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과 차별금지법
 


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릴 때마다, 길을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그놈의 G20 타령은 거의 공해 수준입니다. 내용도 우리나라가 G20 의장국이니 레스토랑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자제하자는 둥 외국인을 만나면 미소를 짓자는 둥 어이없습니다. KBS노조 발표에 따르면 KBS가 G20과  관련해서 이미 방송을 했거나 방송을 준비 중인 특집 프로그램만 60개, 55시간에 달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G20 성공기원 콘서트와 영화제, 릴레이 명사 강연 등등. 정작 G20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성공리에 치르면 국가 브랜드가 올라간다는데 어찌 올라가는지는 쏙 빠져있습니다. 이 무슨 “남자한테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만 되풀이하는 건강식품 광고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다 엊그제 광화문에서 색다른 플래카드를 보았습니다. 문구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세계 67개국이 참전해서 지킨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이 G20정상회담 의장국이 되었으니 어려운 이웃나라를 대변해야 한다”는 요지였습니다. 그 밑에는 한국전쟁이 최대 참전국이 참가한 전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도 되었다는 글귀도 적혀있었습니다. 별 걸 다 갖다 붙인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 G20이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 스무 개 나라의 모임이고 영국, 미국, 캐나다 같은 이른바 서방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이니 그럴듯한 주장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이 어려운 이웃나라를 대변할 위치에 있는 것인지, 어려운 이웃나라들은 그걸 원하기나 하는지 살짝 의문이 생깁니다. UN과 같은 공식 국제기구도 아니고 그야말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친목모임 수준인데 괜히 거들먹거리고 호들갑을 피우는 게 꼴사납지나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네 이웃은 누구인가.” 지난해 용산참사 현장에 걸려있던 수많은 플래카드 중 하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네가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은 다 모른 척 지나가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핍박받던 사마리아인이 도와주었다. 그럼 네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는 사마리아인이 바로 네 이웃이며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고 이 문구가 용산참사 현장에 걸린 취지도 이해는 가는데 워낙 심사가 삐뚤어진 탓인지 이웃이라고 하면 ‘불우이웃 돕기’가 떠올라 저는 그걸 보면 왠지 불편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동네지만 지난 며칠 또 한 차례 개신교 때문에 사이버공간이 시끄러웠습니다. 이른바 ‘봉은사 땅 밟기’란 동영상이 인터넷상에 퍼졌는데 몇 명의 젊은 개신교 신자들이 늦은 밤 봉은사란 절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고 불탑을 잡고 기독교식으로 기도를 올리며, 불교를 비하하고 절이 무너지라고 기원하는 내용이었죠. 동영상이 크게 문제가 되자 담임목사와 젊은 신자들은 봉은사를 방문해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개신교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동영상을 보며 자연스레 차별금지법이 떠올랐습니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려다 안 된 제일 큰 이유는 차별 사유에 ‘성적 지향’이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고 이를 반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종교계, 특히 보수적 개신교 집단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법무부에서 다시 차별금지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니 아니나 다를까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빌미로 5월부터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를 조장하는 신문광고가 실리기 시작하고, 며칠 전에는 “동성애차별금지법이 11월 중 처리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성경을 가지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만 해도 처벌된다”는 문자가 돌고 다음날 법무부 사이트가 마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29일 국회에서는 ‘동성애차별금지법 입법반대 포럼’이란 행사도 열렸습니다. 그만큼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동성애를 계속 차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007년과는 다르게 매우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일부에서는 동성애를 거부할 권리,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표현의 자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권리를 빼앗을 권리,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자유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기 이전에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스스로 되묻게 됩니다. 저는 종교에는 문외한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안다고, 불경을 좀 읽었다고 종교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핍박받는 이웃과 함께하지 않는 종교, 차별받는 이들과 이웃하지 않는 종교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G20 행사에 비하면 아주 초라하지만 올해는 전태일 열사 40주기로 매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 이번호 기획도 ‘전태일 40주기, 다시 보는 근로기준법’입니다. 근로기준법이 그러했듯 차별금지법도, 그 어떤 법률도 세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하지만 전태일이 그랬듯이 법률 하나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읽히느냐에 따라서 역사적 사건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전태일 평전』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열여덟 그 시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학교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 내신등급은 좀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올해는 또한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의 20주기이기도 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는 전태일에게 그리고 조영래에게 참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은, 비록 때늦은 안타까운 만남이지만 참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좀 뜬금없지만 이번호에는 인권재단 사람에서 주최하는 문정현 신부님의 헌정공연을 즈음해 사진작가 노순택의 신부님에 대한 헌사를 실었습니다. 사진이 아닌 잔글씨로 노순택이 기록한 문정현 신부의 행적을 읽으며 문정현과 대추리, 문정현과 용산, 문정현과 노순택의 만남도 생각해봅니다. 《사람》도 이렇듯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자리가 되고 그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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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표지모델은 문정현 신부님입니다. 역대 표지모델 중에 가장 유명인사가 아닐까....

