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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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비대해지다 못해 지구가 되어버린 트럼프에 대한 비판, 정희진의 해제가 본문보다 더 논쟁적이고 흥미로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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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인권운동이라는 날갯짓



1.

2019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어쩌면 올 한 해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었던 2018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죽음으로 시작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11월 21일 자 <경향신문> 1면을 빼곡히 채운, 이윤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1,200명의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명단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명단에 들지 못하는, 산재로 인정도 못 받은 이들을 비롯한 무수한 생명의 죽음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9년 인권운동을 돌아본다. 여전히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른바 ‘태극기 집회’로 표상되는 집단의 몰상식과 후안무치, 기득권이 되어버린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위선과 ‘사회적 합의’라는 기만에 맞서 고군분투했고, 공정함이 은폐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드러내고 평등을 이야기하며 존엄성을 지키려는 이들과 함께했다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로운 것은 태어날 수 없는 때이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빈자리에 괴물이 나타난다.”


장애를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파시즘에 온몸으로 그리고 ‘위험한 두뇌’로 저항했던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다. 1928년 그람시의 재판에서 파시스트 검사는 “저 두뇌를 20년 동안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결국 그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다 9년 뒤 사망했다. 물론 지금이 100여 년 전, 1차 세계대전 후 대공황 속에서 파시즘이 기지개를 켜던 당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위기의 징후들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호를 준비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담론, 속도를 따라잡기 힘든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대리모와 난자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 DNA 조작으로 맞춤형 아기가 가능해진 첨단 생명공학, 그리고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묻는 기후 위기.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인권이 여전히 쓸모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편집위원회에서 던져졌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이 물음에 대한 우리 나름의 응답이다. 동시에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그래서 운동이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질문이기를 바란다. 



2. 

첫 번째 실린 류은숙의 ‘변화된 지형에서 인권 담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의 문제의식은 폭 넓고 깊다. 또한 현재 인권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먼저 인권운동이 처한 위치와 그 배경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정치의 빈곤과 관계의 파괴, 권리 담론의 범람과 혼탁, 불의에 대한 공통감각의 위기로 설명하며 그에 따라 “임시적이고 배제적인 ‘우리’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만한 권리 체제를 상호 선물하는 새로운 ‘우리’의 세력화”를 주문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첫째, 특정 집단의 이익을 보편적 권리로 포장하는 ‘통념적 인권론’, 사회와 갈등하지 않는 ‘순치된 인권론’을 넘어 인권을 복잡하게 이해하려는 노동을 통해 그 토대와 보편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공허한 개인주의에 갇힌 원자적 개인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엄성을 구축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시민권의 재구성이 가능할 때 “기존 권리 체제의 내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에 반대하는, 부정성에 기댄 운동의 한계를 넘어 보수의 언어로서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책임을 통해 “다양한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공통감각을 재구성”할 것을 주문한다. 그럴 때 오직 집단적으로만 쟁취될 수 있는 권리, 서로에게 부여하고 서로가 보장하는 진정한 인권과 해방의 정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토대와 보편성의 재구성, 사회적 시민권의 재구성, 연루됨과 책임을 통한 공통감각의 재구성은 결국 낡은 권리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권론, 인권 담론의 창조를 병행하는 작업이기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가는 인권운동이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류은숙의 글이 인권 담론 재구성에 대한 총론이라면 나영과 수수가 공동집필한 ‘젠더를 다시 만나기’와 정록의 ‘사회적 노동권, 새로운 싸움과 권리의 가능성’은 각론에 해당한다. 


