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첫번째 기고 글이 본의 아니게 뜨거운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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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참 무례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지난 1차 용산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시신을 빼돌리고 유족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부검을 한 경찰과 정부로부터 아직껏 사과의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며 울부짖었다.

참사의 책임을 떠넘기려 전국철거민연합 '마녀사냥'에 나선 조중동 기자들에게는 제발 우리를 두 번 죽이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추모제가 열린 1월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7명의 여성을 연쇄 살해한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했다. 그 기사 어디에도 살인범에게 희생당한 피해자 유족의 입장은 실려 있지 않았다.


   
  용산 참사를 겪은 유가족 대표가 연단에 올라가 "이명박 대통령께 눈물로 호소한다"며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기범 언론노보 기자  
 
신상공개 반대는 가해자 인권만을 위하는 것인가

살인자 인권 운운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는 또 한 번 시달릴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용산참사 유족과 함께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을 외치고 있는, 줄곧 흉악범 신상공개를 반대해온 인권단체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이 가장 많이 받는 비난은 “왜 가해자 인권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아니라 피의자의 인권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와 함께 국가권력으로부터 언제든지 피의자로 지목될 수 있는 모든 주권자들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런데 피의자의 인권을 박탈해야만 피해자 인권이 보장되는가. 흉악범 신상공개를 둘러싼 논란에서 정작 피해자와 유족의 입장은 생략되기 일쑤다.

가해자의 얼굴이 몇날 며칠 언론에 등장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유족이 살인범의 얼굴이 만천하에 알려지기를 바랄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요구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유족을 진정 위하는 길일까.

사람들은 또 묻는다.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에게도 인권이 있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인간이 아닐 수는 없다. 또한 흉악범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우리마저 그럴 수는 없다.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만행을 저질러 타인의 인권을 유린했지만 사회는 그를 인간으로서 처벌해야 한다.

그렇다고 범죄자에게 모든 인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징역형은 많은 인권을 제한한다. 거기에 초상권 하나 더 박탈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초상권은 인격권 중 하나다. 얼굴공개는 초상권을 침해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세계인권선언 제5조는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대우 또는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는 “연쇄살인범만큼은 (육체적 고문만 빼고) 정신적 고문이나 가혹행위, 모욕적인 대우나 처벌은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언론은 어떤 알 권리를 위해 무례해져야 하는가


이번 논란의 중심에는 언론이 있다. 사실 언론만큼 무례한 집단도 없지만 사회정의의 실현과 실체적 진실의 규명을 위해 우리 모두 그 무례함을 감수하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제 입맛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들먹이며 집단적 단죄를 서슴지 않는 언론이라면 문제가 많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한미FTA 협상이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 삼성비자금 X파일 사건이나 수 차례의 과거사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서는 국익과 사회통합을 내세워 국민의 알 권리를 묵살해왔다.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한 바로 그날 군부대 내의 유흥주점 운영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잠입취재 한 MBC기자에게 유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 또한 두 신문은 외면했다.

그리고 용산 4지구 참사현장에서 국민의 알 권리는 열흘이 넘도록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는 연쇄살인범의 얼굴공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용산참사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만 대통령의 무죄추정 원칙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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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2일 경기도 마석 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의 대규모 불법체류자 단속이 이뤄졌다. 누구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고 누구는 그야말로 인간사냥이었다며 당시를 전한다. 가구공단의 모든 출입로는 사전에 봉쇄되었고 법이 정한 단속절차와 규정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슬에 묶여 보호소로 끌려갔고 몇몇은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갔으며 그 중 몇은 수술까지 받아야 했지만 법무부는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다고 발표했다. 이번 단속은 몇 달 전 법무부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현재 5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 중 20만 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를 향후 5년 이내에 10만 명으로 줄이겠다는 보고에 따라 실행된 것이다. 그 보고에는 또한 이주민들이 밀집한 마석 가구공단 일대가 슬럼화가 되어 범죄우려가 높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이러한 대규모 단속이 이 정부 들어서 벌어진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어왔고 우리가 미등록 이주노동자, 소위 불법체류자와 국가경쟁력강화 사이의 함수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무수한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이 두 명 중 한 명 꼴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추방될 것이고 정부는 일자리를 10만개 더 만들었다고 발표할 것이다.
한국에 온지 9년이 된 하킴(인도네시아, 36)은 몇 해 전에 마석에서 일한 적이 있다. 톱밥을 비롯한 온갖 유해먼지가 날리고 하루 종일 뼈마디까지 진동시키는 소음 가운데서 하루 네 다섯 시간만 잠을 자면서 일을 해야 하는 가구공장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거기서 그는 운이 좋게도 두 번이나 단속을 피했다. 두 번째에는 공장주가 몰래 열어준 비상문을 통해 옥상에 올라가 동료들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마석을 나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으니 언제든 오라는 연락을 가끔 받았지만 다시 들어갈 생각은 없다. 경기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져서 일자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으면 그의 생각도 달라질 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도 마석에 일자리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변동에 따라 쓰고 버려지고 다시 재활용되는 사이 이주민 100만 명이 넘었다. 그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민들이다. 공단 주변이나 도심에 있는 이주여성들은 그나마 불러주는 한글교실도 있고 김장김치 담그기 행사 같은 것에 얼굴을 내밀 수도 있지만 농촌지역으로 내려갈수록 그들은 고립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같은 처지의 또래들끼리만 어울리며 지역 어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물론 한국에서 결혼한 이주민들 사이의 자녀는 다문화 가정의 범주에서조차 제외된다.) 앞으로 10년 쯤 뒤면 이 아이들이 10대 후반의 청소년/녀, 20대 초반의 성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사회가 얼마나 준비되었는가 하는 지적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다문화 정책은 한국문화에 적응시키기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국경 없는 시장으로 해서 국경 없는 마을이 여기저기 생겨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국경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지만 노동은 그 국경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이고 국경보다 넘기 어려운 선들이 우리 안에 보다 분명히 그어졌다. 2008년 12월, 안산에 있는 ‘국경없는 마을’을 찾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주와 노동

네팔에서 온 레이탄(23)은 손가락을 활짝 펴 보이며 10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질문을 네팔에서 한국까지 몇 시간이나 걸렸는지를 묻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레이탄보다 두 해 먼저 한국에 온 셀마(네팔, 38)가 웃으며 2개월이 되었다고 고쳐 알려준다. 이 둘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공장 기숙사에 함께 묶고 있다. 쉬는 날을 맞아 셀마는 쇼핑도 할 겸 레이탄에게 이곳 ‘국경없는 마을’을 소개시켜주러 데리고 나온 길이다.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해서 한 달에 100만원 남짓을 손에 쥐는 레이탄은 기대했던 것보다 월급이 적지만 이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한국에 와 일자리를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이 없어 고달프기는 하지만 말이다.

레이탄은 오늘 휴대전화를 살 생각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공짜폰이 있네, 1만원이면 즉시 개통이 가능하네, 호객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도 이 정보화 사회에 발을 디딘 이상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이 욕설과 함께 담배이다. 전화와 욕설과 담배는 이제 레이탄의 일상이 되어간다. 어떤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더욱 고향을 그립게 할 것이다. 

셀마는 네팔에 부인과 여섯 살 된 딸이 하나 있다. 그는 요즘 잔업이 줄면서 고향집에 일주일에 두 세 번 하던 전화통화를 한 번으로 줄였다. 반면 지갑 속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이주는 어떤 결핍을 동반한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일자리가 되었든, 새로운 문화가 되었든 결핍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그 무엇이 그들의 이주노동을 견디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곳은 나름의 이주노동의 내력이 있는 곳이다. 20여 년 전 안산에 반월공단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로동과 개봉동, 수원과 부천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한국 노동자들과 그들의 식솔들에 의해 배나무 밭이던 원곡동 산등성이에는 우후죽순처럼 벌집들이 세워졌다. 출근 시간 공단으로 들어가는 통근버스는 항상 원곡동 정류장에서 만차가 되었고 퇴근시간이 되면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노동자들도 이곳에 내려 한 잔 술을 걸치고 갔다. 그러던 풍경이 사라지고 지금과 같이 50여 개의 나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국제적 거리로 탈바꿈한 계기는 1997년 IMF 사태였다고 안산이주민센터 대표 박천응 목사는 말한다.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안산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거주하지는 못했어요. (원곡동이) 워낙 교통이 좋으니 이곳으로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 방을 가진 주민들이 외국인들에게 방을 내놓기를 꺼려했죠. 그래서 다들 공장 기숙사나 시내에 머물면서 공단까지 출퇴근을 하고 그랬죠. 그런데 IMF 사태가 터지고 일자리가 없어지니까 한국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방들이 텅 빌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서 이 동네가 티켓다방이랑 작은 단란주점이 즐비한 슬럼 비슷하게 되어 갔어요. 계속 방을 놀릴 수는 없으니까 주민들이 하나 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안산지역이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괜찮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많이 모이게 되었죠. 한때는 두 세평 남짓 한 방에 열 명이 넘게 사는 방도 있었어요.”

