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문에 난 통계를 보니 한해 성적비관으로 삶을 버리는 학생이 적게 잡아야 200명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성적을 비관해 삶을 버리다니.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성적을 비관해 자살을 감행하는 학생들의 경우 의외로 성적이 좋은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공부에 취미 없는 아이들에겐 공부하고 목숨하고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잘하면 좋겠지만 안 되는 것을 어쩌고 또 노력도 안했는데 점수 좋기를 어떻게 바랄 것인가. 공부 못하는 자신이 때론 갑갑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내 놓을 정도는 결코 아닐 것이다. 

사례1

막내 조카의 경우 가족들은 녀석의 성적에 대해 걱정이 태산인데 본인은 전혀 걱정을 않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느 날 조카와의 대화 끝 한마디 덧 붙였다.

"니가 지금 공부를 못하기는 하지만 공부 못한다고 해서 행여 기죽지는 말아라. 너는 지금 너의 길을 찾는 것에 다소 혼란스러울 뿐이니 전혀 주눅들 필요 없어. 공부도 적성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니겠니?"
  

"전혀 기 안 죽는다. 걱정을 하지마라. 시키는 대로 공부 하는 애들이 불쌍타."

기죽을 필요야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기죽지 않을 것까지야 없겠거늘 천하태평도 그런 태평이 없었다.

사례2

초등 전반기 늘 반평균 언저리를 맴돈 나의 첫째에게, 공부하라는 소리에 지친나머지 집에다 불을 낸 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스펀지>를 보며 역시 말했다.

"공부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절대 저런 끔직한 지경까지 가면 안된데이?"

"걱정마라. 반 평균만 넘으면 된다."

나 참. 안도와 함께 '그러니 너는 성적이 안 오르는 거구나.'하며 혀를 찼다. 공부에 욕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학생의 본분이 배우고 익히는 것일진대 반평균만 넘으면 된다니. 그런데 공부에 대해서는 반평균 언저리가 어떻고 말하는 녀석이 노는 면에서는 단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의 경우 오전 11시에 나가서 저녁 6시에 들어왔다. 그 중간의 점심은? 물론 굶었다. 중간에 두세 번 전화를 걸어, 들어와서 라면이라도 먹고 나가라고 쌍심지(?)를 켰지만 '지금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놀이를 멈출 수가 없다.'고 하였다.

얼마나 놀이터에서 마구잡이로 뭉개고 놀았는지 돌아온 아이의 옷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함께 온 친구 녀석들의 옷도 말이 아니었다. 눈은 다들 허기로 몇 리는 들어가 보였다. 인즉슨, 녀석들은 집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누구 집에서 점심 먹었다며 서로 친구를 팔아 거짓말을 하고 논 것이었다.    

사례3

반면, 공부 잘한 한 둘째 조카의 경우 시험을 치고 점수가 나오면 자신보다 앞선 아이들에 대한 질투 땜에 성적이 올라도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다. 아주 잠이 싹 달아나고 속에서 자신을 향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고 하였다.

'똑같은 시간 공부했는데 왜 나는 등수가 낮은지 역시 내 머리는 돌이야.' 하며 죽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 죽고 싶었다의 정도가 어느 만큼이냐고 하니 배고파 죽겠다, 우스워 죽겠다식의 수사가 아니라 정말 목숨 줄을 놓는 그런 죽고 싶다였다고 하였다. 나 참. 그런 배수진을 친 마음으로 공부하니 그렇게 성적이 올랐는지 몰라도 정도가 지나침에랴.

"왜 그렇게 열심히 해야 되는데? 그냥 적당한 등수에 만족하면 안 되겠던?"

"몰라. 당시 한창 유행하던, 유럽의 성으로 안내하는 듯한 한 아파트 광고를 보며 나도 돈 벌어서 저런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어.ㅎㅎ"

"공부 잘한 학생의 동기가 기껏 화려한 개인의 삶을 위해서였다는 게 씁쓸하네. 그게 먹혔다는 것도 놀랍다. 내 친구의 경우 이 나라 교육을 뜯어 고쳐 보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고 목표를 이루던데 성(城)과 같은 아파트에서 공주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학습의 동기가 되었다니..."

"글쎄.. 요즘 공부하는 애들이고 시키는 부모고 간에 이 사회를 위하여 뭔가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동기가 좋아야 그 결과가 더 빛나고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는 한 것 같아. 내 경우 고교 때 너무 많은 정열을 쏟아 부어 지금은 그렇게 몰입하는 일이 안 돼. 오히려 지금 더 탐구해야 할 시점임에도...."

결론은, 현재를 살자

'기회비용'이라는 경제 용어가 있다. 말하자면 나의 아들과 막내조카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대신 성적이 나쁘다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다. 반면 공부 잘한  둘째 조카는 그 공부 덕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라는 인생 1회전은 성공했으나 문제는 더 이상 그 무엇에건 고교 3년 때와 같은 집중력을 발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조카에겐 그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음이 기회비용이라면 기회비용이라 할 수 있겠다. 언뜻 보기에는 모범생 둘째 조카의 기회비용이 적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다음에 고교시절을 떠올릴 때 공부 못한 막내조카의 경우 친구들과 놀았던 갖가지 사연이 있을 테지만 모범생조카의 경우 오로지 책상 앞에서 문제집만 풀었던 기억이 전부라면 얼마나 삭막한가.

서양 어느 교육학자가 말하기를, 과거에는 청소년기의 삶을 일러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이라 하였는데 이젠 다르게 보고 있다고. 즉, 청소년기는 미래를 준비하는 단계가 아닌 '청소년기'라는 바로 그 '현재'를 사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 말에 백번 공감한다.

내 아이나, 막내조카처럼 노는 것이 땡기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원 없이 노는 게 자신의 삶을 보다 충실히 사는 게 아닐까. 물론 이 녀석들은 노는 것의 반의 반 만큼은 공부가 싫으면 독서나 음악, 미술, 체육 중 한두 가지는 꾸준히 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되는 아이들은 어떡하냐고? 공부가 되면 공부를 하되 너무 점수와 등수에 연연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을 하고 대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 깊이 파고 드는 것이 남는 장사 아닐까싶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이미 중학교 때 영화에 눈 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영화를 두루두루 섭렵하였었다. 그가 그러지 않고 학창시절엔 오로지 공부만 하고 대학에 와서야 영화에 빠졌다면 얼마나 시간낭비 일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