먼저 ‘젠더를 다시 만나기’는 그간의 인권운동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거나 젠더를 여러 권리 목록 중 하나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부정의와 불평등의 구조를 다루는 도구”로서 젠더를 적용하여 권리 개념의 한계를 검토하자는 제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성을 강조했던 인권운동과 여성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여성운동은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함께 저항했으면서도 미묘한 갈등과 마찰이 있어 왔다. 필자들은 이를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두 운동 모두 젠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과 젠더 주류화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기인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젠더를 권리 영역의 하나이거나 정체성의 범주로서가 아니라 젠더 개념을 인권운동 전반을 분석하는 범주로 사고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적 관점으로 인권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젠더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를 통해 알려진 뒤 미투 운동 전후로 한국 사회와 사회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면 노동은 멀게는 해방정국에서부터 1970~80년대를 거치며 체제 변혁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으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급속도로 해체되고 힘을 잃은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록은 글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권과 노동세계가 신자유주의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피며 자본이 외주화를 통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을 해체하고 개별화하면서 자본의 사회적 성격은 강화된 반면 그 책임은 은폐되었다고 지적한다. 과거 노동이라고 하면 월급을 받기 위해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뜻했다면 현재의 노동은 각종 프랜차이즈 자영업,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배달, 운수, 판매업, 콘텐츠제작과 문화예술노동 등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말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행태가 되었고 거기서 87년 체제에서 비롯된 노동삼권은 더 이상 아무 효력을 갖지 못한 채 개별 노동자들은 무권리 상태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러한 힘의 방향을 돌리고 “개별화되고 위계화된 노동자들이 함께 설 공통의 토대이자 권리”로 사회적 노동권을 제안한다. 사회적 노동권은 이윤이 있는 곳에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개별 근로계약 관계, 기업별 체계를 넘어 자유롭게 단결하고 행동하고 그 힘으로 책임을 묻기 위한 교섭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노동삼권, 노동기본권의 확장을 뜻한다. 이는 결국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국한된 권리로서 노동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공동체의 평등한 시민으로서 지향해야 할 노동에 대한 권리를 만드는 일이기에 인권 의제 전반에 대한 변화와 재구성의 토대와 조건을 구성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 종의 횡포와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에 지구와 생태계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한 편에서는 동물에 대한 대량학살이 반복되고, 한 편에서는 반려동물이 인간 공동체의 관계망에 구성원으로 등장한 상황에서 인권운동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 쉽지 않은 주제로 여성주의 철학연구자로 에코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황주영 님과 풀뿌리운동과 아나키즘으로 인권운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던 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하승우 님을 모시고 ‘종의 권리를 넘어서는 인권/운동은 가능한가’라는 좌담을 진행했다. 좌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인권 담론을 더욱 정교하면서도 풍성하게 해주리라 기대한다. 


마지막 글은 일곱 명의 인권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기사다.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지역과 부문, 연령과 활동 기간 등을 고려하여 안배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편집위원회는 이 저널의 가장 중요한 수신자인 활동가들의 고민과 저널이 담은 문제의식 사이의 거리와 만남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더불어 인권운동 현장에서 솟아나는 생생한 목소리들을 더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2019년 한국 인권운동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생각과 활동을 하고 있는지, 거기서 어떤 2020년대를 함께 그리고 있는지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3.

2020년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이다. 2019년 해넘이를 며칠 안 남기고 인권운동의, 무엇보다 청소년인권 운동의 오랜 숙원이었던 만 18세로 선거 연령이 하향 조정된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다가올 총선에서 당장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제도권 정치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여러 방면에서 분명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보수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학제 개편이 선행된 후 또는 학제 개편과 병행하여 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낮아진 것보다 고등학교 3학년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현 제도에 더 큰 균열을 낼 것이고, 그것이 나비효과에서의 날갯짓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국 사회운동의 한 축으로 존재했던 진보정당 운동이 결실을 맺어 민주노동당이 다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원내에 진출하던 2004년 무렵 인권운동은 진보정당과 꽤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국회 입법운동에서만이 아니라 인권침해 현장에서도 다양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고,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기획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서로가 서로를 도구적 관계로만 여겼기에 서로의 변화를 추동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크다. 그때와는 사회도 바뀌었고 인권운동도 진보정당도 변했기에 그 당시의 상황이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2020년 인권운동이 진보정당을 비롯한 제도권 정당들과 그리고 다른 사회운동과 어떤 관계 맺기를 하고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는 다시 새롭게 도래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당면한 인권운동의 고민과 연결 지으면서도 또 어떻게 하면 거기에만 머물지 않을 것인가는 이 저널이 계속 품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무솔리니 정권은 그람시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서슬 퍼런 검열을 뚫고 살아남아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저작이 되었고 변혁 이론과 실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저널에 실린 글들, 우리의 전언도 현실의 여러 어려움과 복잡함을 헤치고 여러분과 그렇게 만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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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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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이름의 콜롬바인


#0

딱 10년 전,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퍼 콜롬바인>도 봤고,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당시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가 쓴 책이다)도 읽은 터라 이 사건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 읽기 시작한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1

중간중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콜럼바인 사건 이전에도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사고는 없지 않았다. 다만 콜럼바인에서는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근 4시간여를 미국 전역, 심지여 다른 나라까지 생중계로 이 사건을 지켜봤다.(가해자는 사건 발생 직후 불과 1시간도 안 되어서 자살했지만 결국 4시간이 지나서 확인되었고 그 사이 몇몇 부상자가 사망했다) 또 하나, 그 이전과 다른 점은 모든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시대에 맞이한 사건이라는 점도 있다.