 

이번주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문정현 신부님 헌정공현(http://cafe.daum.net/hrfund)에 맞춰 사진작가 노순택 님이 사진도 찍어주시고, '추가된 문정현 사찰 기록카드'라는 글도 한 편 기고해주셨지요.

 

이번호 기획은 전태일 40주기에 맞춰 근로기준법에 대해 다뤘습니다. 근기법의 역사와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인권의 관점에서 근기법을 재구성해보자는 제안까지... 그리고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서 글도 두 개 실렸습니다.

 

종이 잡지는 이제 막 인쇄 중이고 사이트도 조만간(?) 업데이트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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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0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수 기독교 단체에서는 동성애와 관려해 성경 말을 인용해도 처벌을 받느냐고 극렬 반발하는 분위기더군요ㅜ.ㅜ

나무처럼 2010-11-03 15:45   좋아요 0 | URL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도 종교에 따른 차별이 없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보수 기독교 단체는 이 문제를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로 몰고가는 듯 합니다. 그들에게 선교, 종교의 자유는 다른 사람을 차별할 자유를 말하는 것인지...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블로그보다 페이스북이란 걸 더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네요.

<사람> 11-12월호에 이 정부의 전자주민증 추진에 대한 글을 싣기로 했는데 도무지 청탁방향을 못 잡겠어서 고민중입니다. 90년대 중후반, 2000년대 중반에 이어 세번째로 정부에서 다시 추진 중인데 10년 전, 15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 없는 같은 논리, 같은 반박, 참 힘 빠지는 모양새입니다.

스마트 카드가 들어간다는 말에 관련 주가가 치솟고, 행자부는 개인정보 유출을 더 확실히 막을 수 있다는 괘변을 늘어놓고, 게다가 이메일 감청에 생체여권에 공항 알몸투시기까지 등장하는 마당이다보니 이게 대세인가 싶기도 합니다.

뭔가 좀 새로우면서도 명쾌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기사 전자주민증 자체가 워낙 진부한 레파토리다보니...

얼마전 행자부는 사기단에게 국새 사기를 당해 망신살이 뻗쳤는데 이참에 전자국새나 만들일이지, 왜 이러는 걸까요? 

그런데 뜬금없이 쓰다보니 전자제품과 전기제품의 차이가 궁금해집니다. 전자렌지와 전기밥솥은 대체 뭐가 다른 건가요?  




관련기사 --> MB, 9월 국회서 전자주민증 강행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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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반대 2010-09-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자주민증이 대세가 아니죠. 국민 대다수 모르는 가운데 정부가 진행중이죠. 이번에도 반드시 막아내구 폐지해야합니다. 인간은 기본권과 존엄성이 있어요.
 

제목 그대로다. 요즘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모르겠다. 주구장창 내리는 비에 지겨워하다 문득 오늘 파란 하늘을 봤는데, 이게 얼마만인지... 어느덧 9월 중순, 찬 바람이 분다.  

9월 6일 둘째가 태어났다. 퇴원 후 산모는 아이와 산후조리원에 들어갔고 나는 네 살 난 아이와 한부모 가정 체험을 하고 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내가 아이를 깨우는 게 아니고 먼저 일어난 아이가 나를 깨운다) 밥하고, 밥 먹이고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아침에 씻기지 않는다. 자기 전에도 아이가 땀에 찐득찐득 해야 "우리 씻고 잘까?" 슬쩍 물어보곤 하는데 아이는 다행히 씻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이 집에 보낼 준비물을 챙기고, 그래도 티가 너무 날가 싶어 머리 빗겨 묶어주고, 옷 갈아입히고, 아이를 보내고 출근을 하고, 6시에 아이를 데려와 밥먹이면서 놀아주면서 하다 씻기고(얼굴만), 책읽어주다 재우면 10시 반이다. 밀린 빨래 하고, 보리차 끓이고, 집안 정리 하고 그러면 11시, 12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딱 12시 10분이다.  

블로그? 그런 거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한부모 가정 체험 덕에 첫째와 무진 가까워졌고 애착이 생겼지만(이제 그만 생겨도 좋을 것을...) 도대체 책 한 권 펼쳐본 게 언제쩍인지 모르겠고, 세상 돌아가는 건 신정환, 태진아 이야기 정도 밖에 모르겠다. 

