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옥의 뜨거운 심장을 아세요?

세월이 갈수록 현명해져가는 드라마 <굿바이 솔로>의 그 여자… 무당이기보단 고뇌하는 인간적 배우의 마흔 셋이 아름답다

▣ 백은하 <씨네21> 기자

한낮의 재즈바. 너무 인공적이어서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에메랄드빛 칵테일을 앞에 놓고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다. 밑줄을 치고 중얼중얼 혼잣말도 곁들여가며. 그러나 그녀가 골똘히 읽고 있는 책은 폴 오스터도, 코엘료도, 헤세도, 이해인도 아니다. 바로 홈쇼핑 가이드북이다.


△ 한없이 가벼운 여자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낯선 백반집 할머니에게 눈물을 보이는 <굿바이 솔로>의 종잡을 수 없는 오영숙 역할을 배종옥은 아무렇지 않게 소화해낸다.

한국방송 미니시리즈 <굿바이 솔로>에서의 배종옥, 아니 오영숙은 늘 이런 식이다. 세상사 고통을 다 짊어진 어두운 눈빛을 하다가도, 이렇듯 엉뚱하게 사람의 힘을 쑥 빼버린다. 화려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채, 허름한 백반집 할머니와 볼을 비비고, 남편에겐 주눅들어 찍소리도 못하다가, 외간 남자가 녹차를 시키면 여기는 커피가 맛있다고 자기 맘대로 주문해버리는 막무가내인 여자다. “뭐 저런 년이 다 있어?” 쳐다보면 “신경끄셔!” 대답이 날아올 것처럼 까칠하다가도, 상처 입은 자들에겐 어머니 같은 품을 열어 끌어안아버리는 다정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어쩌면 어쩌면 미친 여자다.

장황한 배우론은 없다, 그냥 물같다…

그러나 배종옥이란 배우를 실제로 만나면 좀 당황하게 된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성격 있는’ 여자 대신 도통 속내를 알 길 없는 여자가 눈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배우는 장황하게 배우론을 늘어놓지도, 넘쳐나는 끼나 감수성으로 함께 있는 사람을 즐겁게 만들거나 울리지도 않는다. 거만하지도 겸손하지도 폐쇄적이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색도, 향도, 맛도 없다. 그냥 물 같다. 그러나 이런 물 같은 천성이 이 배우가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배종옥’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법을 알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엔 <거짓말>의 성우가, <바보 같은 사랑>의 옥희가, <질투는 나의 힘>의 성연이, <굿바이 솔로>의 ’오 여사’가 있을 뿐이다.

물론 배종옥 하면 여전히 <도시인>이나 <목욕탕집 남자들> 등의 드라마에서 나왔던 똑부러지는 커리어우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동그랗고 귀여운 눈을 크게 뜨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사를 숨도 쉬지 않고 늘어놓던 그녀는 ‘대사발’ 좋은 작가들의 애장목록 1호였다. 그러나 그 빈틈없이 견고했던 한 여자가 사랑 앞에 와장창 무너져서 “사랑이 또 온다고 말해줘, 또 온다고~” 하며 울먹이던 <거짓말>의 그 순간에, 우리는 알아버렸다. 이 얄미운 모범생 같은 여자에게 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등장해 세상 사람 다 말리는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버렸을 때 우리는 알아버렸다. 이 손해볼 짓 안 할 것 같던 깍쟁이에게 순정이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잘 배워서 똑똑하고 쿨한 여성을 연기하던 그녀는, 이제 세월이 갈수록 잘 늙어서 현명해져가는 뜨거운 여자를 연기한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쿨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진짜 쿨한 게 뭐냐면, 진짜 쿨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라는 노희경 작가의 대사가 배종옥의 입을 통해 나오면 우리의 오랜 오해는 그렇게 눈 녹듯 녹아버린다.


