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 예술가의 초상
에밀 졸라 지음, 권유현 옮김 / 일빛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뻐꾹 시계가 막 7시를 알렸고, 그는 그곳에 장장 8시간이나 서 있었던 것이다. 마른 빵 한조각 이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열에 들떠서 1분도 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 해가 기울며 아틀리에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하루가 무섭도록 우울한 느낌을 던지며 끝나가고 있었다.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는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빛까지 사라지고 나니, 마치 태양이 이 지상의 생명과 노래하듯 유쾌한 모든 색깔들을 빼앗아 달아난 후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85쪽

 

'해가 비치는 마지막 1분 까지 이용'하며 그림을 그리던 주인공 클로드가 하루해가 저물자 비로소 온몸의 피로를 체감하며 별 소득 없이 또 하루를 보내야 함을 탄식하는 대목이다. 태양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닐진대. 무심한 보통사람에게는 아침에 떴다가 저녁에 지는 것이 해이고, 내일이면 또 내일의 해가 뜰 텐데 그렇게 아쉬워하다니.

 




그러나, 대작에 대한 열정으로 온몸을 불사르던 클로드에게는 해가 떠있는 시간의 그 일분일초가 늘 아쉬웠다. 빛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어떻게든 그려야 되겠는데 늘 지나친 완벽주의가 제동을 걸어 이제 완성인가 싶으면 또 결점을 발견하게 되고. 하여, 그리고 또 그리고, 지우고 또 지우며 힘겨운 날들을 되풀이 하였다.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적 고뇌가 고스란히..

 

에밀졸라의 <작품>(일빛 출판사)은 19C 인상파 화가들의 창작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책에는 화가를 꿈꾸는 '클로드'와 '드뷔슈' 그리고 작가가 꿈인 '상도즈'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들의 동료 화가와, 조각가, 화가의 작품을 품평하는 기자, 화가의 모델 등 다양한 군상들이 나온다.

 

빛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이 새로운 화법의 시도는 기성 살롱 출품 전에서는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화법을 고집했으며 낙선한 그들의 그림만을 모아 따로 '낙선 전람회'를 열기도 한다.

 






  
작품
ⓒ 도서출판 일빛
에밀졸라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일 텐데 이들은 빵 값을 아끼기 위하여 빵을 먹기 어렵게 딱딱하게 말려서 먹는가 하면 포도주에는 언제나 물을 많이 타서 양을 늘려 마셨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타협할 수 없었다.(물론, 여기서도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슬쩍하여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 인사도 나온다.)

 

특히 주인공 클로드는 걸작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아내와 아이에게도 무관심 할 뿐더러, 종내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 피폐 할대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뭐든지 적당한 선에서 배부르고 더 이상 욕망이 안 생기는 나로선 도무지 이해 못할 고집이요 한편으로는 부러운 열정이었다.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에 앞서 주인공 클로드는 '세잔과 마네'를 섞은 인물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세잔은 이 소설이 출판되었을 때 다 읽고는 졸라에게 아주 냉소적인 답장을 보냈고, 그 후로 그들은 단 한 번도 재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시절부터 쌓은 30년 우정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세잔에게 한 표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마고우인 친구를 아무리 허구 속에서라지만 너무 비참하게 그렸다. 실지의 세잔이 당대에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처참하게 짓이겨도 아무런 아픔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허구 속도 실지도 한줄기 빛조차 느낄 수 없었던 암담한 상황이던 세잔이었기에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무척 섭섭했을 것이다.

 

게다가, 반대로 졸라 자신을 형상화 한 듯한 상도즈는 화목한 가정생활에다 친구들도 챙기고 작가로도 성공하고 인격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그렸다. 물론 클로드가 다 세잔이 아니고 상도즈가 다 졸라가 아닐 것이다. 클로드의 고뇌가 고스란히 졸라의 작가적 고뇌일수도 있고 여타 화가들의 이심전심일수도 있겠다. 그래도 세잔은 그렇게 속편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뭐니뭐니해도 실지의 세잔이 절교를 선언할 만큼 그렇게 기분 나빴던 것은 결국 졸라의 '묘사'가 탁월했기 때문이었을 터. 졸라의 묘사가 탁월했기 때문이야말로,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고뇌와 욕망과 열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아무튼, 이 책은 허구 속에서 실재를 유추하며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번역본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히 추가했는지 몰라도)책 중간 중간에 소설이 묘사하는 실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또한 삽입되어 있기에 마치 소설로 해석한 그림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다. 뭐 실지 그렇기도 하고. 더불어, 한사람의 예술가로 살고 싶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열정은 있어야 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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