그러다 엇그제 새로운 출산장려정책이란 게 나왔다는데, 우리 마눌님 같은 비정규직은 육아휴직은 전혀 해당사항도 아니고 당연히  땡전 한푼도 못 받는데  월 250만원 소득의 정규직 여성에게 월 100만원이나 준다는 말을 듣고 마눌님과 함께 분을 삭히지 못했다. 젠장!

하여튼 결론인즉은, 새삼 이 땅의 모든 워킹맘에게 경의를 표한다, 는 것이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났음에도 3.46킬로그램이란 만만치 않은 체구를 가진 신생아. 그래서인지 목이 없다. 태명은 '벼리'였는데 이제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이름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뭐라고, 한 아이가 수십년 동안 불릴 이름을 지어준단 말인가. 기회가 되면 모든 이들이 성년이 되면 (혹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개명의 기회를 부여하여 자기 이름은 자기가 짓게, 혹은 동료가 지어주게 하는 제도를 제안해보는 운동을 해볼까 고려중이다. 어쟀든 이 둘째 딸내미의 이름은 '윤슬'(달빛이나 별빛이 어른거리는 잔물결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 어떨까 생각중인데 누구는 좀 쓸쓸하데나... 하여튼 고심 중이다.    

 

 

 
첫째 딸 윤이. 외자 '윤'이 이름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36개월, 꽉 찬 네살이다. 추석 전에는 어린이집에서 한복을 입고 오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해서 처형네 가서 빌려왔다. 이 아빠의 가상한 노력을 이 아이가 얼마나 알아줄지... 중2가 되면 꼭 이 사진을 보여줘야겠다. 어쨌거나 마음에 들었는지 한복을 입더니 한동안 벗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려고 해서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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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9-15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둘째 태어나서 정말 기쁘시겠네요.정말 축하드려요^^

나무처럼 2010-09-18 01:02   좋아요 0 | URL
감사^^ 그런데 둘째가 아니라 막내이길... 흐흐
 

지난달 25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제주인권회를 다녀왔습니다. 태어나서 세 번째 비행기 여행이었습니다. 여전히 공항은 낯설고 비행기 안에서는 바짝 긴장이 되더군요. 운 좋게도 돌아올 때는 처음으로 창가 자리에 앉게 되어 몇 천 미터 상공에서 저녁놀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이번 제주인권회의에서는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 건강권 등과 같은 사회권을 다뤘는데 저는 장애인으로 20년 동안 시설에 갇혀 지내다 나와 지금은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을 하는 김동림 활동가와 함께 다니는 덕분에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중증장애인과 같이 길을 걷고 지하철을 타본 적은 있지만 비행기는 처음이었죠. 아무리 저가 항공이라지만 탑승객이 200만 명을 돌파했다는 항공사였는데 전동휠체어가 등장하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고 하면서의 번거로움은 그렇다 치더라도 100명을 넘게 태우고 하늘을 나는 최첨단 이동수단에 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자리 하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요?


물론 항공사 직원들은 참으로 친절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나마 교육효과가 있었는지 불편을 최소화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절한 항공사 직원들은 하나같이 저만 바라보고 저하고만 상의를 하려 드는 겁니다. 김동림 활동가가 저보다 나이도 더 많고 훨씬 지적(?)으로 생겼으며 대화가 힘든 상태도 아니고 너무도 당연히 저보다는 장애인 이동과 관련해서 아는 것도 더 많은데 말입니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흡연실로 가서 “기분 참, 그렇죠?”라고 했더니 사람 좋은 김동림 활동가는 그저 미소만 짓더군요. 동행한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임소연 활동가는 첫 날부터 ‘사회권, 돌봄과 나눔의 공동체’란 제주인권회의의 큰 주제를 보고는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중에 돌보는 사람의 입장에 있는 개념이고 활동보조라는 개념은 그 반대라며 저한테 ‘트집’을 잡았는데 괜한 트집이 아닌 것이지요.