반월공단이 들어설 당시 여기로 모여들어 벌집을 지었던 한국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흘러들어 갔을까. 지금 국경없는 마을 거리를 지나는 이주노동자들 중에도,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 상인들 중에도 90년대의 원곡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원곡동에서의 이주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경과 시장

지난 20세기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간도와 연변으로, 남에서 북, 북에서 남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그리고 독일과 중동으로 쉴 새 없이 노동을 찾아 이주했다. 어쩌면 이주노동은 특정시기, 특정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대의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리적 국경을 넘는 일만큼이나 마음속의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하다.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뒤 13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푸웬(인도네시아, 46)을 만난 것은 국경없는 마을 초입에 있는 공원에서였다. 그는 부천에 살고 있지만 가끔 고향 친구들도 만나고 고향음식도 먹을 겸 이곳에 들린다. 푸웬은 처음 한국에 와서 버스를 탔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버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무도 옆자리에 앉지 않는 거예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내가 한국에 살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한국 텔레비전도 사고 세탁기랑 냉장고도 샀어요. 하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간 사람들이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가는 건 아니니까요.”

문득 오래 전에 만났던 베트남 대학생이 한국의 국제결혼 행태에 대해 분개하면서 “일본이나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지만 그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 집단이 가진 천박함이나 품격은 다른 집단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원 맞은 편 ‘월드마트’라는 간판을 단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중국인 점원과 스리랑카에서 온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가격흥정이 쉽지 않다. 보기 딱했는지 가게 주인이 나선다. 주인아주머니의 말투에도 연변 사투리가 묻어난다. 이곳에서 가게 문을 연지 5년이 좀 넘었다는 아주머니는 비록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 그 사람의 국적을 판별해낼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국경없는 마을 국제공용어인 한국어에 능숙한 탓에 그녀는 방금과 같은 어려움을 자주 겪지는 않는다. 방금 그 스리랑카 사람도 이 가게 점원도 사고파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한국어를 곧 익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안 좋은 게 여기만이 아니니까, 요새 힘들지 않은 사람들이 없잖아요? 경제가 나빠서인지 단속이 강화되어서인지 사람 숫자가 줄기는 줄었어요. 물건 값도 많이 깎으려고 하고.”

원곡동 거리를 지나는 이주민들 대부분은 한두 개씩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닌다. 일주일치 혹은 몇 주치의 먹을거리를 쉬는 날인 오늘 장만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추워진지도 꽤 되었는데 며칠 전 한파 덕분인지 전기장판을 들고 가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겨울은 이래저래 쓰임새가 늘어나는 계절이다.

바다 건너 뉴욕에서 시작된 경제 한파가 원곡동까지 불어 닥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지 3년이 된 아구르(인도네시아, 35)는 지금 있는 공장의 일거리가 줄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을 못하는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정부에서  불법체류자로 지칭하는 체류기한 3년을 넘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단속을 강화하자 공장주들은 이들의 고용을 꺼리고 있다. 대대적인 단속 이후에는 산업연수생이 오면 그 숫자만큼 이들을 자르고 연수생을 고용한다. 작업량이 줄게 되면 해고 1순위가 되는 것도 당연히 이들이다.

한편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아구르의 한 친구는 불법체류 상태에서 일을 하다 몇 달 치 월급을 못 받게 되자 한 이주노동자센터와 의논한 끝에 결국 출국을 선택했다. 그 것만이 밀린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에 나와 물건을 고르는 일이 어쩌면 이들의 삶이서 가장 마음 편한 선택의 순간일 것이다. 이보다 어려운 선택을 이들은 수도 없이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야 한다. 외환송금환전소 앞에서 만난 조우세(인도네시아, 32)는 내년 6월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한국에 남을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월급은 줄고 먹는 거는 계속 비싸져서” 집으로 보내는 액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는 그동안 받은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마련했지만 선뜻 돌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이 국제적인 불황의 여파는 한국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미칠 것이고 오히려 한국보다 경제사정이 더 안 좋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살림살이가 더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도 영업을 하는 국경없는 마을 은행 앞에는 송금하려는 이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선

국경없는 마을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안산 외국인 주민센터’는 매우 현대적인 건물이다. 건물 앞 설치물이며 벽화 하나에도 지역 특성에 맞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매년 열리는 이주노동자들의 축구대회 ‘안산 월드컵’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고 이곳에 가게를 열어볼까 수소문을 하는 중이라는 라울(필리핀, 40)을 그 앞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해 천안에서 한 중국 여성과 만나 결혼을 하고 한국에 정착할 생각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국경없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이주민들이 허물없이 지내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동네에서만큼은 이방인을 향한 경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처음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서 지하보도를 건너 국경없는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어느 새 이방인으로 변해버린 자신과 무수한 이방인들이 모여 다수를 이룬 이주민들을 발견하고는 당혹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새로움에 대한 설렘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시선일 것이다. 국경없는 마을 가로등마다 펄럭이는 다채로운 국기들과 그 아래 버젓이 걸려있는 ‘불법 흉기 소지자 단속’을 알리는 플레카드는 이주민들의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한다.

요기를 할 겸 들어선 만두집에서는 한국인 주인장이 만두를 빚고 있다. 중국동포인 그의 아내는 탁자에 올려진 칼국수에 손도 대지 못하고 꽈배기 반죽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는 천원 장사여서 그런지 경기가 안 좋은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는데.”라면서도 주인장은 천원에 두개 하는 만두를 연신 빚어낸다. 그래도 임대료가 슬슬 올라서 걱정이라는 그가 하루에 빚는 만두의 개수는 수천 개는 족히 될 것이란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야 칼국수에 젓가락을 가져갈 수 있을 듯 보였다.

국경없는 마을에서도 중국동포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중국음식점이며 마트나 채소 가게 등에서 중국동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건설현장에서 시작해 용역업체를 차린 이들도 있다. 이들이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언어적 이점과 함께 피부색도 크게 작용했다. 음식점과 같은 서비스업에서 중국동포가 아닌 이주민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한눈에도 외국인임이 알아차릴 수 있는 누르(방글라데시, 24)는 국경없는 마을에 왜 자주 오느냐는 질문에 방글라데시 말인 벵갈어가 나오는 노래방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지난주에는 몽골 친구와 함께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그의 꿈은 돈을 벌어서 방글라데시에서 노래방을 여는 것이라는데 연신 웃음을 지어보이는 누르의 이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원곡동 제2의 동사무소 격인 안산 외국인 주민센터는 지난 3월 문을 열었다. 아직도 많은 주민센터(동사무소)에서 이주민 담당 공무원이 아예 없거나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지만 이곳에서는 열일곱 명의 공무원이 상주하고 있고 8개국의 언어로 상담이 가능한 통역지원실도 갖추고 있으며 한국어교실을 비롯한 이주민들의 각종 모임과 행사가 진행된다.

운이 좋게도 나는 캄보디아 이주민 한국어교실 수료식을 참관할 수 있었다. 여기 모인 이주민들은 오늘 한껏 멋을 부린 모습들이다. 충남 당진에서 한국어교실에 참석하기 위해 일요일마다 올라왔다는 초롱원(캄보디아, 25)은 좀 더 한국어를 배워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편 몇몇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배우기보다는 이렇게 한 주에 한 번씩 고향사람들 만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인 듯 보였다.

많은 결혼 이민자들, 이주여성들이 한국어교실, 한글교실을 찾는다. 한국어는 그들이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반면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화는 열등한 것으로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어떤 이주민 단체는 이주여성들을 상대로 자기 나라 동화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교실을 열기도 한다. 한 베트남 이주여성은 남편과 사별했지만 현재 안산 중심가에서 베트남 쌀국수 집을 열어서 안정되게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박천응 목사는 누가 그녀에게 김치를 한국 사람만큼 담글 줄 모른다고 뭐라 할 수 있겠냐며 한국사회의 다문화 정책을 꼬집었다. 진정한 다문화란 다른 것이 공존하고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료증이 전달되고 간단한 다과회까지 마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건물을 빠져나간다. 이들이 한국어를 더 잘 배워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캄보디아 말을 가르쳐주는 상상을 해본다.

한편 안산이주민센터의 류성환 사무국장은 외국인 주민센터를 비롯해서 여러 이주관련 단체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숫자는 전체 1%에 불과하다고 한다. “행사나 모임이 아무리 많아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한 사람에게 여기서도 나와라, 저기서도 나와라 하며 경쟁하는 경우도 생겨요. 어떤 이주여성은 제발 좀 가만히 내버려둬라 그러기도 하지요.”




