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 3학년이 된 큰애가 엊그제 내일은 일기 검사를 하는 날이라며 일기장을 가져가긴 가야 되는데 고민이라고 하였다.

 “왜?”

“선생님은 일기를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루에 한번 쓰라고 했는데 나는 하루에 다섯 번 쓴 적도 있어 혼날까봐 고민이야. 그리고 기쁜 일 만이 아닌 다른 짜증나는 일도 썼기에 분명 혼날 거야.”

“걱정을 말아. 이 엄마가 보장한다. 절대 혼 안 난다. 외려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다.”

“아이다.”

“그럼 일기장 하나 더 사와서 집에서 쓰는 일기장, 검사 받는 일기장해서 두 개를 사용 할래?”

“응”

“그런데 지금 엄마가 문구점 갈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은 일단 선생님이 일기 많이 썼다고 혼내면 '몸'으로 때워라. 대신 엄마가 특별 위로금 500원 줄게. 혼 안 나면 없고...”

“뭐, 500원? 알았어. 호호. 선생님 안 아프게 때릴 거야. 호호”

하여간 이런 사연을 가지고 아이는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일기를 거두기만 하고 검사를 하지 않아서 일기장을 못 가져 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엄마 일기장 사왔나?”

“아참, 못 샀다. 니가 사올래?”

“싫다.”

“그럼 내가 갔다 올 게 조금 있다가. 지금은 바쁘다.”

 
“그라믄 A4용지에 줄그어 도고.”

“그냥 오늘은 쓰지 말고 건너뛰어라.”

“그럴 수는 없어. 줄 그어 줘. 혹시 더 많이 써야 될지 모르니 줄 넉넉하게 그어 도고”

이 부분 까지 보자면 내 아이가 상당히 일기쓰기에 재미를 느끼는, 이즈음 보기 드문 아이 같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일기는 게임을 위한 수단 일 뿐

 녀석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저 말대로 그대로 읊으면, ‘일기는 목표가 아니라 게임을 위한 수단’이란다. 참 그놈의 게임이 뭔지.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메이폴 스토리에 푹 빠졌다. 지난 2학년 때부터 슬슬 게임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더니 2학년 겨울 방학 때는 얼씨구나 날이면 날마다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기준을 정했다. 한 시간은 공짜고 더 하고 싶으면 일기를 한쪽 쓰라고 했다. 그 참에 일기를 좀 쓰게 해 보려고, 일기 한 쪽에 30분 내용 훌륭하면 40분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녀석은 일기를 쓰라하면 쓸게 없다고 징징거리거나, 한쪽을 채우기는커녕 글자를 최대한 늘여 써서 많아 보이게 하는 꼼수를 부리곤 하였다. 그랬기에 혹시나 해서 무심코 던져본 말인데 너무도 쉽게 응하는 것이었다.

 
“엄마, 한 장 쓰면 몇 분이야?”

“뭐, 한 장?”

“그래 한 장 도 쓸 수 있다. 게임을 위해서라면.”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썼다. 

 
“처음 한쪽은 30분, 내용이 좋으면 40분인데 그다음 한쪽은 10분 추가이고 그다음다음부터는 한쪽 쓸 때마다 계속 5분씩 추가다. 싫음 말고. 게임이 마냥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기에 ‘역할증’ 들어 간 거다.”

“알았다. 쓰지 뭐.”

 
그렇게 지난 2학년 겨울 방학을 시작했다. 일기를 자발적으로 쓰자고 마음먹으니 그토록 싫던 일기도 순간에 되는지 아니, 게임이라는 목표가 있어서 그런지 한쪽은 기본이고, 한쪽 다음부터는 ‘역할증’이래도 불만 없이 어떻게든 한 시간을 채워 공짜 한 시간에다 일기로 벌어 한 시간을 채워 두 시간 동안 원 없이 게임을 하곤 했다.

 
“야, 두 시간 한꺼번에 하는 것은 안 된다. 한 시간 하고 좀 놀다가 다시 한 시간 하던가 아니면 30분씩 쪼개서 하셔.”

“알았어.”

그렇게 게임과 일기와 더불어 겨울 방학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이월 중순 우리가족은 살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일기를 쓰는 것도 좋지만 게임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뭔가 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사’는 좋은 핑계였다.

 


“이사 가면 좀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니? 게임 같은 것은 좀 줄이고... ”

“뭐든지 엄마 맘대로가? 흥? 그럴 수는 없어.”

“엄마가 게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신문을 가리키며) 이 의사 선생님이 쓰신 이유와 똑같아.”

형광색으로 칠한 부분을 크게 읽게 하고는 새로운 계약(?)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이사 가기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게임 무제한으로 해라. 일기는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된다. 정말 해도 되나 묻지도 말고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밤이 새도록 해라. 대신 이사 가면 당분간 게임 없이 살아보자.”

 “정말? 무제한? 까악!” 

녀석은 이게 어인 횡재인가 하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나 무제한이라는 말의 한정
없음과는 달리 그렇게 무제한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기에 이사를 와서 처음 며칠은 그런대로 보내더니 시간이 지나자 녀석의 마음속에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나 보았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마냥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불쌍한 생각도 들었는데...

 “엄마, 일기 쓰면 시간 줄거가?”

“일기? 한 번 생각해 볼까? 그런데 이번엔 조건이 저번과는 다른데?”

“말해봐라.”

“기본으로 주는 시간은 없고 니가 일기를 쓴 시간만큼만 하던지.”

“진짜?”

녀석은 일기장을 집어 들더니 ‘도도도도도.....’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게임을 많이 하기 위해서는 일기의 소재가 많이 떠올라야 하는바, 나의 목표는 녀석의 일기인지라 ‘쓸게 없다’는 말이 나오면 슬쩍 쓸거리를 제공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표현하는 방식을 조금씩 가르쳐주곤 하였다. 

그렇게 일기를 자꾸 쓰다 보니 아이의 글쓰기 양과 질이 조금씩 좋아져서 다시 규칙을 바꾸었다. 이젠 예전의 17줄 공책은 싱거워 21줄 공책을 사주었고 어쩌다 보니 계산하기 좋게 처음에는 40줄에 40분 그다음부터는 40줄에 20분을 주기로 하였고 녀석도 좋다고 하였다. 즉, 일기 두 장을 쓰면 한 시간 게임할 수 있다는 셈이 나온다. 나로선 남는(?) 장사였다. 

마무리...

내 어릴 적, 일기쓰기를 추억하자면 일기쓰기가 재미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쓸거리도 별로 떠오르지 않고... 만날 ‘고무 줄 놀이, 땅따먹기, 공기놀이하다 날이 저물었다.’였다. 그에 비하면 내 아이의 일기는 내 어릴 적 보다는 소재가 풍부하다 싶은데  일기가 목적이 아니고 게임이 목적인 게 문제다. 

내 마음이야 일기를 수단으로 게임을 하다가, 어느 순간, 띠~잉! 그 가치가 전도되어 일기가 목적이 되고 게임은 시시해지길 바라지만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만약 그런 날이 안 오면 난 또 잔머리를 굴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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