#2

대부분의 사상자가 난 학교 도서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대목에서 단원고 기억교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도 닮았다. 우리는 콜럼바인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러했을까?


#3

주 당국은 사전 위협을 인지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축소 은폐를 위한 공모 회의도 열었다. 이 사실은 근 4년이 지난 2003년에 밝혀졌다. 경찰 당국의 대처도 미흡했다. 인질극이 아닌 묻지마 총격에 대한 대처 방법에 무지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이후 FBI보고서에 담겼고 이후 개선 방안이 마련되었다. 


#4

가해자인 두 학생은 자살했다. 피해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표적,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다. 가해자의 가족이 지목되었고 가해자는 '괴물'이 되었다. 배를 버리고 떠난 선장, 유병언 회장, 구조하지 않은 해경, 박근혜, 그리고 언론... 이 또한 비슷한 패턴이다. 하지만 이런 분노의 대상 찾기는 오히려 문제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 커다란 걸림돌을 마련할 뿐이지 않을까. 손쉬운 해결책, 속 편한 증오의 대상 찾기는 어쩌면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에 가장 커다란 경계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5

이 지점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손쉬운 '왜'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집요하게 '어떻게'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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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쓴 이 글 때문에(덕분에?) 무려 네 군데나 불려다녔다. 이제 좀 새로운 내용의 글과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여전히 게으르다. 


첫 발표는  9월 20일 세계인권선언 70년 '문제적 인권, 운동의 문제 토론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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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 … 이들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남기를 원하든, 다른 결정을 하든 이들의 의사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들의 결정을 유엔이 개입할 것도 아니고, 한국과 북한 정부가 내릴 것도 아니다.” -토마스 오헤아 칸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


인권위를 포함해 우리 국민 모두가 고려해야 것은 이들 탈북 여종업원들이 탈북 시점에서 자유의사로 탈북했는지 여부를 솔직히 말할 없는 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들 일부가 재입북을 희망한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행의 자유가 있는 이들이 3국을 통해 재입북하면 되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김영우 국회의원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던 북한


국가정보원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중국의 북한 식당 종업원 12명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북한은 12 전원 송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고, 민변과 유엔 특별보고관은 독립적인 기구의 진상조사를 전제로 이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자유한국당과 보수우익 단체들은 이들에게 자유의사를 묻는 자체가 반인권적 행위라며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상규명조차 반대하는 저들의 저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에 있는 종업원들 가족의 처지를 고려할 (북한에서 외국 근무는 상당한 사회적 신분이 보장되었을 가능하다고 한다) 딜레마 솔직히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사건이 지금처럼 첨예하게 정치적 이슈화가 되기 이른바조용한 외교 통한 접근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남북,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여 탈북민과 이산가족 모두에게 남이든 북이든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된다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1984 강원도 부대에서 남한 병사가 동료 15명을 죽이고 북한으로 넘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 병사는 북한에서 훈장도 받고 북한 매체에 나와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사는 월북 대표선수 되었다. 1995년경에는  GOP 초소에서 술자리 다툼 끝에 중사가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중사 또한 며칠 귀순 영웅으로삐라 등장했다. 지난 2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는 만취 상태에서 차를 운전하다 사고를 탈북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공식적으로 북한은 1950년부터 1999년까지 6446명의 공작원을 남파했고 남한은 1951년부터 1972년까지 7726명의 공작원을 북파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도 여전히 남북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이자 숙제로 남겨져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인권, 인권운동은 수많은 딜레마를 만나게 것이다. 



















한국 인권운동에서 북한 문제, ‘북한인권 언제나 딜레마이자 뜨거운 감자였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량 기아 사태가 알려지고,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러시아의 북한 벌목공 노동 실태가 보도되면서인권 빙자한 반공주의의 확산과 노골적인 체제 붕괴 시도에 대한 경계와 우려가 인권운동 안에서 고민되기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한 직후였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불과 10년도 시점이었다. 2004년 경에는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 움직임을 계기로 통일운동단체와 시민단체, 인권단체가 함께하는 비공개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들어진 테이블도 북한의 인권 문제 제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어떤 정치적 배경과 의도도 배제한 동포 돕기라는 인도주의만을 주장하는 입장의 긴장 속에서 결국 유의미한 활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권의 보편성과 한반도의 특수성, 그리고 사회운동의 복잡 미묘한 진영논리 사이에서 인권운동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인권결의안 문제는 보수세력의 정치공세에 단골 메뉴가 되었고 다양한 경로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의 숫자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분단체제의 조난자, 탈북민