인터뷰

날이 저물 무렵 목도 축일 겸 외국인 주민센터 맞은편에 보아둔 인도네시아 식당을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스무 명 남짓한 시선이 내게 쏠리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내게는 매우 낯설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익숙할법한 시선과 공기다.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앉았다. 식당은 마치 먼 휴양지처럼 인도네시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시큼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담배냄새까지. 어느 덧 긴장이 풀리고, 맥주병이 반 쯤 비어 갈 즈음에는 저편 테이블에 안주도 없이 달랑 소주 한 병을 두고 앉아있는 이가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까닭에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합석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리이디(인도네시아, 34)라며 내게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했다. 월급을 못 받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 물어본다.

“지금은 월급 받아요. 계약서에 월급 100만원 써 있어요. 그런데 계약서 없으면 언제 100만원 그랬냐 하고 80, 90만원 줘요. 한국사람 왜 거짓말해요? 원래 거짓말 잘 해요? 왜 그러는 거예요?”

한국에 온지 5년째인 리이디는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재작년에 한국에 온 그의 부인은 경북 구미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그는 부인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구미로 내려간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그는 말이 많아졌다.

“한국경제 잘 살아, 인도네시아 못 살아. 나 한국에 와서 일해. 인도네시아 잘 살고 한국 못 살면 나 안 와! 지금 한국 사장 좋아. 나 일 열심히 해. 한국 사장, 과장 막 이 새끼, 씨발, 욕하고 그러면 일 열심히 안 해. 한국사람 왜 그러는 거예요?”

나쁜 사람들이어서, 돈 욕심이 많아서, 자기도 그렇게 당해서, 궁색한 답변이 몇 차례 반복되었지만 그의 ‘한국사람 왜 그러는 거예요?’는 계속 되풀이되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이제 일곱 살이 된 그의 아들 휘크리가 있다.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이 잠시 환해진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오토바이 가게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동생이 운영하는 그 가게로 돌아가 휘크리를 뒤에 태우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 도로를 달릴 날이 언제 올 것인가. 
 

 


국경없는 마을에서의 인터뷰는 툭툭 끊겼다. 질문은 가닿지 못하고 메아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무수한 이국의 언어들이 떠돌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리이디는 옆에 앉아서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다. 지금도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상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목소리를 높일 뿐인지 알 수 없다. 한국어교실에서 만난 이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반말에 익숙하다. 그들은 한국어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 2009년 1월 <공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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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라고 한다. 올해는 태풍도 한 번 지나지 않았고 일조량도 넉넉했던 덕분이라는데 어쩐 일인지 나락을 베는 농민들의 마음은 흉흉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된 까닭일까. 어쩌면 농업이 산업으로, 먹거리가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바뀐 뒤부터 아닐까.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돈이 반 토막 나버린 뒤숭숭한 요 몇 달 사이에도 농민의 노동의 결과는 고스란히 돈이 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늦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9월 중순 무렵부터 농민들이 출하거부 투쟁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 지은 농토를 갈아엎고 관공서 앞에 쌀가마니를 쌓는 광경이야 이미 낯설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지만 출하거부라면 노동자들로 치면 총파업인 셈이다. 그만큼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을 만나러 전남 영광을 처음 찾은 것은 이제 막 추수가 시작될 무렵인 10월 초순이었다.



농민, 총파업에 찬성표를 던지다


“지난 8월 26일에 농민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나락 40kg 한 가마니에 수매가 6만 원, 정부 보조금 1만 원해서 7만 원이 되지 않으면 출하거부 찬반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죠. 그리고 쌀 유통구조 문제가 워낙 심각하니까 생산유통조정위원회를 만들자는 요구도 있었고. 바로 다음날 영광 대마면에서 비상총회를 했어요. 쌀농사 짓는 170개 농가가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찬성 164대 반대 6으로 출하거부 투쟁을 하기로 결정했죠.”


영광군 농민회 나운림 총무부장은 벽보 한 장을 펼쳐 보인다. 거기에는 “공공비축미 수매 전면 거부”, “농협이나 시중 출하 절대 금지”라는 행동지침과 함께 8월 27일 대마면을 시작으로 9월 24일까지 진행된 찬반투표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광군 8개 읍면에서 적게는 93.9%부터 많게는 97.3%까지 찬성표가 나왔다. 이 투표결과를 갖고 농민회는 9월 26일 농협, 영광군청 등 관계기관과 간담회를 가졌고 현재 영광군 농협은 면지부별로 수매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영광군은 전체 인구가 6만 정도고 쌀농사를 짓는 사람이 7천명쯤 되는데 그중에 5천6백명이 투표해서 95% 이상 찬성이 나온 거니까 거의 압도적 찬성인 셈이죠.”


총무부장은 벽보를 말아들고는 염산면 이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으니 같이 가잔다. 직접 목소리를 들어보라는 얘기다.


“여기 벽보는 마을 회관에 붙이십쇼. 농협이 나락 값 6만 원 요구를 받을지 말지 내일까지 이사회를 거쳐서 결정을 한다고 허니 기다려보면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만약 부결되면 비상대의원총회라도 요구해야 허고. 거기서도 부결되면 농협 틀어막는 거고. 그리 알고 이장님들은 그전에 마을에서 수매하는 일이 없도록 해줘야 해요.”
“투표한 사람들이야 다 그렇게끔 허겄지만 돈 급한 노인 분들이 팔겄다고 그러면 뭔 수로 막아야?”
“수탁제도도 있으니까 돈이 급하면 일단 농협에서 돈을 받아쓰고 출하거부는 계속하면 되여. 어렵게 생각하면 안 돼. 절대 쌀은 내지 마시고. 농협에서도 그 정도는 협조를 해줘야지 않겠어?”
“농협이 앞장서서 나락 값을 내리려고 하는 놈들인데…. 농협이 농민편이 아니고 지들 흑자 보려고 하잖어. 농협이 농민 등쳐먹는 데 아닌가.”
“돈은 없지. 마방 기다리는 게 한계가 있지. 쉬운 일이 아니여. 빚 갚을 데는 이자가 차곡차곡 쌓일 텐데.”
“그러니까 늘 쌀값이 정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거고 맨날 농민들만 손해 보는 거여.”
“아니, 우리 동네는 전부 다 안내기로 했다니깐. 일단 하기로 했으면 해야제. 이번에 우리가 나락을 아예 안 내버려야 정부에서 쌀값을 좌지우지 못하지.”


어느 한 구석 끼어들 새도 없이 농협과 정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잠시 회의장을 나와 담배를 태우던 염산면 두리1구 박완진 이장(66)은 “이거는 앞으로 농사짓지 말라는 이야기”라며 입을 연다.


“비료 값이 20kg 한 포대에 5천 원 하던 것이 2만 원을 넘어섰고, 기름 값은 작년에 700원 하던 것이 1,300원이 됐고, 사료 값은 재작년부터 여덟 차례나 올라서 거의 100% 인상됐어. 그런데 쌀값은 10년 전에 비해서 오히려 내렸다니께. 6만 원 하던 것이 4만8천 원으로 떨어진 것이 언제여? 그런데 몇 해가 지나도 오를 생각을 안 해. 농사를 지어서 한 해 5천만 원 벌면 빚이 1억이여. 농사를 짓는 만큼 빚이 늘어. 시골에 사람이 점점 주니까 이젠 아예 사람 못 살 곳으로 만드는 거여, 뭐여?”


옆에 있던 염산면 농민회 강상호 씨(45)는 “사태가 이런데 정부가 앞장서서 올해는 대풍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벌써부터 쌀값을 잡으려” 하는데 농민들이 더욱 분개한다고 거든다. 지난 추석을 며칠 앞두고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나서서 농산물 가격을 40% 인하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했고 추석 연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배 값 폭락에 비관한 나주의 한 농민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물가지수 1순위가 쌀이라고 하니 이 정부에서 서민경제 안정을 빌미로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면서 “어떻게든 쌀값을 때려잡으려고 할 게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강 씨의 말이다.



돈도 빽도 없는데 쪽수마저 줄고


영광읍에 있는 농민회 사무실로 돌아와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의에 참석하고 온 주경채 농민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올해는 특별한 해!”라고 한다.


“전농이 자체 계산해보니까 쌀 생산비가 15% 올랐는데 농수산부는 딱 절반인 7.5% 상승했다고 발표했어요. 그럼 쌀값을 15%가 아니라 7.5%만큼이라도 올려라. 그렇게 않으면 우리는 쌀을 안 내놓겠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농민들이 오른 생산비만큼 제값을 받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도 있어요. 왜 생산비가 올랐습니까. 유가 상승과 기후변화 때문이잖아요.”
지난 2년간 세계 주요 곡물가격이 많게는 500%까지 폭등했다. 기후변화로 곡물생산량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바이오에너지 개발로 식량은 줄어든 반면 WTO와 FTA 등으로 각국의 농업기반이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주요 쌀 생산국들은 자국의 식량부족을 우려해서 쌀 판매 규제를 시작했고 식량 부족으로 세계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식량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나라가 무려 37개국이라고 합니다. 필리핀의 농업이 붕괴된 것을 봐요. 식량 자급률 25%, 그것도 쌀을 제외하면 고작 5%인 한국도 농업정책이 이대로 간다면 5년 내에 식량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부는 해외 식량기지 운운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대 없애고 용병 쓰자는 거나 다름없는, 식량주권을 아예 포기하자는 거지요.”


