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월, 결혼을 앞둔 조카의 신혼 가전을 함께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매장 점장은 신혼부부가 쓸 것을 산다고 하니 당연하다는 듯 드럼세탁기+ 양문형냉장고+벽걸이나 탁자형TV는 기본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드럼 세탁기 말고 그냥 통돌이 세탁기를 원하는데요."

"요즘 신혼살림에 누가 구식 세탁기 산답니까?"

"평소 주부로서 판단해 보건데 세탁기는 역시 드럼보다는 일반 세탁기다 낫던데요."

"그래도 신혼부부 세탁기는 다들 드럼으로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점장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요즘 신혼부부라면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면 다들 드럼세탁기를 살 것이었다. 그것이 유행이고, 유행에 뒤처지면 혼자만 외톨이 되는 듯 선전하니까. 그러나 실속을 따지자면 드럼보다 그냥 일반 세탁기가 가격도 반에다 용량도 크고 모터도 튼튼하기에 천덕꾸러기 삼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드럼 안 써 보고 이런 얘기하니 어폐가 있지만 드럼 쓰는 사람들 얘기 들어 보면 다섯 중 다섯 다 일반 세탁기가 낫다고 하였다. 나로 말하자면 12년째 혼수로 사온 일반세탁기를 쓰는데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아 세상에 이보다 더 성실한 일꾼이 어디 있나 싶다. 아무튼, 세탁기의 경우 나의 의견에 조카가 100% 공감했기에 점장이 뭐라고 하든 일반세탁기로 결정을 봤다.

 

다음은 냉장고. 냉장고의 경우도 양문형은 인물만 좋지 칸막이가 너무 많아 갑갑하고 때로는 냄비째로 넣을 일도 있는데 그럴 수 없어 불편하다며 열에 7, 8명은 별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요즘 추세가 다들 양문형이다 보니 제멋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는 거부하기 힘들 터.

 

내 마음 같아서는 일반형만 해도 차고 넘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소심한 조카는 본인보다 신랑 쪽이 혹 부끄러워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양문형으로 해야겠다고 하였다. 그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다행히 냉장고의 경우는 마침 무늬는 양문형인데 가격은 일반형보다 조금 더 비싼 기획 상품이 나와 있어서 그 기획 상품 양문형으로 하였다.

 

하여, 이제 남은 것은 TV인데. 대리점 점장은 냉장고와 세탁기의 경우는 우리 마음대로 했지만 TV의 경우는 확실히 자신의 추천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 당연한 듯 탁자형과 벽걸이형을 소개하였다.

 

"요즘 신혼부부들은 보통 요런 29인치를 많이 해요."

 

인즉슨, 맞는 말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그러나, 남의 결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이유 십 원 어치도 없었지만 조카가 최대한 실속을 차리길 바라는 의미에서 한마디 얹었다.

 

"몇 년 전 일 년에 300편 이상 영화를 본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TV보다 그것을 통해 볼 내용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니? 친구나 지인들 집에서 벽걸이 TV 많이 봤다만 DVD 있는 집은 없더라. TV는 벽걸이나 탁자형 말고 뒤가 좀 나온 구식으로 사고 차라리 남는 돈으로 디브이디를 한 50장이나 100장 사는 게 어떻겠니? "

 

일반 TV 역시 인치는 같아도 가격은 벽걸이의 반값이었다. 물론 디지털 TV라 몇 년 후 디지털 전송이 본격화되어도 수상기를 교체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충분히 공감하지만 역시 신랑에게 미안해서 갈등 생긴다. 남자들은 전자제품에 예민하다던데..."

 

"네 마음 편한대로 해. 그러나, 나라면  DVD 50장이나 100장 사는 선택하겠어. 요즘 DVD 좀 싸니? 큰돈 풀릴 때 명작들 한꺼번에 확 사버리는 거야. 푸훗~"

 

갈등하는 조카의 얼굴과 뭐 이런 구닥다리 아줌마가 따라 붙어 싸구려만 골라서 권하냐는 점장의 눈빛을 보며 나는 나대로 측은하여 한마디 넣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결혼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우린 마음보다 자꾸 물질로 그 마음을 대체하려는 것 같아요. 좋은 냉장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으로 해줄 수 있는 손길이고, 비싼 세탁기에 빨건 보통세탁기에 빨건 매일 매일 보송보송한 옷을 입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화질 좋은 TV도 물론 좋겠지만 그보다 먼저 좋은 프로를 알아볼 줄 알고 좋은 영화나 다큐를 감상 할 수 있는 감성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요.  액정 화면에 비하면 질이 좀 떨어지겠지만 요즘 나오는 일반형 TV도 몇 년 전 TV에 비하면 나름 깨끗한 화질 아닌가요.

 

돈이 많아서 흥청망청 써도 된다면 소비의 미덕을 발휘해 볼 만도 하겠지만 빠듯하게 알뜰하게 혼수를 해야 한다면 굳이 뱁새가 황새 흉내 낼 필요가 뭐가 있어요. 마음만 맞으면 13평에 살아도 행복하고 마음이 안 맞으면 63평에 살아도 허전하고..."

 

아줌마의 주절거림은 이후로도 몇 가락 더 넘어갔는데 다 듣고 난 점장 왈.

 

"저 실은, 결혼 1년 되었고 한 달 후가 집사람 산달인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왜요, 힘들어요?"

"어떻게 아세요? 네, 무척 힘들어요."

"얼굴에 다 써져 있네요."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신혼부부 상담을 하게 되었다. 물론 결혼 12년차이니 만큼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었고 점장은 특별히 감사의 뜻으로 세제 세트를 나에게 선물로 준다고 하였는데, 아뿔싸, 대리점을 나오면서 둘 다 까먹어 버렸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TV는 무엇으로? 흔쾌한 신부의 동의하에 액정TV 아닌 일반 디지털 TV를 샀다. 이 때문에 결론적으로 고급 김치 냉장고 한 대 값으로 냉장고+TV+세탁기+밥솥+카세트+DVD기기+전자레인지+드라이어+청소기 등 소소한 가전제품 총 망라해 살 수 있었다.

 

그 소박한 선택은 현재 어떤 결과를 내고 있을까. 며칠 전 결혼 만 두 달을 채워가는 조카의 집을 방문하여 가전제품에 대한 소회를 물으니,

 

♣세탁기: 아무래도 난 익숙한 구식이 맞나봐. 아주 만족스러워.

 

♣양문형 냉장고: 그땐 양문형 안 사면 두고두고 후회하고 창피할 줄 알았는데, 냉장고 문 한번 열어봐라. 넣어둘게 없어 텅텅 비었다. 일반형 중 제일 큰 것도 말고 한 500리터짜리 샀어도 충분 했을텐데... 냉장고만 크면 뭐해. 요리를 못하니 다 말짱 꽝이야.(웃음)

 

♣TV: DVD 쟁여두고 심심할 때마다 본다. 저번 집들이 할 때 어떤 손님이 이 집은 홈 시어터 아니네 어쩌네 해서 기분이 좀 그랬는데 홧김에 DVD 50장 더 사서 100장 채울까봐.(웃음)

 

마무리...

 

신혼 가전 소박하고 평범하게 하자. 결혼 해서 살다보면 고급이고 저급이고 다 거기서 거기다. 좋은 것 사고 싶으면 애들 중고등 학교 들어갈 때 고급으로 해도 늦지 않을 터. 중고등 들어가도 고급이 뭔 필요 있나. 뭐, 돈 있으면 내 알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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