△ <거짓말>의 성우는 빈틈없이 견고하다가 사랑 앞에 무너져버리는 여자였다. 성우를 통해 모범생 같은 배종옥에게도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64년생, 올해로 마흔셋에 이른 배종옥은 더 이상 ‘푸른 해바라기’같이 해사한 소녀도, ‘걸어서 하늘까지’ 뛰어갈 듯 파닥거리던 ‘날치’ 같은 청춘도 아니다. “나이가 들면 누나처럼 명쾌해지냐?”고 묻는 어린 것에게,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라고 담담히 말하는 늙은 것이 되어버렸다. 지난 10년간 배종옥과 함께 작업해온 노희경 작가는 배종옥에 대해 “타고난 재주도 끼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코가 예쁜 걸 제외하면. (웃음) 배종옥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게 없는 사람이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또 “개인적으로 끼로 연기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게 넘쳐버리면 배우가 무당 같아져버린다. 나는 무당보다는 그저 고뇌하는 인간인 배우가 좋다. 배종옥은 그 나이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한다. 촬영장에도 가장 먼저 온다. 자기 신이 많다 적다 한마디 하는 적이 없다. 그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나를 순간순간 고민하고, 한순간도 대충 살지 않는 여자다. 끼가 넘쳐나는 배우는 옆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만, 노력하는 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그 나이쯤 되면 그동안 쌓아논 것으로, 이름값으로 대충 먹고살지만 배종옥은 끊임없이 벌어나가고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나잇값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나잇값을 하는 배우다. 그녀가 늙어가는 걸 보는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저런 동료를 가진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10년 작업한 노희경 작가 “힘을 주는 동료"

한때 나이가 들어가는 건 더 강해지고, 더 독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청춘을 부끄러워하고, 우유부단했던 젊음을 버려야만 쟁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더욱 동글동글해지는 배종옥의 얼굴은 각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게 배종옥이란 배우의 존재는, 모든 늙어가는 것들에게 내려진 희망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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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문예회관 대극장 (아르코 예술극장)  지하 연습실에서 배종옥은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초청한 공연팀들의 공연을 준비하던 나는 검은 9부 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걸쳐입은 배종옥이 지날때 마다 그녀가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치 하나의 소실점같았다. 하나의 선과 선이 만나 입체감을 주는 소실점 같은 그녀는 생각과는 달리 왜소했다. 맨얼굴의 배종옥은 연습에 치중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물묻은 손을 흩뿌리고 가면 그 한방울 물기가 착지하는 지점까지 쫓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투가 참 좋았다. 그즈음 막 뜨기 시작한 배우 송강호는 연극 무대에서 내려온 후 두터운 휴대폰을 손에 쥐고 고개를 푹 숙인채로 지나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겸손이 그의 겸허가 스타 의식으로 오인되는 순간이었다. 송강호가 뜨기 전 그가 출연한 연극 '비언소' 에서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내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보를 터뜨린 연극은 비언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그가 다시 돌아와 연극 무대에 서게 된다면 나는 그만큼 또 웃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 나이 탓도 있었을 거다. 내나이 푸르고 푸르러 말똥구리만 굴러도 웃음이 나던 무렵이 문득 그립다. 송강호가 지나가던 그 길을 배종옥은 무표정하게 지나갔다. 배종옥은 지하 연습실로 내려가 다시 연습에 몰두했고 나는 몰래 들여다봐야지 하면서도 일에 치여 내려가지 못했다. 얼마전 '러브 토크'에서 배종옥은 연기 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의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녀가 즐겨 입는 옷은 참 멋스럽다. 작은 키를 애써 가리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 자신감이 코디하고 있으며 그녀가 입는 옷들은 늘씬한 마네킹이 입으면 딱 좋을 늘씬한 옷들이었다. 굿바이 솔로에서 배종옥이 윤소이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한다. 배종옥은 헐렁한 하얀 남방 셔츠에 짙은 색 청바지를 입고 예쁜 소파에 고개를 치켜들고 몸을 세워누웠다. 그 옷이 참, 예뻐보였다. 한때 우리 언니들이 즐겨입었던 80년대 패션, 헐렁한 흰 남방에 청바지가 배종옥에게서 촌스럽지 않게 살아났다. 배우의 얼굴은 무난해야 참 좋다.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배우라는 이름 보다 연예인 이라는 이름에 가깝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배종옥이 친구의 집에 놀러가 설거지를 자처한다. 친구의 싱크대에는 기름끼 있는 수세미 따로, 그 외 식기를 닦는 수세미가 따로 있었다. 배종옥이 실수로 기름끼를 닦는 수세미로 그릇을 닦으려 하니까 친구가 웃으며 가로막는다. 그 장면에서 배종옥의 아스라한 표정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굿바이 솔로'의 배종옥이 어떻게 '꽃보다 아름다워', '러브 토크'와 다른 연기를 보여줄까 기대했는데 그녀는 배신을 모르는지 충실하게 회를 거듭할수록 오영숙이 되어가고 있다. 수요일 목요일마다 작은 시네마 테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는 배종옥을 바라본다. 노희경은 방송국 작가실에 쳐박혀 줄담배를 피우며 글을 쓴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럴까. 몇해전에 주워들은 얘기이니 지금도 그럴지 안그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좋은 게 아니라 그녀가 연기하는 역할에 매료되었을거다. 고독하고 담백한 연기(smoking) 같은 연기(ac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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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4-0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종옥도 얼굴에 세월이 묻어나네요. 다른 영화들보다도 long long ago 시절의 드라마 <왕륭일가>에 나왔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mong 2006-04-04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래도록 마음속에 꾸준히 마음에 남아 있는 배우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좋아할 것 같은 여자....