한편 주경채 회장은 “전농이 수입개방 저지에 온 힘을 기울이느라 기름 없이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구조의 개혁, 생태농업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농업은 그 국가의 기초이기에 준 사회주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국민의 주식을 확보하고 수급을 안정화하는 것”이 농민회의 가장 큰 과제일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반면에 정부는 농민의 숫자는 물론 농토도 점차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이 농지의 50%만을 경작하도록 하면서 나머지 50%를 정부의 지원 속에서 예비농지로 두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대마면으로 들어가는 영광군 농민회 이석하 교육부장을 따라 나섰다. 대마면은 영광군에서 소농이 제일 많은 지역으로 “다들 어려운 살림에도 추수가 끝나면 꼭 쌀 한가마 씩은 농민회 투쟁기금으로 비축을 하는 마을”이란다.


“출하거부 찬반투표는 하반기 사업계획을 잡다가 나왔어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니까. 투쟁방법은 농민들 입에서 다 나와요. ‘쌀을 아예 내놓지 말아야 한다.’ 협상이 잘 안 되면 민간 RPC(미곡종합처리장)은 영업방해가 되니까 못해도 농협 RPC는 물리력을 써서라도 막아야겠죠. 농민들이 먼저 그래요. ‘어디를 콱 막아버려야 한다.’ (웃음) 지난 몇 년간 농민투쟁의 교훈이라면 목표를 세우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주체로 결정 내려야 된다는 거. 그래야 계속 싸울 수 있고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 교훈이 곧 출하거부 찬반투표라는 방식이다. 다른 군의 경우 200여 차례의 간담회를 진행하는 데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출하거부 투표에서 찬성이 95%를 넘긴 이유가 치솟는 생산비와 낮은 쌀값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비료 값이 오른 것도 문제였지만 비료가 제때 공급되지 않았어요. 농사에는 다 때가 있어서 비료를 줘야 할 때 줘야 하는데” 비료회사가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공급시기를 늦췄다는 말이다.


“그때 농협에서 국제적으로 유가가 어떻고 하면서 비료 값 오른 것을 농민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녔어요. 아니 그러면 지금 쌀값도 농협이 나서서 소비자한테 생산비가 이렇게 올랐으니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해야 맞는 거죠.”


농협도 정부도 지자체도 농민들 편이 아니고 “농민이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들밖에 없어서 그나마 아직 농촌 인심이 남아 있는 것”이라던 한 여성농민회 간부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석하 부장의 말마따나 “20년 전에 1천만 농민이라 그랬는데 어느덧 500만 되고 금세 350만 되고. 가진 것도 없고 빽도 없는데 쪽수마저 줄고 있으니”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대마면에서 영농회장을 맡고 있는 신태욱 씨(69)가 이 부장을 보고는 대뜸 “저 광우병 촛불집회 모양으로 청와대 앞에 솥단지 걸고 몇날 며칠을 싸워야 혀.”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장사해서 돈 벌 줄이나 알았지 농민들 이야기는 콧구녕으로도 안 들을 정부가 이명박 정부”일 것이니 말이다. 이석하 부장은 정말 텐트라도 쳐야겠다고 장단을 맞추는데 아무래도 농민회 회의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성싶다.


“젊은이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노인들이 가서 데모를 해야 경찰들도 함부로 못 허지. 우리 같은 노인네야 지들이 잡아다가 뭐할 것이여.”


마을 이장들이 쇳소리를 내가며 정부를 성토하고 일흔을 앞둔 농사꾼이 풍찬노숙의 싸움을 다짐하는데 길을 나서자니 해질 녘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다.



더 멍들 가슴이라도 남았을까


10월 중순 다시 영광을 찾았을 때 정치권이며 언론은 온통 쌀 직불금 부정수령 파문으로 들끓고 있었다. 농협중앙회가 올 상반기 3천3백억 원의 순이익 감소에도 6백억 원의 성과급을 직원들에게 지급한 것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농민의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게 하는 일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영광에 도착해서 만난 농민들은 가을걷이에 화낼 겨를조차 없는지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으리란 체념 탓인지 그저 논 귀퉁이 벼를 베어 콤바인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누운 볏짚을 묶어세우고 국도변에 나락을 널뿐이다.


“뭐, 하루 이틀 된 문젠가. 여기 남의 땅 붙이는 사람들 다 땅주인 무서워서 냉가슴 앓고, 이장도 어쩌지 못해 맘고생들 하고. 그런 거 아는 사람은 다 알지. 그래도 정치하는 놈들, 무슨 장관인가 차관인가, 그런 양반들까지 그 돈 타먹는 줄은 몰랐네.”


볕드는 시간에 맞춰 나락을 널러 나온 영광읍 신월리 이용기 씨(74)도 먼 산 보듯 하더니 “직불금이나마나 나 같은 늙은이야 곧 가겠지만서두 앞으로 농사 더 지어야 할 사람은 큰일”이라며 탄식한다.


“애들이 넷인데 지금이야 다 키워서 시집장가 보냈지. 쉴 틈 없이 일했어. 담배도 하고 고추도 하고. 시간나면 노가다도 하러 댕기고. 그렇게 벌었으니까 애들 학비라도 댔지. 이제는 농사 일체 짓지 말어야 돼. 내가 아직도 한 열 마지기, 2천 평쯤 짓는데 트랙터로 로타리 치면 한 마지기에 10만 원이야. 열 마지기면 100만 원. 또 한마지기에 거름이 세 포대는 들어가. 그것도 다 하면 100만 원 돈 되지. 그런데 여기서 8만 원에 사간 쌀 40kg 한 포대가 서울 가면 22만 원이더라구.”


옆에서 한참 듣고만 있던 아주머니도 거든다. 올 봄에는 현지에서 10kg에 3천 원 받는 오이가 마트에서 3개에 2천 원에 팔리더란다. 10kg면 오이가 50개. “그 오이가 겨울 내내 하우스에서 한 드럼에 20만 원, 30만 원 기름을 먹고 자란 오이”라니 직불금에 멍들 농민의 가슴이 한 마디라도 남아있을까 싶다.


대마면 가는 길에 만난 안주영 씨(43)는 고등학생 하나, 중학생 하나, 초등학생 하나에 재작년에 늦둥이까지 본 어머니다. 남편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면 트럭을 콤바인 옆에 붙여서 나락을 옮겨 싣는 게 그이의 일이다.


“농사 지어가지고는 못 살아요. 애들 학비도 그렇고 도시만큼은 아니어도 학원도 보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올해 물가가 너무 뛰어가지고. 기계 고장 나면 수리비에 인건비, 부품비까지 안 뛴 게 없어요.”


농기계 구입하느라 농협에서 받은 융자를 아직 다 갚지 못한 탓에 당장 돈 빌릴 구멍도 없다. 또 기름 값은 뛰었는데 이웃에서 농기계를 쓰자고 하면 안 빌려줄 수도 없고 오른 기름 값만큼 올려 받지도 못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는 딸기 하죠. 하우스에서. 그게 수입은 좀 괜찮은데 수확 철이 되면 하루라도 안 따면 물러서 버려야 돼요. 다른 과일이랑 달라서 손이 많이 가니까. 요새 농촌은 농번기 같은 거 따로 없어요. 먹고 살려면 추수 끝나고 모종 키워야지. 하우스에 심고 2월부터 5월까지 매달려야지. 또 금세 모내기해야지.”


특히 하우스 농사는 일손이 많이 드는데 인력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농촌에서도 인력사무소를 통해서 사람을 써야 하는데 농번기에는 일당이 7만 원에서 10만 원까지도 간다. “올해는 고추농사도 조금 했는데 초반에 약을 못 줘서 망쳤어요. 하우스에 설비를 해서 농약을 치자니 설치비가 만만치 않고, 사람을 사서 일일이 하자니 그것도 벅차고. 하우스 파이프 값도 6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올랐거든요. 세 살 된 딸애가 남편이랑 하는 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하루는 ‘죽겄다’ 그러데요. 정말 그 말이 절로 나와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거들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농사를 지었다는 임우택 씨(64)는 농사일이 싫어서 열아홉 때 서울 있는 공장에서 2년간 일을 했다.


“그때는 잠도 안 재우고 일을 시키더구만. 난 원래 잠이 없어서 좋았지. 거기서 모은 돈으로 낙농을 했는데 3년째에 폭삭 망했어. 그때 빚이 지금까정 이어지네.”