정부가먼저 통일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통일부에서는 새터민, 과거에는 귀순자, 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있는 탈북민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고 싶다고 응답한 이가 20%라고 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탈남한 사람들이 2000,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이 800 명이고,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도 28명에 이른다. 탈북민이자 통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주승현 교수는 스스로를조난자 호명한다. 탈북민은 분단이라는 재앙을 맞아 난파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론조사들은 판문점회담 이후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탈북민의 SNS에는북한으로 돌아가라”,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 해봐라는 등의 온갖 모욕적인 댓글이 달린다. 어느 탈북민 약사는한국에서 우리는 이등 국민이고 장애인처럼 사회에 적응 교육을 받고 재활해야 하는 존재라며 한국의 정착지원 사업을 비판한다. 


탈북민은 헌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한국 국민이다. 이들은 자기 결단에서든, 외부적 요인에서든 자기가 태어나 성장했던 사회와 체제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문화적으로 북한 사회는 핏줄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제, 유교적인 사회다. 북한의 교육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이루자며 우리 민족 제일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오랜 기간 북한 주민에게 휴전선을 넘어오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많은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야 나라가 직업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알아서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탈북민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받는 차별에 훨씬 민감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중반 국가인권위원회 토론회에 나온 탈북민은 자신이 받은 차별을 증언하며솔직히 말해서 남한은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고, 북한은 친구를 잘못 만나서 저렇게 가난해진 아닌가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여전히 다수의 탈북민은 스스로 조선족이라 밝히며 탈북민임을 숨기고 생활하고 있다.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통해 이제 본격적으로 난민 문제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만약 가까운 시기 해외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집단으로 한국행을 요구한다면 어떤 반응일지 걱정스럽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에서는 탈북민에 대한 정착지원금과 생활보조금에 대한 불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다. 


이는 북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도 연결된다. 흔히들 10, 20대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장 낮고 50, 60대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하고 실제 여론조사도 그렇다. 그런데 연구에서통일로 인해 경제적 손해가 발생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자 40 이상에서 급격히 찬성률이 낮아진다며기성세대의 통일의식은 위선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없다라고 꼬집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민 절대다수가 급격한 통일, 남한체제로의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 한국 사회는 통일, 혹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속에 값싸고 좋은, 통역도 필요 없고 노조도 불가능한 노동력의 출현, 새로운 블루오션의 등장, 돈벌이가 되는 희귀 광물이라는 휘토류 등의 매장량에 대한 높은 관심, 판문점회담 직후 건설, 철도 관련 주가의 폭등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김정은과 세련된 김여정 뒤에 가려진 북한 주민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종편이 확대재생산하면서 소비하는 체제 순응적인 꼭두각시와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며 19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선량한 동포의 모습으로 대상화되는 가운데 갈등하고 불화하며 입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여백으로만 존재한다.    


3 세습, 1 독재와 정치범 수용소, 형과 고모부를 암살한 독재자의 나라. TV조선을 봐야만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여러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의 북한 지역에서, 최소한 평양에서만큼은 아직도 무상주거,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편에서는 분단 70 동안 쌓여온 반공이데올로기 위에 편견과 악의적 선동이 횡횡하고, 다른 편에서는 북한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사이 빈자리를 혐오와 적대가 채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다시 생각하는 국가보안법


인권운동사랑방이 1993년부터 13 동안 발행했던 팩스 신문 <인권하루소식>, 창간의 계기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간 인권운동사랑방 소속 활동가의 연행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인권단체의 주된 활동은 공안기관의 부당하고 위법한 연행을 막고, 구금과 고문 피해 사실을 알리고,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고, 석방된 양심수를 지원하는 국가보안법과 싸움이었다. 싸움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1980년대 변혁적 민중운동으로 바뀌는 가운데 등장한 민족해방 노선과 노동해방 노선 사이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남한 사회 계급혁명이라는 노선의 과제가 만나는 지점이자 초보적이나마 독자적인 인권운동진영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87 6월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민가협의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같은 문화행사, 하루감옥체험과 같은 퍼포먼스는 물론 200 단체가 모인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중심으로 100만인 서명운동, 단식과 삭발, 집단 농성, 피해자 증언대회, 국제심포지엄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10 동안 법의 폐지는커녕 조항의 개정도 이뤄내지 못했다. 


