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만 4년이 지났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 제사를 4번 지낸 것이다. 난 그 4번의 제사에 다 참석했는가? 1번밖에 안 갔다. 아버지 첫 제사 때 간 것이 전부다. 그때는 첫 제사다 보니 아버지로 인해 세상 빛을 본 자식들이 모두 모였고 시끌벅적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제사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회포나 회한이라든가 하는 감정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듯 다들 유쾌했다. 아버지가 워낙 '문제' 아버지셨으니 그립거나 아쉬울 틈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

그럼 두 번째 제사는? 까먹었다.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기일은 잘 기억되지 않았다. 이 날인가, 저 날인가 점을 치다 엄마에게 다시 물어봐야지 하다가, 또 며칠 지나고 나니 아버지 기일은 이미 지난 상태였다.

 

매번 깜빡깜빡하는 아버지 기일, 난 불효자?

 
"세상에 지 아부지 제삿날을 우째 잊어묵노? 돌아간 지 5년이 된 것도 10년이 된 것도 아닌데, 쯧쯧."

"양력으로 돌아가신 그날(2004년 2월 4일 입춘)을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다 보니 음력은 자꾸 헷갈리네. 그나저나 엄마 이참에 계속 모르쇠 하까?"

"몰라."

"엄마도 생각해 봐라. 영감 제사 매번 가고 싶나?"

"그냥 다들 지내니까 지내는 거지. 나도 이번에는 안 갔다. 다음에도 안 갈란다."

"엄마, 그러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오빠 보고 제사 지내지 말라 캐라. 아부지는 그런 것 안 원한다. 살아서도 아들 속을 그리 썩였는데 돌아가셔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을끼라."

"해석도 잘하네. 내는 몰라. 니 오빠가 지내면 지내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엄마가 그러니까 오빠가 감히 결심할 수가 없지. 아부지는 분명 좋은 데 갔다. 내 아부지 돌아가고 한 달쯤 돼서 꿈 꿨을 때 아부지는 고대광실 너른 집에서 대감 모자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유유자적하더라니까. 정말이야.(웃음)"

세 번째 제사 때는 고의적으로 빠졌다. 설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 제사인지라 설에 미리 오빠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세 번째 아버지 기일엔 오빠와 올케 언니에게 미안해서 뒷골이 '땡'겼다. 지나고 나서 조카에게 들으니 오빠가 열두 시까지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와서 참 안돼 보이더라고 했다.

해서 나는 또 오빠에게 이러저러해서 그랬다며 사과의 말과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빠는 마음을 비웠는지, 이해하는지, 아니면 나랑 대화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별 질책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한 출가외인에게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 니 좋을 대로 해라."

말은 그래도 목소리로 보아하니 나름 섭섭해 보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니가 인간이가 짐승이가?"하면서 무섭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할 수도 있을 텐데 오빠 또한 신사적으로 나오니 그냥 내친김에 계속 '개개'기로 하였다.

드디어 올해는 네 번째 제사. 두 번째, 세 번째의 연습이 효과가 있었던지 이번에는 미풍양속(?)을 거역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 아니, 확실히 '굳히기'에 들어갔다. 오빠 또한 '이것들(나와 둘째 언니)이 확실히 세 번씩이나 빠지는 것을 보니 영 구제 불능이구나'하며 체념을 굳히는 느낌이 들었다.

 

매년 아버지 기일은 좋은 일 하는 날

내가 아버지 제사를 안 가고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내게 제일 많이 하신 말은 "착하게 살아라"였다. 비록 취중이었을망정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그 말들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잘하면서 그런 말하면 수긍이 가겠지만 가족들을 괴롭히며 그런 말을 하니 그 말을 듣기조차 싫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그 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간 그 상실의 언저리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우리 인간이 꼭 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말하던 바로 그 '선한 삶'을 떠올렸다.

'옳지, 매년 아버지 기일에 즈음하여 꼭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하자.'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했지만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뿐이다. 다름 아닌 좋은 일 하는 단체에 소액의 기부금을 내는 것. 그동안 아버지 제사 네 번 중 세 번을 빼먹고도 하늘나라 아버지에게 전혀 죄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하늘나라 아버지와의 가상 대화)

 아버지 : 너무 적다. 좀 더 써라. 5만원이 뭐꼬?

나 : 시방 돈 없어요. 일단 시작은 이렇게 5만원부터 시작해서 차차 늘려 가겠심니더.

아버지 : 그래? 한번 믿어 볼까? 내가 다른 때는 몰라도 해마다 2월에는 꼭 점검할 끼이데이.

나 : 알았어요. 다른 때는 몰라도 아버지 기일을 즈음해서는 꼭 그 어딘가에 송금하겠습니다.

 

'기념일 후원'에 '추모 후원'도 넣으면?

 



월드비전 누리집에 들어가면 '기념일 후원'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무슨 기념일을 맞아 자축하면서 후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들의 첫돌이나 생일을 맞아서, 혹은 결혼 몇 주년 기념으로, 또 아니면 병원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퇴원 기념으로 감사한 마음에 내는 후원이다.

난 제사 대신 '추모후원금'을 자신이 좋아하는 단체에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분의 삶과 성향에 맞는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정의롭고 공정한 것에 무게를 두고 사신 분이라면 아름다운재단 '소금창고기금'에다 추모 후원을 하면 될 것이다.

기아에 대해 유난히 마음 아파하신 어른이라면 세계의 굶주림을 돕는 재단에, 노인 분들에게 애잔함을 드러내신 분이라면 노인복지 재단에, 반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면 아동복지 재단에, 또 아니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이었다면 문화예술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단체에 등등, 추모후원을 할 곳은 수두룩하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를 가족 안에서만 음식을 하고 제를 올린다면 가족끼리만 추모의 정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식으로 생전 고인의 삶과 뜻이 비슷한 곳에 추모후원을 하면 추모의 마음은 가족을 넘어 세상 속으로 퍼지게 될 것이다.

오래된 전통이기는 하나 '제사'는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원래의 그 좋은 뜻도 빛을 바래 '형식'만 남았다. 물론 아직도 제사가 가족의 화목을 도와준다면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제사가 들어 있는 달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한 게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고, 도망가고 싶어진다면 과감히 그 무거운 형식을 털어버리자. 대신, 형편에 맞게 부담도 없고 알맹이만 남는 '추모 후원'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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