그래도 예전에는 농사짓기가 나았다. 공무원 하다가 농사짓는 친구도 있었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호시절인 셈이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추진되면서 급속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농사지으면서 밭떼기 한번 갈아엎지 않은 사람 없을 거여. 그 심정이야 말로 못하지. 자식 농사라고 농사가 애 키우는 거랑 하나 안 달러. 벼는 농사꾼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고 안 혀? 고렇코롬 키운 걸 갈아엎어 봐. 소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여. 예전에는 소 한 마리면 300만 원 넘던 시절도 있었는디. 요새는 사료 값이 하도 올라서 아침저녁으로 풀 베는 것이 일이여. 이 볏짚도 한 달 안 돼서 먹어치울 걸.”


먹고 사는 게 바빠서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데모는 열심히 못했다는 임씨. “지금은 농민회에서 뭐 하자 그러면 다 혀지. 여든 먹은 노인네들도 다 나갈 거여. 지금은 정부에서 하자는대로 하는 사람 없으니께.”라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한 10년만 지나면 농사지을 사람도 데모할 사람도 다 없어지지 않을까 몰라.” 하며 다시 허리를 숙이고 볏짚을 끌어 모은다.



우리에게 농촌은, 땅은 무엇인가


10년. 2013년부터 보리수매가 중단되고 그 다음해부터는 농업용 면세유 지원제도도 없어진다. 그리고 2015년은 쌀이 전면 개방되는 해이다. 지난 20년 만에 농지 25%가 사라졌다. 직불금 문제를 담은 그 문제의 감사원 보고서에서는 직불금 제도개선과 함께 우리나라 농지를 더 줄여야 한다는 권고도 들어있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올라오려다 이석하 부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지으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보기 드문 젊은 농사꾼이다. 영광에서 굴비 다음으로 쳐준다는 대합조개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았다.


“농민운동 할 생각은 없었어요. 89년에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학생운동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농민회는 내려와서 우리 마을에 골프장이다, 쓰레기 처리장이다, 그런 거 반대하면서. 그리고 쌀값 문제 심각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도와주다가 한발 한발 빠져든 거죠. 그냥 나는 농촌에 살아야겠다, 농사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는 정말 여기를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고등학교를 광주로 가니까 도시에서 도저히 못 살겠더라고요. 대학 다니면서도 항상 졸업하면 농사지으러 가야지 했죠.”


농사를 짓던 어머니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읍내에서 약재사를 하던 큰 형도 극구 말렸다. 결국 형과는 몇 년 동안 말도 안 하는 지경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통장까지 넘겨받고 어엿한 전업농이 되었다.


“농사일 힘든 거야, 그만큼도 땀 안 흘리고 먹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땀 흘리면서 일하고 일 마치고 함께 술 한 잔 하는 게 사는 맛이죠. 또 곡식 여무는 거 바라볼 적에, 추수할 때 뿌듯하고. 그런데 부모 마음이 다 자식 잘 되었으면 하듯이 농사지으면서 요개 잘 됐으면 하는데 만원 받을 게 천원 받으면 왠지 뭐 잘못 한 거 같고, 그게 마음이 아프죠.”


현실이 암울하고 미래가 어둡다지만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게 세상이치”라는 그 믿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인 듯하다. “SF영화에서처럼 하루에 요만한 알약 하나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지구 같은 별을 발견해서 거기서 식량이 쏟아지지만 않는다면야” 농사짓는 일은 없어질 수는 없고 농사를 짓는 한 “농민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농민운동”이라니 말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흰소리도 나올 무렵 영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그의 선배가 합석을 하게 되었고 3년을 끌어온 끝에 내년 2월 폐교하기로 결정이 났다는 대마서초등학교 이야기가 나오면서 화제는 자연스레 농촌의 아이들로 번져갔다. 국제 결혼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IMF에 직격탄을 맞아 가정이 깨지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맡겨진 아이들. 한 편에서는 학생 수가 모자라 문을 닫는 학교가 생기고 다른 한 편에서는 전혀 새로운 성장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학교로 밀려들고 있다.


“농촌은 도시 사람들 먹거리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에요. 이 아이들이 그나마 공동체가 남아있는 여기가 아니었다면 다 어디로 갔겠어요.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마저도 돌아가시고 나면 걱정이죠. 별로 먼 이야기도 아니에요.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아무런 뒷받침도 되지 않는 농촌에서 이 문제는 그저 방치되고 있어요.”


5년 뒤 식량폭동을 우려하는 농민운동가처럼 선생님은 5년 뒤에 우리사회와 교육현장이 마주해야 할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석하 부장은 “이거야 말로 르포꺼리 아니에요?”하며 취재방향을 돌리라고 농담을 건네는데 내게는 취기가 싹 가시는 얘기다. 취재를 하며 나 또한 농촌을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공장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가.


삶의 현장이 투자의 대상, 무엇을 투입하면 그 무엇 이상의 성과가 나와야 하는 공간으로 되는 순간 쌀 직불금 파문도, 그 근본원인으로 지목되는 부재지주의 문제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 식량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 땅에 식량기지를 세우면 된다는 생각, 석유도 그랬으니 식량 때문이라면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주식과 펀드가 반 토막이 나기 전부터 노동의 대가가 절반으로 줄어버린, 그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마저도 절반이 되어버린 농민들,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 이름만 달리하는 반쪽짜리들이 얼마나 더 쓰러 넘어져야 이 파렴치한 욕망의 수레바퀴가 멈출 것인지 누가 귓뜸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 2008년 11-12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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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사회학’, ‘촛불의 정치학’이라 불릴만한 이야기들이 책 몇 권은 될 법한 분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집회현장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지면을 넘어 온오프의 경계를 허물고 광장을 뒤흔든다. 관련된 영상들로 독립영화제를 열어도 넉넉할 것이고, 촛불이 못마땅한 이들의 헛다리짚기를 소재로 개그콘서트를 열어도 몇 회 분량은 거뜬할 것이다.





그 중 단연 주목받는 주인공을 꼽으라면 역시 10대 청소년들이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난 5월 2일 이후 각종 언론은 10대들의 목소리를 받아 적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구는 이들을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웹2.0에 비유해 ‘2.0세대’라 호명했고, 어떤 이는 인터넷으로 의식화하고 휴대전화 문자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라며 감격했다. 앞으로도 한동안 각종 분석과 진단이 난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 아리송한 것은 이른바 보수든 진보든 매한가지 아닐까? 한 청소년은 지금의 현상을 보고 “기성세대가 안쓰럽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마이크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해온 기성세대에게 돌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지난 6월 5일 72시간 연속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시작된 첫날 거리에서 그들을 만났다.



깜박한 인간에서 촛불소녀로


소설가 박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세계가 ‘깜박’한 인간”이었다.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조치에 대해서도 말 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의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본고사가 학력고사로 바뀔 때도, 학력고사가 수능시험으로 바뀔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복이 없어질 때도, 다시 부활했다며 입으라고 할 때도 당사자의 의견 따위는 없었다. 묵살된 것이 아니라 의견자체가 있을 수 없는 집단이 학생이고 또 10대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촛불집회 무대에 올라 자유발언을 하는 10대들은 당돌하고 거침이 없는데다가 재기발랄하기까지 하다. “미친 소 너나 먹어!”를 외치는 그들의 얼굴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 넘쳐난다. 그 활력이 “이명박은 땅 파지 말고 귀를 파라!”라거나 경찰 살수차가 뿜어내는 물대포에 대항해 “이왕이면 온수를!”이란 발칙한 구호들을 만들어낸다. 이날 느닷없이 등장한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협회’가 시청광장에서 ‘북파공작 특수임무 전사자 추모제’ 전야행사를 여는 바람에 촛불집회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광장에 스스로 갇힌 사람들과 광장에서 나와 거리를 광장으로 만든 사람들. 저녁 8시쯤 시작된 본행사가 마무리되자 사람들은 여느 날처럼 행진에 나섰고 10시가 가까워지자 명동에서 종로를 지난 대열이 다시 광화문 사거리로 모여들었다. 다음날이 공휴일이어서인지 예상보다 많은 청소년이 집회에 참여했고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었다.





지난 5월 2일 첫 집회부터 참여했다는 조한영(가명, 고1)양은 스스로가, 그리고 같이 했던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그렇게 많이 모일 줄 몰랐어요. 완전 감동이었죠. 나중에 첫 번째 거리 행진 때도 있었는데 조금 놀랐지만 재미있었어요.” 서울 영등포에서 학교를 다니는 차경민(가명, 고1)군은 기성세대가 너무 무관심하다고 성토한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다 무관심하세요.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죠. 인생도 오래 남았고 제일 먼저 학교급식에 나올 거고.” 경민 군의 친구는 옆에서 이 정부를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영어몰입 어쩌고 하더니 번역도 잘못하고. 잘못한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협상 끝나니까 예전에 반대하던 농수산부(농림수산식품부)인가랑 조중동이랑 다 잘했다고 그러는데 정말…. 저 군복 아저씨들(특수임무수행자협회)도 불쌍하죠. 근데 이명박이 진짜 시켜서 저런 거예요?”