반면 확연히 줄어든 양심수의 숫자만큼이나 국가보안법에 대한 대중과 운동사회의 관심도 식어 갔다. 인권운동 내에서도 비록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불처벌운동, 과거청산운동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자리를 대신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김근태, 서준식으로 대표되는 가장 급진적이면서 반체제적인 운동가이자 동시대 가장 가혹한 국가폭력에 맞선 민주주의자로 표상되었다. 그러나빨갱이’, ‘좌파 자리를종북 대신한 이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RO 내란음모 사건-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는 문화적으로후진사람들, 시대 변화에 낙오된 운동권,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모습으로 그려졌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평화통일의 동반자, 대화와 협상의 상대이면서도 대한민국의주적’, 정부를 잠칭하고 있는 괴뢰집단이기도 북한과 공존하고 있는 분단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위험한 사상을 품고 저항을 꿈꿔서는 되는가?’라는 질문은 봉쇄된 종북이라는 낙인찍기와 혐오, 마녀사냥만이 난무했다.



















그러는 사이 국가보안법의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했다. 원정화 간첩 사건, 황장엽 암살 간첩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북한보위부 직파 간첩 사건. 모두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벌어진 조작간첩 사건이다. 사건들 외에도 미수에 그친 사건까지 대략 10 건의 탈북민 조작간첩 사건이 현재 민변에 집계되어 있다.  


탈북민은 한국에 입국과 동시에 합동신문센터(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최장 6개월 동안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으며 탈북 과정과 입국 경위는 물론 북한에서의 생애 전반에 대해 진술해야 한다.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거나 다른 탈북민의 증언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곧바로 국가보안법의 그물망이 좁혀 들어온다. 한국의 제도를 알지 못했던 탈북민은한국에서는 마약범은 5년을 살아야 하고 간첩은 3년만 살면 된다 회유에 넘어가 간첩이라고자백했다며 만기출소 민변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합동신문센터의 무사히 조사를 마쳤다 하더라도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은 사회에 나온 탈북민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중국 브로커를 통해 가족에게 돈을 전달하는 국가보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엮을 있는 먹잇감, 잠재적인 간첩 셈이다. 


끊임없이 변주되는너는 어느 편이냐?’ 추궁


국가보안법을 무고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를 양산하는 악법 이상의 무엇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의 앞에 문지기로 자기 검열 기재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사회 규범이자 헌법 위의 법으로서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체제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테러방지법, 전기통신망법, 보안관찰법, 북한이탈주민보호법 등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하며 움직임이 멈춘 상태에서도 사람들의 내면을 규율하고 국제인권기준을 비롯한 인권의 보편적 원칙에 끊임없이 예외를 강요한다.  


이는 1948 정부 수립 이래 한국에서는 하나가 아닌 개의 헌법, 공식 헌법과 함께이면헌법 존재해 왔다는 백낙청 교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면헌법, 국가보안법은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헌법을 해석할 권위를 갖고 있으며 때로는 헌법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로 결집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반공주의,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전현직 국방부장관과 장성들,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장에서천안함 침몰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느냐, 믿느냐라며 사상검증이 벌어지는 작태, 질문이 성소수자 인권과 낙태의 찬반으로 바뀌는 상황, 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에 태극기집회 사람들이 난입해종북’ ‘빨갱이라고 소란을 피우는 장면. 모두가 분단체제 아래서 이면헌법의 작동이라 있지 않을까.  



















