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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파란하늘 하늘이 청명하고 깔끔했다. 천왕봉 가까이서 저런 하늘을 볼수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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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어 보니 이번 지리산 산행은 2009년 친정언니와 간 이후 어언 9년만이었다. 그때는 무박 2일의 여정이었다. 아이들도 어리고 해서 최단 시간 지리산의 절반을 걸어보고 서둘러 돌아오는 것이 가족에게 덜 미안하고 효율적이었다. 또 다소 무리이기는 해도 새벽부터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게 매력 있었다.
새벽 3시에 중산리에서 등산을 시작해 종일 걸어 오후 5시 무렵 거림골로 하산하면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와 충만감에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그럴 때면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한 번씩 지리산을 올라야지 다짐하지만 도시로 돌아오면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말마다 산이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라도 보게 되면 안 가는 게 돕는 거라는 변명도 통하니 잊고 살기 딱 좋았다. 그래, 내 집이 제일 좋아, 하면서도 이러다간 앞으로 지리산 열 번도 못 오르고 내 인생 끝나면 어쩌나 생각하면 또 그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지인에게 추석 안부를 묻다가 지리산 종주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내 동공이 팽창했다.
"뭐라고요? 지리산 종주?"
"네~ 지리산 종주!"박테리아가 물과 온기를 만나면 바로 활성화되듯이 지리산 종주란 말에 뭔가 내마음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1박 2일정도 따라붙으면 많이 방해 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같이 갈래요?"그렇게 시작된 지리산행이었다. 이번엔 아이들도 크고 해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진주에는 몇 해 전 상하이여행에서 알게 된, 산을 나보다 세제곱은 더 좋아하는 한 언니가 살고 있었다. 나는 지리산 갈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그녀의 말을 잊지 않았고 적금해둔 돈 찾듯 당당하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지리산 함께 갈래요? 아니면 하루 밤 문간방에서 재워줄 수 있나요?"
"둘 다 가능합니데이~"덕분에 새벽에 갈 것 없이 전날 진주 언니 네서 자고 아침 첫차로 중산리를 가면 되었다. 코스는 자연스레 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세석산장으로 정해졌다. 세석산장에서 일박한 다음 날 진주 언니와 나는 거림골로 하산하고 종주 지인은 노고단 쪽으로 산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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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색 이파리와 너머의 흰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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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의 지리산은 평화롭기 그지없어
지난날 무박 2일의 주말 산행에서는 지리산은 항상 산이 아니라 저자거리처럼 복잡했었다. 사람이 많아서 무섭지 않은 것은 좋았으나 저마다 양손의 등산지팡이로 땅을 치니 그 소음이 고역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중산행은 산을 전세낸 듯 한가로웠다. 적당히 오고 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가웠다.
전날 진주 날씨가 구름이 끼고 저녁 무렵엔 비도 잠깐 비췄기에 필시 천왕봉엔 비바람이 몰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에 날도, 날도 그런 날이 없이 좋았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구간에서는 위아래 모두 탁 트인 풍경은 물론 특히 더할 수 없이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주변 지리산 산줄기가 굽이굽이 끝없이 뻗어 마을에 닿았고 위로 올려다보면 지리산 풍경의 절반은 파란 하늘이 차지하고 있었다. 맑고 청명한 하늘과 그 하늘에서 뿜어져 나오던 축복 같은 햇살은 시골들판이나 도시공원에서의 그것과는 또 다른, 가히 명작이었다. 그 하늘에 흰 구름이 스칠 때면 그 어우러짐은 그것대로 고왔다.
뿐인가. 바람이 단풍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우우우, 스삭스삭, 쏴아쏴아 처절한 몸부림은 그 자체로 한편의 웅장한 음악이었다. 정말 이 산의 주연은 자연이고 인간은 조연도 못 되는 지나가는 1,2,3에 불과했다. 지리산 온 천지에 넘치는 것은 쏟아지는 햇살, 끝없는 하늘과 흰 구름, 온갖 나무와 풀과 이끼, 어딘가에 있을 짐승과 새들이었다.
우리 인간 등산객의 수는 극히 미미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지나가는 1,2,3으로 그날 그 시간에 출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일치기가 아니고 산장에서 하루를 묵기로 예약을 하고 가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천왕봉 오를 때는 늘 힘들었는데 이번엔 쉬엄쉬엄 충분히 쉬어가며 걸었더니 별로 힘들지 않았다. 비바람 몰아치는 천왕봉에서 혹시 얼음이라도 되면 어쩌나 걱정한 나머지 배낭 빵빵하게 여벌의 옷을 가져간 것도 무색했다(물론 한시가 다른 게 산정의 날씨이니 막상 쓸모없더라도 준비는 꼼꼼히 해둬야).
지리 '산장종주' 어떨까
지리산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좋다. 그 넓고 깊고 푸르고 때로는 세찬 비바람도, 한없는 침묵 같은 육중함도 좋다. 평소 초면의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은 통한 듯 느껴졌다.
올해, 1주에 한권 1년 52권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여전히 잘 실행하고 있다는 친구와 지리산 다녀온 후 통화하였다. 친구는 나의 지리산행을 무척 부러워하며 지리산 오름이야말로 '해보고 죽자' 목록에 꼭 올리고 싶은 주제인데 엄두가 안 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엄두를 내어도 되는 것이 400미터 정도 고지의 동네 뒷산 오를 정도만 되면 지리산도 문제없다고 본다. 산 잘 타는 사람은 하루 만에 종주하면 되고 관절 자신 없는 사람은 형편에 맞게 4~6일 천천히 걸으면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등산에 단련되지 않은 덕에 천천히 산장마다 확인 도장을 찍으며 머물러 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유유자적 산장을 휩쓸다보면 이 산장은 이런 느낌, 저 산장은 저런 느낌 각 산장이 주는 매력을 골고루 체험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속세의 일은 일주일 해외여행 갈 때처럼 마무리 해놓고 지리산으로 일주일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문득 산장투어를 말하고 나니 나야말로 언젠가는 치밭목에서 노고단까지 갔다가 다시 치밭목으로 돌아오는 지리산도 지리산장도 왕복종주를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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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도 지는 순간이 저렇게 아름다울수 있다면 | ▲ 세석으로 가는길, 눈부신 햇살과 평화로운 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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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정상에서 치밭목 쪽을 바라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