어느 문화평론가의 말처럼 인터넷으로 학습하고 토론하며 의식화된 이들에게 나이와 세대 구분은 무의미할 것 같다. 정보와 인식의 힘은 놀랍다. 정부와 보수언론, 그리고 보수세력의 대응 역시 실수라기보다는 인식의 한계이지 싶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진출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삼삼오오 달려가는 사람들 중에는 청소년들도 꽤나 눈에 띈다.


“누가 배후조종 한다고 그게 되겠어요? 우리를 정말 너무 모른다는 거죠.” 오늘 소풍을 갔다가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김성연(가명, 고3)양은 특히 5월 31일 경찰의 물대포와 특공대 투입은 “열 받을 대로 받은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은 꼴”이라며 분개했다.


아는 게 없어서 인터뷰를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정작 인터뷰가 시작되자 말문이 터진 성연 양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봤다. “공부는 고3의 숙명이죠.” 우문현답에 옆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까르르 웃는다. 아침 7시에 집을 나가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온다는 성연 양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너무 힘들 때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인간인데 아프거나 피곤하면 쉬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야자(야간자율학습)를 빠질 수 있는 쿠폰을 학기 초에 나눠주는데 그게 딱 한 장인 거예요. 너무 하지 않아요?” 정부도 정부지만 학교도 문제가 많지 않느냐는 유도질문에는 “교장실 앞에 건의함이 있는데 어디 형광등이 나갔다 그런 거 적으면 바로 바꿔주죠. 그 정도에 만족하며 다녀야죠.”라며 이번에는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부천에서 왔다는 조성훈(가명, 고3)군의 하루도 다르지 않다. 고3이 되자 야간자율학습이 너무 심하다며 특히 잠을 많이 못 자는 게 가장 힘들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는 구호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또한 학생이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답답하다. “학교를 그만둔다면 모를까, 안 그러면 답이 없는 거 같아요. 찍어내듯 창의력은 완전 무시하고 공부만 시키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그래도 살려면 학교 다녀야 하고 선생 말 들어야 하고 그렇죠.”


성훈 군의 친구는 고등학교 올라와서 학교폭력을 경험했다. “힘들어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학 갈까 생각도 했지만 도망치는 거 같아서 참았어요. 지금은 그런 애들 보면 그냥 불쌍해요. 나중에 깡패 밖에 더 되겠어요?” 그는 학교폭력을 당하는 동안 선생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있다.



“공부는 숙명!”





자정이 가까워오자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시청 광장까지는 거대한 놀이판으로 바뀌었다. 한홍구 교수 말마따나 ‘국민M.T.’답게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기차놀이를 하는 사람들. 드문드문 텐트까지 쳐있는 것이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풍물놀이 판이 차려지고 통기타와 바이올린, 트럼펫이 모여 시민악단 공연이 즉석에서 펼쳐지기도 한다. 또 수십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소규모 자유발언대가 마련되어 열변을 토하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의 통일성인지 획일성인지가 왠지 두렵고 못마땅했던 사람으로서 이 난장판이 반갑기 그지없다.
“평화로운 거 같아요. 자유롭구요.” 상대적으로 호젓한 청계광장에서 커플로 보이는 한 쌍의 청소년에게 다가갔다. 오늘 처음 나왔다는 김아람(고2)군은 인터넷이나 TV에서는 못 보던 모습이라 더욱 신기하고 인상적이라며 “재협상이든 뭐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뭔가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아람 군의 여자친구인 이소연(고2)양은 오늘이 세 번째로 자기가 아람 군에게 ‘짱’이라며 가보자고 꼬셨단다. “여기서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도 서로서로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우리들도 존중을 해주는 거 같아요. 여기 왔다가 집에 가거나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 만나면 좀 이상하죠.”


“이렇게 모이면 반드시 정부가 재협상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낙관하며 “또 열 받는 일이 생기면 꼭 다시 거리로 나오겠다.”고 다짐하는 청소년들에게 학교는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미련도 없는, 그저 대학과 사회로 가기 전에 지나야 하는 마지막 터널일 뿐이다.



“아무도 꿈을 키우라 말하지 않죠”


다시 광화문 사거리. 밤이 깊어 제법 쌀쌀해졌는데도 대학생들이 둘러앉아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찍찍찍”하며 쥐잡기 놀이에 열중이다. 그 한 편에서 광화문 쪽을 등지고 휴대전화기로 기념 촬영을 하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원에서 중학교를 다닌다는 그들(중3)도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3일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그런 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다 된다. “고등학교 3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버텨야죠, 뭐.”라고 답하는 그들에게는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꿈이에요. 돈도 잘 벌 거 같고 일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어떤 대기업인지,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할지는 아직 빈 칸으로 남아있다. “경찰이 되어서 범죄를 줄이고 싶어요. 흉악범이 너무 많아요. 특히 청소년 성범죄.” 경찰이 됐다가 촛불시위 막으러 나오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시위 막는 경찰은 안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경찰이나 군인은 시키면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하자 혼자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자리를 옮겨 서대문 방향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컵라면을 먹는 이들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니 슬그머니 캔 맥주를 감추며 겸연쩍은 웃음을 보인다. 부천에서 정보산업고를 다니는 김윤성(가명, 고2)군은 “인터넷에서 보니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나오는 거 보고 부끄러워서” 나오게 되었다. 실업계이니만큼 공부에 대한 부담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인문계 간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정보산업고 다닌다고 그러면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죠.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한식 요리사가 꿈인 윤성 군은 언젠가는 대학을 갈 생각이다. “집안 형편도 그렇고 해서 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학 갈 생각은 없어요. 요리사 되고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그때 내 돈으로 가려구요.” 시선이 대학을 넘어 사회에 가 있기 때문일까. 고민은 현실적이고 깊이가 있다.


지난해부터 하이테크 특성화 학교가 된 이후 갑자기 두발단속이 시작되었다는 윤성 군의 친구는 “학교가 좋아지는 거는 좋지만 학생들 의견을 무시하는 거는 열 받는다.”라며 요즘 학교 다니기가 점점 싫어진다고 한다. “선생님이, 항의를 하려거든 학부모들에게 해라.”라는 말에 할 말이 없다. “결국 참고 다니든가 때려치우든가 둘 중 하나인데 알아서 해라라는 거죠.” 그의 꿈은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것. “돈은 뭐든 하면서 벌고 그걸로 여행 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어요. 모르죠. 나중에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길지.” 하지만 미래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부모님을 보면 점점 한국이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시시때때로 학교를 그만두고 싶지만 벗어날 용기도 없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서 그냥 무기력하게 견디는 거죠.” 조민주(가명, 고2)양은 촛불집회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자비를 털어 음료수 봉사를 하고 그런 것에 감동을 받는다며 학교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냥 친하게 수다는 떨지만 그걸로 끝이죠. 다들 대학가면 지금보다 자유로워지니까 그거 하나 보고 다니는 거예요.” 민주 양의 꿈은 한비야와 같은 세계적인 자원봉사단체에서 일하는 것이다. “저는 제 꿈을 꼭 이루고 싶은데 주위에서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요. 비현실적이래요. 누구도 네 꿈이 뭐냐? 꿈을 키우고 이루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옆에 있던 김민경(고3)양은 보컬트레이너가 되기 위해서 실용음악과에 갈 생각이다. 공무원이나 교사, 대기업 직원 같은 안정된 직업이 인기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너무 평범하고 재미없을 거 같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대학 가면 현실적이 되어서 바뀔지도 모르죠.”라며 여운을 남긴다.



“학교는 죽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좀 특별한 10대들도 촛불집회에 열성적인 참여자다. 지난 5월 17일 등교를 거부하자는 문자가 퍼지면서 학교 안팎의 ‘어르신네들’을 잔뜩 긴장시킨 ‘5.17 청소년공동행동의 날’ 집회. 그날 사회를 본 한지혜(17세)양은 지난 4월 학교를 그만둔 탈학교 청소년이다. “해금 연주자가 되고 싶어서 해금을 배우고 있었는데 담임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저질 예술가가 된대요. 나는 길거리에서 연주하고 싶은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설득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도 학교 그만두려고 한 적 있는데 그때 그만뒀으면 배추장사나 하고 있을 거라는 거예요.”





