이다.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 2003)

<휴먼 스테인>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메사추세스 아티나 대학의 고전문학교수 '콜만 실크' 역으로 아무도 모르는 과거를 가진 남자로 나온다. 그와 아픔을 함께 나누는 '퍼니아(니콜키드먼 분)' 또한 파란 만장한 과거를 가진 여자로서 둘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역할을 하다 자살에 이르게 된다.

콜린실크 교수는 성공한 대학교수였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흑인이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평생 숨기고 살았다. 그는 자신의 강의에 나오지 않는 학생을 향해 '스푸크'라고 하였는데, '유령'과 '깜둥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던 이 단어를 대학 당국과 학생들은 '깜둥이'로 해석하고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도 깜둥이인데 어찌 자신이 '깜둥이'란 뜻으로 '스푸크'라고 했겠느냐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도 있었으나 침묵하였다. 때문에 그는 대학에서 쫓겨났고 그 충격으로 그의 부인은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실은 부인에게도 평생 자신의 몸에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숨기고 살아왔었다.

자신의 피부색은 다행히 백인의 형상이라 백인 행세를 할 수 있었지만 혹 자신의 아이가 흑인으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평생 아이도 단념하고 살았다. 이러한 그를 두고 그의 어머니는 '몸의 자유를 얻고자 평생 마음의 감옥에 갇혔다'며 안타까워하였다.

콤플렉스란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본인의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을 벗을 수 없는 멍에이기도 하다. 더구나 콜린 교수의 경우는 시대적 배경상 단순한 콤플렉스를 떠나 사회적 불이익 혹은 이루고자 하는 꿈의 장애가 될 수도 있었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는데 안소니 홉킨스는 한(恨)이 가득한 콜린실크 역을 찡하게 소화해 주었다.

<하트 인 아틀란티스>(Hearts In Atlantis, 2001)

이 영화의 시작은 어른이 된 사진작가 바비 가필드(데이빗 모스 분)가 유년의 친구 셜리의 부음을 접하고 잊었던 고향을 찾아 추억을 반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고향은 어제처럼 그를 11살 유년의 추억 속으로 안내해 주었다.

심령술을 가진 '테드 브로티건(안소니 홉킨스 분)'은 그의 초능력을 이용하려는 FBI를 피해 아주 단출한 가방 하나만 들고 '바비 가필드'의 2층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바비 가필드는 아버지가 돌아간 후 생계 유지로 힘들어 하는 엄마와 함께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테드 할아버지의 출현은 그의 마음에 안정과 추억을 주었다.

바비는 동네친구 '셜리'와 '케롤' 그리고 테드 할아버지와 함께 멋진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바비의 엄마가 직장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실의에 빠져 돌아온 후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다. 바비 엄마는 동네의 불량소년으로부터 케롤을 구해준 테드를 오히려 성폭행자로 경찰에 신고해버려 그는 바비의 집을 떠나야 했다.

가뜩이나 FBI가 자신을 찾는 전단을 뿌려 불안한 가운데 바비 엄마의 신고는 테드에게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바비의 집을 떠나게 된 테드는 복권 당첨금을 바비에게 찾아오라 부탁하였고, 바비는 자신에게 마음의 위안을 준 테드 할아버지를 위해 어린아이 답지 않게 비장하게 임무 수행을 했지만 테드는 잡히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보편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된 자의 덧없음을 잘 표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바비에게 아버지와 같은 자상함을 주어 그가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할아버지 역으로서도 훌륭하였다.

<남아있는 나날>(Remains of The Day, 1993)

<남아있는 나날>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집사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사랑마저 포기하는 완벽주의 집사 '스티븐스'역을 맡았다. 그는 하녀장인 '샐리 켄튼(엠마톰슨 분)'에게 호감을 가졌으면서도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오로지 사무적으로만 대하였다. 이에 샐리 켄튼은 더 이상 그에게서 희망을 못 느끼고 '벤'이라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하녀장일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시던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 분)의 정치적 실패 후 저택의 새 임자가 된 잭 루이스 백작(크리스토퍼 리브 분)에게 하녀장을 구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휴가를 받아 20년만의 외출을 하였다.

그런데 가는 곳 마다 자신이 모셨던 달링턴 경을 헐뜯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 집의 집사였음을 부인했으나 나중에는 시인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경의 정치적 행위의 실패를 그 인격의 결함으로 까지 몰고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켄튼을 만나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로부터 자신의 딸아이가 임신을 해서 못 간다는 거절의 말을 들었다. 이제야말로 켄튼에게 고백을 해야지 맹세하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스티븐스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꺼내지 못하고 내리는 빗속에 '그리움'을 떠나보내야 했다. 매정하게 말했지만 켄튼 또한 미련이 남았고 그 어쩔 수 없는 미련은 비가 되어 스티븐스의 마음을 적셨는지도 모르겠다.

둘은 시종 '당신을 좋아 했네'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내리는 빗줄기는 그들을 대신해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안소니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20년 응어리 진 그리움과 뒤늦게 꿔 본 꿈이 어긋나는 아픔을 돌덩이를 하나 가슴에 얹은 듯 절절하게 연기해 주었다.

마무리…

비디오 말고 극장에서 안소니 홉킨스를 본 것은 옛날 <가을의 전설>에서 처음 본 셈인데 그때는 그 아들 '삼형제'의 아버지가 안소니 홉킨스인줄 몰랐기에(?) 못 본 거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지금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 노배우를 극장에서 처음 만나게 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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