이번 제주인권회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환경미화원의 건강권 문제를 짚은 영상이었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음식물 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 처리를 민간에 위탁하면서 거기에 고용된 미화원들의 작업조건은 심각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샤워시설 하나 없는 쓰레기 처리장 옆에 오염된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하나 달랑 달린 컨테이너 박스에서 쉬며 일을 마치면 더러워진 몸을 씻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들의 손과 발, 옷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에도 버스터미널 화장실보다 몇 배 많은 세균이 묻어있는 채로 말이죠. 또 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미화원들이 일하는 시간은 대부분 사람이 드문 새벽이고, 쓰레기 처리장은 거의 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시 외곽의 한적한 공터였습니다. 영상을 보며 ‘나는 왜 하루에도 엄청난 쓰레기들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이 어떤 이들의 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처리되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나?’ 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어도 무시되기 십상인 사람들, 아예 보이지도 않게 가려지고 덮어지고 치워지는 사람들, 이런 이들의 이야기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다 담지 못하겠지요. 이번호 《사람》의 좌담에도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거리 환경정화를 해야 한다며 노점상 특별단속반을 편성하고 노숙인 복지 대책이란 명목으로 노숙인 수용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몰리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그동안 단속을 하던 출입국관리 직원만이 아니라 이제는 경찰이 직접 나서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으니까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마음의 눈으로 이들을 찾아 나서고 연대의 손을 마주잡는 것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솔직히 제주에서 2박 3일 동안 참 좋고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어렵기만 한 이야기를 듣느라 많이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혹시 《사람》도 여러분에게 그런 존재가 아닌가 많은 반성을 했지만 이번호도 크게 나아지지는 못한 듯싶습니다.


좋은 답은 좋은 질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좋은 질문을 위해서는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저는 가끔 지금은 없어진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인터넷으로 다시 듣곤 합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 앉아 몇 천 미터 상공에서 저녁놀을 보며 문득 200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녀가 떠올랐습니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정리해고에 맞서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다가 129일 만에 주검으로 내려온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지부장의 부음을 접하고 그녀가 한 오프닝 멘트입니다. 《사람》을 마감할 즈음 2008년 서울역 앞 철탑에 올랐던 KTX 여승무원들이 마침내 재판에서 이겼다는 기쁜 소식과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이포보에 올랐던 환경운동가들이 무사히 내려왔다는 다행스러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000일을 넘게 싸우면서 두 차례나 철탑에 올라가야 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 70미터 높이 굴뚝에서 50일을 싸웠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용산 남일당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들……. 다들 잘 계시나요? 우리 목소리 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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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은임추모사업회(http://www.worldost.com).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 2003년 10월 22일 방송.   
**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9-10월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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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자 - 김대중, 빛바랜 사진으로 묻는 오래된 약속
오동명 지음 / 생각비행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꽤나 유명한 사진가 로버트 카파는 너무나 유명한 말을 했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게 쉽다면 누구나 카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파 같은 사진가는 많지 않고 그런 사진기자는 한국에는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동명은 그런 사진가였나?  

 

표지에 등장하는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시절 시위 현장에서 어느 전경이 던진 최루분말을 얼굴에 맞고 걸어가는 사진이다.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저자 오동명은 그때 자신도 최루분말을 맞았으나 다행히(?) 어느 가정집에서 얼굴을 씻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러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저택이 있던 서울 연희동 골목 어느 집도 김대중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김대중은 그의 참모와 한참을 고통스러워 하며 돌아다녀야 했다고 한다. 이 한 장면은 마치 김대중의 고난한 삶을 압축해놓은 것 같다. 이 특종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은 중앙일보 데스크에서 거절당하는 것으로 또 한 번 모욕받게 된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피사체가 된 사진마저도 차별의 대상이 되고 배제가 되어야 했던 정치인.  

저자 오동명은 그를 화장실에서 만난 이후 신문에 실리지 않는 그의 일상을 기록했다. 단순히 피사체로 카메라 앵글에 담은 것만이 아니라 피사체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찍었고 찍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기에 이 사진집은 한 사진기자가 찍은 정치인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사진기자가 묻고 정치인이 답했던 대담과도 같이 읽힌다.  

저자는 지난해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 이후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으며, 그리고 김대중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오래된 사진을 찾아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 권의 위인전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책을 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연히 졸고 하품하고 딴청피우는 인간적인 김대중의 사진들이 들어있다. 또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여러 오해(대부분 악의적인)에 대한 해명과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고 전직 대통령이자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하고 뛰어났던 한 정치인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과 불만까지 가감없이 실려있다.   

책을 덮으며 저자가 사진기자가 아니었다면, DJ를 비토했던 중앙일보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더라면, 중앙일보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만남이 어떤 모양새로 기록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둘은 만나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콤플렉스를 한 몸에 가졌으며(그는 호남이었고 첩의 자식이었으며 상고 출신이었다) 수많은 비방과 흑색선전에 시달렸고, 사형수였으며 장애인(그는 박정희 시절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고 죽기 직전까지 신장투석을 받는 만성신부전증 환자였다)이었다.  

그가 역사 속의 인물이 된지 1년, 그에게는 참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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