지혜 양은 중학교 때부터 한 청소년 교육공동체의 인문학 교실에 나가기도 하고 인권캠프에도 참여하면서 학교 밖 세상을 엿보게 된 드문 경우다. “학교 밖에서는 인권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 안에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게 답답하기도 했고…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일단 머리부터, 두발부터 다 하나하나 통제를 받는 거잖아요. 학교에 있으면서 매순간순간 하나하나 내가 인권침해 당하는 일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느껴왔는데 뭘 할 수 있을까… 학교 밖에 나가면 다른 거,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다니는 게 정말 싫었어요.” 지혜 양은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 청소년 인권단체 회원들과 일요일에 학교에 가서 두발자유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이런 데 더 많은 친구들이 나오고, 학교를 안 견디고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친구들에게 ‘그냥 참으면 안 돼!’ 그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너무 쉽지 않다는 거 알기 때문에.” 그러나 그 쉽지 않은 결정에 부모님의 지지까지 있으니 지혜 양은 매우 “복 받은” 경우가 아닐 수 없다.


한편 5월 17일 집회에서 지혜 양과 함께 사회를 받던 또또(별칭, 18세)군은 좀 더 단호하다. “학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교사가 체벌하는 거는 정말 끔직한 짓인데도 교사나 학생들이 같이 웃으며 즐기는 분위기죠. 그건 미친 거죠. 공부를 잘 해서 학교 다니기가 즐겁다는 애들도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애들이 있다면 그것도 미친 거라고 생각해요. 오로지 대학 가려는 목표 아래서 다 같이 미친 채로 살아가는 데가 학교 아닌가요?”


중학교 도서반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한겨레21, 거기서 만나게 된 평택 대추리. 또또 군은 직접 대추리를 방문해 지킴이 활동을 한 ‘행동파’다. 그런 그는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면서 또래 친구들 사이의 성적 농담이나 성희롱에 대해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희 국어 선생님이 젊은 여선생님이었는데 되게 많이 성희롱을 당하셨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되게 노골적이었고 선생님은 그냥 참는 거죠. 남자애들이 주로 놀려먹기 좋아하는 여자선생님 스타일이 결혼 안 하고, 엄하기 보다는 잘해주시고,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 학생들에게 그나마 잘 해주고 존중해주는 선생님들이죠.” 그런 학생들, 두발자유나 인권에 관련된 이슈에는 관심도 없던 친구들이 이렇게 촛불을 들게 된 까닭은 그에게도 풀어야 할 숙제다. “솔직히 정확한 이유를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학교자율화 문제도 컸을 거고 미디어의 힘도 있을 거고. 어쨌든 마음대로 청소년을 해석하는 거 보면 기성세대들이 솔직히 안쓰러워요. 집회하면 퇴학도 가능하도록 교칙에 되어있고, 밤10시 넘으면 귀가하라고 떠들고. 그런 기성세대들의 보호주의나 미성년자니까 빨리 석방하라고 하는 범국민대책위나 비슷하죠. 애들이 뭘 안다고 잡아 가냐, 하는 거랑 니들이 뭐 안다고 촛불을 드냐, 하는 거랑 같은 태도잖아요.” 한 번은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을 참여했는데 사회자가 청소년들도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나쁜 법인지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말에 정말 황당했다고 하며 청소년 뒤에 ‘군’과 ‘양’을 붙이는 관행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한다.



체념과 무기력의 벽 앞에서


10대 청소년을 학생과 탈학교 청소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비행과 선행 청소년으로 나누는 것만큼이나 턱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10대에게 학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엇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학교는 미쳤다는 탈학교 청소년의 말에 학교에 있는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안 나오면 양심에 걸릴 거 같아서” 자주 나온다는 최미솔(고2)양은 “미쳤다기보다는 죽은 거 같은 데요”라며 더 많은 친구들이 집회에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학교에서의 분위기는 정말 다르다고 한다. “솔직히 여기 나오는 애들은 아주 소수예요. 한 반에 대여섯 명 정도. 다른 친구들은 별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더라도 왜 그런데 가냐? 그런다고 뭐가 바뀔 거 같냐? 그런 애들이 더 많죠.” 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과 같이 나온 보이저(닉네임, 고2)양도 “우리 세대가 뭔가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별로 안 해요. 이명박이 0교시 부활시키고, 우열반 만들고 그러면 열 받고 촛불 들고 나오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그걸 막을 수 있을 지는 자신이 없다고 한다.


5월 2일 첫 번째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후 지금은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에 가입해서 활동을 막 시작한 엠건(고3)양도 비관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폭력을 가르치고 억압을 가르치고. 학교가 그러니까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폭력적이 되는 게 아닐까요? 괴롭히는 애들은 소수예요. 소수인데 나머지가 방관하니까 그게 더 문제죠. 밖에 나오면 막 이러고 있다가도 학교만 가면 에너지가 뚝뚝 떨어져서 축…. 그런 거 같아요. 담임선생님은 체력이 달릴 때라고 그러는데 제 생각에는 체력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지금의 학교라면 없어지는 게 낫겠죠, 차라리. 다 뜯어고쳐야 되는데 엄두가 안 나고.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청소년은 위치가 약자거든요. 하지만 이번 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걸 통해서 우리들의 권리의식을 높이고 그러면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또또 군도 “한계는 있지만 그냥 복종만 하지는 않는다는 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희망을 갖고 있음을 내비친다. “장학사가 나와서 감시를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오는 청소년이 있잖아요. 시스템이 청소년을 다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요? 소수이지만 그래도 촛불집회에 왔다 간 청소년들이 수만 명은 될 거예요. 적은 수는 아니죠.”


맞는 얘기다. 하지만 자꾸 청소년들 스스로의 입에서 자주 등장했던 ‘무기력’이란 낱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것이 결국은 강한 사람들, 구조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일 게다. 10대들의 학교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꾸 학교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학교는 땡땡이를 쳐도 잡으러 오지는 않는다. 다음날이면 제 발로 돌아와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학교는 더 거대한 감옥이고 이 사회는 또 하나의 학교가 아닐까.





한 중년의 남자는 거리에서 “촛불을 처음 들었던 우리 학생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끝까지 비폭력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편 불과 며칠 전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주최한 ‘청소년 노동인권 실태보고’ 토론회는 그들이 ‘노동’과 ‘인권’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무색한 상황에서 그저 ‘일하는 기계’로 취급당하고 있음을 증언했다. 또 한편 ‘공부하는 기계’, 우리나라 중고생 중 20%가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으며, 실제 하루에 한 명 꼴로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거리에서의 10대와 일터에서의 10대 그리고 학교에서의 10대 청소년들은 다른 이들이 아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너무나 판이하다. 새로운 주체라며 마냥 희망할 수도,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 있는 약자라며 절망할 수도 없는 갈림길에 10대들이 서있다. 2008년 촛불집회가 가능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듯 그들도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짊어진 채 광장이 되어버린 거리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촛불은 아직 켜지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 2008년 7-8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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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신도시에서 서울 중심부와 압구정동을 거쳐 분당 신도시로 향하는 지하철 3호선. 다른 노선과는 승객의 옷차림부터 다르다고 한다. 매봉역에 나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즈음이면 잘 정비된 양재천을 만난다. 물 깊이는 불과 어른 허벅지 정도.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30초가 채 안 걸리는 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평당 2~3천만 원을 호가하는 타워팰리스와 한 가구당 6~7천만 원의 토지변상금(시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강남구청이 부과한 벌금)을 지고 사는 포이동 266번지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불기 시작하는 가을바람이 그저 반가운 9월 초순. 양재천을 건너 몇 계단을 오르니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건물에 걸린 ‘빈민해방’ 깃발이 나부낀다. 포이동 266번지에서 유일하게 이층 건물인 사무실에 들어서자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철순(46세)씨가 증거자료가 든 두툼한 봉투를 들고 맞는다. 젊다는 이유로 대책위원장이 되었다는 조 씨는 위원장이자 대변인이고 부녀회장 같다가도 행동대장으로 돌변한다. 그는 조심스레 기자가 얼마나 포이동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물어온다. 27년간의 기막힌 과거사. 국가범죄와 폭력이 난무했던 시련의 시간을 복기하는 것은 서로에게 모두 힘든 일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떠올리기조차 싫은 순간을 기억해내 방문객에게 되풀이해서 일러주는 일은 조철순 씨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기막힌 포이동 창세기

포이동의 태초에도 ‘말’이 있었다. 그 ‘말’은 신의 언어가 아니었지만 신 부럽지 않은 권력자의 명령이었다. 1979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거리의 부랑자와 전쟁고아, 넝마주이 등을 모은 ‘자활근로대’가 조직된다. 1981년 3월 전두환 군사정부 아래 서울시는 1,000여 명의 자활근로대원을 서초구 정보사 뒷산으로 강제 이주시키지만 인근 주민의 반발과 민원이 일자 그해 말 10여 군데로 다시 분산 이주시킨다. 그중 150여명이 집단이주당한 지역이 현재 포이동 266번지인 200-1번지 하천부지로 당시에는 길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이었다.