2018년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의 해이자 제주 4.3사건 70주년이며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라 있겠지만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을 교훈 삼아 세계 인류의 이름으로 인권선언의 문구가 다듬어지던 바로 순간 제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3세계 식민지에서 이제 탄생한 국가권력은 학살로 국가 만들기를 시작하며 앞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손에서 놓지 않을 국가폭력의 만능검을 벼리고 있었다.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벌어졌다는 의미에서 한국이라는국가 연루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북한이라는국가와도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분단체제의 극복이 체제의 통합이든, 체제의 비적대적 안착이든, 새로운 평화체제의 도래든, 체제의 극복 또는 분단 문제의 해결 없이 4.3사건의 진정한 해결, 진실 규명과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국가폭력, 국가범죄의 단죄는 국가에 대한 성찰,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계 맺음의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터이지만 우리의 사고는 어쩌면 고립된 섬처럼 갇혀 있고 어느새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만들기는너는 누구 편이냐?” 물음으로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비국민은 곧바로=절멸의 대상 되었다. 그리고너는 누구 편이냐?” 물음은 너는 종북인가, 너는 이성애자인가, 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가, 너는 복무를 마쳤는가, 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가, 너는 성실한 납세자이며 근로자인가, 너는 순수한 시민인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하며 여전히 합동신문센터에서, 대공분실에서, 청문회장에서, 일터와 쉼터에서, 집과 학교에서 그리고 광장과 거리에서 오작동의 작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그해, 파리의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열흘 한시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정의 해군기지 문제, 소성리의 사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기만 이때 인권운동은 과연 어떤 응답을 마련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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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은 까닭에 친가의 사랑은 받지 못한 반면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릴 적 내가 들은 옛날이야기 대부분은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것이다.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백하자면 발터 벤야민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를 둘러싼 어떤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사유나 이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여기저기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그의 글은 어릴 적 옛날이야기처럼 매혹적이었다. 특히 그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누군가는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인권활동가들을 ‘인권의 저자’라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영락없는 이야기꾼들이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오면 대청마루에 붙들어 앉혀놓고 마을의 유구한 전통을 주절주절 풀어놓는 ‘어르신’이 아니라 부엌 아궁이 근처에서 들을 놈은 들으라는 듯 무심히,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마을의 숨겨진 내력을 풍문처럼 읊조리는 할머니 같은 이들.



이 저널이 그런 이야기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권저널 준비모임(이제 ‘준비’자를 떼야겠지만)에 내 마음대로 “이야기꾼에 대한 이야기”라는 구절을 슬쩍 달았다. 좀 더 공식적으로는 기획편집위원회라 할 수 있는 이 모임은 6읠 첫 모임을 시작으로 저널이 발간이 되기까지 총 여섯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첫 모임에서 저널의 편집 방향을 함께 기획하고 토론을 통해 같이 원고를 생산하는 작업 방식으로 잡았고, 이후 매번 모일 때마다 네댓 시간을 훌쩍 넘기는 토론이 이어졌다. 거기서 나왔던 글들이 보태어지고 깊어지며 이렇게 원고가 되었다. 목차의 구성은 물론 각 원고의 내용까지 함께 검토하며 인권저널은 이제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는다. 



첫 번째로 실린 ‘이야기에 기대어 말을 이어간다’(류은숙)는 부제 ‘인권운동을 묻다’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의 인권운동을 돌아보고 있다. 하지만 연도 별, 사안이나 의제 별 접근이 아닌 인권운동이 그간 어떤 이야기를 해왔는지, 인권운동의 언어가 무엇이었으며 어떠했는지를 통해 인권운동과 인권운동의 언어가 가진 현재적 의미를 짚은 독특한 회고이다. 류은숙의 글이 인권운동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나영정의 ‘정체성 정치, 교차성 정치, 인권의 정치’는 인권운동이 피해자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피해를 승인하는 권력에 맞서 어떻게 피해자의 자리에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당면한 현실에서 솟아오른 질문들을 담았다.  



창간호에 걸맞게 인권운동에 수많은 영감을 주었던 연구자 엄기호,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미디어활동가인 김일란 감독, 본지 편집위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인 김영옥, 이렇게 세 분을 모시고 ‘고통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주제로 좌담을 진행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서 출발했지만 어떤 가능성을 간간히 엿보이며 현재의 인권운동, 그리고 이 저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환기하고 그래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자리였다. 이 좌담은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이 진행한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기록할 것인가> 연속 강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평등에 거듭 도전해야 한다면’(미류)과 ‘변혁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정정훈)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제언이다. 미류가 인권운동의 자리 이동을 통해 ‘함께 실패하는 연대’로 세력화의 모색을 구상하고 있다면, 정정훈은 1990년대 이후 인권운동을 ‘2세대 인권운동’으로 이름 붙인 뒤 근 25년간의 전개 과정을 짚어보고 3세대 인권운동으로의 전환을 주문한다. 두 글 모두 새로운 만큼 여러 개의 물음표가 달릴 수 있는 주장을 담고 있기에 더욱 많은 이견과 의견, 응답을 기대한다. 



글이, 저널리즘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하기보다는 세계를 망가뜨리고 사회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거기서 인권운동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력감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잡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보다 고단한 무대 뒤에서, 광장의 중심이 아니라 그 언저리에서, 바로 지금도 후미진 뒷골목 어딘가에서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꾼들 덕분이다. 그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그들과 연루되어 오늘의 인권 현실에 눈 감지 않는 더 많은 이들과의 마주침을 꿈꾼다. 이야기는 또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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