80년대 후반까지 동네에 상주했던 경찰의 지배에 가까운 감시와 통제 아래 당시 주민들은 도시 최하층이라는 멸시와 천대를 넘어 함께 예비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때도 주민들 대다수의 생계수단은 고물 수집이었다. 해가 지고 동네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일명 ‘후리가리’라는 경찰의 일제단속기간에 걸렸다. 그러면 절도혐의로 경찰서로 끌려가 구타와 물고문 끝에 해결되지 않은 절도사건의 누명을 뒤집어썼다. 전두환 정권 초기 사회정화란 미명아래 악명 높았던 ‘삼청교육대’도 이들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당시 50여명의 자활근로대원을 거느렸던 이덕열(65세)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0여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돌아온 이는 불과 4~5명에 불과했다고 증언한다. 조철순 씨의 남편도 한동안 집 밖 출입을 못했다. 아예 야산으로 올라가 굴을 파고 생활하던 이들도 있었다. 아직도 삼청교육대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집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한 채 식칼을 이불 밑에 넣고 지내는 이도 있다. 86년, 88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당시에는 국가적 망신이라며 동네 출입이 아예 금지되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처지에 몇몇 주민들은 야음을 틈타 빠져나갔다 걸려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양재천에서 시신이 발견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경찰과 공무원에게 항의를 할 엄두조차 못 내던 시절이었다.

89년 토지구획정리가 되면서 포이동 200-1번지는 266번지로 바뀐다. 하루아침에 살던 땅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동사무소에서는 관련 자료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서류상의 주소는 먹고 살기 다음에도 한 참 뒤에나 신경이 가는 일이었기에 주민 중 누구도 이를 문제 삼을 여력도, 용기도 없었다. 다음 해인 90년 집집마다 20~30만 원의 토지변상금 고지서가 나왔고 주민들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단 공무원의 말에 따라 토지 사용료이겠거니 하며 납부를 했다. 그러나 다음 해 변상금은 열배가 되었고, 자녀들은 인근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로 토지변상금은 매해 꼬박꼬박 부과되어 15%의 고리가 매겨져 현재 가구당 6~7천만 원이나 되는 가난한 삶에 족쇄가 되었다.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평당 2~3천만원을 호가하는 타워팰리스와 가구당 6~7천만원의 벌금을 안고 사는 포이동 266번지가 마주하고 있다.


 


죽거나 혹은 더 가난해지거나

포이동 266번지는 현재 100여 가구, 3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독거노인도 많지만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결혼한 자식들을 월세라도 구해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토지변상금으로 인해 당장 압류가 들어오는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례로 한 아무개(59세)씨는 어렵게 돈을 모아 95년 서초동에 전세 8,000만 원을 끼고 1억6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외환위기 직후 아파트값이 폭락하자 되팔았는데 서울시가 이미 압류 등기를 해놓은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다. 서울시는 김 씨 집 매각대금 중에서 2,600만 원을 압류해 챙겼다. 김 씨는 전세금마저 갚고 나니 평생을 걸쳐 모은 돈이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조철순 씨는 “주민세도 꼬박꼬박 내고 영장이 나와 군대에도 가는데 살고 있는 땅에 주민으로 받아주지는 않고 떠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무슨 경우냐”며 기막혀 한다.

2004년 6월과 7월에는 한 부부가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부인에 앞서 6월 4일 목숨을 끊은 김 아무개(당시 58세)씨 또한 81년 강제 이주되었던 자활근로대원이었다. 2003년 말 고물 모으는 일 끝에 얻은 진폐증으로 김 씨는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월 23만 원을 주고 빌린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집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아들 둘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상태였고 생계는 고스란히 부인의 몫이었다. 결국 김 씨는 늘어가는 약값과 치료비에 삶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조철순 씨를 비롯한 이웃 주민들이 해당 동 사무소에 찾아가 김 씨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의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부인이 건물 청소로 받는 임금이 106만 원으로 당시 수급기준 금액 61만 원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임씨는 정규직원이 아니어서 58만 원의 임금을 받고 있었고 사고가 날 때도 임금 중 절반은 빚보증으로 인해 차압당하는 상태였다. 또한 의료비 지원혜택도 2개월 이상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이들 부부에게는 해당되지 못했다고 사고 직후 동사무소 관계자는 밝혔다. 김 씨가 남긴 것은 토지변상금 2,219만 원과 연체이자 2,449만 원, 자동차세 1,200만 원 등 빚 7천여만 원이었고 한 달 뒤 부인 임씨마저 목숨을 끊었다. 부부의 빚은 고스란히 군대에 있던 두 아들 몫으로 남겨졌다.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미로처럼 얽힌,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비좁은 포이동 266번지 골목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살피는데 불과 십여 분이 걸리지 않는다. 100여 가구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판잣집 대부분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남자는 막일로, 재활용 수집으로 일을 나가고 여자들은 주로 근처 빌딩청소를 나가 동네에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과 꼬맹이들뿐이다.

송희숙(58세)씨도 작년 9월까지 한 달 꼬박 일해 58만원 손에 쥐는 빌딩청소를 했다. 몸이 불편해 일을 쉬게 된 탓도 있지만 송 씨 역시 젊은 축이기에 봉사부장이란 감투를 맡고 “싸움을 이겨 주민등록이 등재될 때까지”라는 정해지지 않은 시한을 두고 일을 접었다. 송 씨는 지난 과거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던” 시절이었다며 “아마 주민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이 동네는 작년에 철거되었을 것”이라 한다. 주민들은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동사무소 직원이 나오면 먼저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상전 대접을 했지만 토지변상금 문제로 투쟁을 시작하고는 180도 바뀌었다. 잘못을 알면서도 자기책임이 아니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외면하기에 급급 하는 공무원들, 뒤에서 쑥덕이지만 대놓고 총대 메고 해결하려는 이 하나 없는 관료들의 한심한 꼴을 너무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송씨는 80년대 초에 강원도 시골에서 식구들 입 하나 덜자고 상경을 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경기도 안양이었고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여기로 오게 되었다. 기세등등하게 군림하다 이제는 발뺌을 하는 공무원들뿐만이 아니라 무던히 두드려 맞았던 남편과 그걸 지켜보고도 항의도 한 번 못했던 스스로가 송 씨를 화나게 하고 또 슬프게 한다.

포이동의 여자들은 기자를 만나면 두루마리 화장지를 말아 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시작했다 하면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다. 오늘 송 씨의 남편은 재활용 수집을 나갔다가 동료가 개에게 물리는 통에 일찍 들어왔다. 남편의 동료는 한 이틀 수입을 날릴 지도 모른다.
2004년 목숨을 끊은 부부 앞집에 사는 문정임(74세) 씨는 한 넉 달은 무서워서 그 집을 쳐다보지도 못했다며 당시 일을 회상한다. 그도 남편을 따라 28년 전 포이동으로 왔다. 몸이 불편했던 남편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등졌고 홀로 3남매를 키워내고 지금은 혼자 산다. 28년 전 손수 지은 판잣집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높이 지을 껄”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그래도 “여자가 집을 다 짓네!”라며 당시 주민들도 신기해했다고 한다. 다들 그렇듯 오는 겨울을 전기장판과 난로 하나로 버텨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춥다. 그래서 봄가을이 그나마 살기가 낫지만 이 땅의 계절조차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야속하게 변해간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다는 문정임 씨는 그래서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가 없다.

여기서는 절망이 곧 희망이다 



 

포이동 266번지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LPG 가스통이 집집마다 벽에 기대어 있다. 대부분 판잣집이어서 화재의 위험과 늘 함께 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인근 소방서에서 소방용 물탱크를 설치했다. 비가 오면 골목길은 곧 진창이 된다. 장마에 동네가 물에 잠기지 않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원래 포이동은 밀미리라고, 한 해에 두 번은 큰물이 든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몇 해 전 인근 주택 단지 수로 공사 때 주민들이 나서서 배수관을 얻어 설치한 다음부터 물난리를 면했다. 전기와 수도도 한전과 상수도본부 등의 협조를 얻어 동네 전체가 하나로 메타가 매겨진다. 살림이 고만고만하다보니 한 달치 전기료와 수도세를 가구 수대로 나눈 다음 걷는다. 동네의 유일한 수세식 화장실은 대책위 사무실이고 공용 화장실이 10여 곳이 채 안 되다보니 아침이면 화장실을 먼저 차지하려는 분주함이 동네를 깨운다. 이를 보고 한 방송사는 미담사례마냥 만들어 방영을 한 적도 있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살아있는 동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과거를 사는 일은 버겁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포이동 266번지는 공동체가 살아 있다. 그러나 가난하기에 모여야 하고, 뭉쳐야 그나마 버텨낼 수 있는 빈곤의 현장.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국가와 지자체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동체가 유일한 생존 수단이어야 하는 포이동 266번지는 절망이 곧 희망이다.  

 

- 2006년 10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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