플레져 2006-04-04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왕륭일가...아...정말 오래된 드라마네요. 기억해내고 보니 먼지처럼 딸려나오는 추억들이 또...있네요 ㅎㅎ

몽님, 몽님의 두 줄에 저도 한표 ^^

두 분! 시간 되시면 좀 전에 올린 마이 리뷰 : 맘에 드는 오렌지색 립글로스 도 좀 보셔요! ㅋㅋ (모처럼 쓴 화장품 리뷰에 반응이 없어 댓글에서 숨어 홍보하고 있는 플레져씨~ ^^)

산사춘 2006-04-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희경-배종옥, 인정옥-윤여정 세뚜만 보면 가슴이 뛰어요.

Mephistopheles 2006-04-0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종옥씨의 요즘 모습을 보면....물이 완전히 올랐다..라는 말이 있는 듯 싶어요..^^

플레져 2006-04-04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노희경, 인정옥씨는 참 행복할거에요. 자신의 드라마를 빛내주는 배우들이 있어서 ^^

메피스토님, 그녀는 연기하면 항상 물이 올라요...^^

깍두기 2006-04-0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무당보다는 그저 고뇌하는 인간인 배우가 좋다. 배종옥은 그 나이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한다. 촬영장에도 가장 먼저 온다. 자기 신이 많다 적다 한마디 하는 적이 없다. 그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나를 순간순간 고민하고, 한순간도 대충 살지 않는 여자다. 끼가 넘쳐나는 배우는 옆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만, 노력하는 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그 나이쯤 되면 그동안 쌓아논 것으로, 이름값으로 대충 먹고살지만 배종옥은 끊임없이 벌어나가고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나잇값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나잇값을 하는 배우다. 그녀가 늙어가는 걸 보는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제가 너무 좋아하는 배종옥.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 나도 저렇게 늙어가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나 모르게 노희경작가의 드라마를 방송하다니, 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 게 확실해ㅠ.ㅠ
플레져님 고마워요. 오늘 당장 인터넷으로 지난 방송분부터 봐야지.

플레져 2006-04-0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KBS2 수목 드라마여요. 방송한지 한달쯤 되었으니 인터넷으로 보셔도 벅차지 않을거에요. 속세와 인연, 잠깐 늦추고 살아도 괜찮지요 모 ^^;;

stella.K 2006-04-04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글은 당신 글이엇수? 한참 넋을 잃고 읽었다는...^^
노력하는 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이말이 왠지 나에게 힘을 주네요. 퍼가요.^^

미미달 2006-04-0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는 나의 힘> 영화는 진짜 별로였는데,
이 영화에서의 배종옥이 맡았던 캐릭터가 그녀와 참 잘 어울렸고,
또 그만큼 잘 연기했었다고 생각해요.

잉크냄새 2006-04-04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그런 화장품을 사용할수가 없어요. 쉐이브 스킨이나 로션이라면 모를까. 아시면서.^^

이리스 2006-04-04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은하씨 기사네요. ^^;;

2006-04-05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4-05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네, 제가 쓴거에요.
님에게 힘이 되는 말 드시고 힘 내세요! 홧팅!

미미달님, 그 영화를 주의깊게 잘 못보았어요. 박해일 보느라고...ㅎㅎ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에요.

잉크냄새님, 네... 제가 결례를...ㅎㅎ

낡은구두님, 백은하 기자와 친분이? ^^

로드무비 2006-04-0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영화 페이퍼에도 커튼보다는 블라인드 배경이
어울리는 배우라고 제가 썼었죠?
이번 드라마 속의 인물도 그녀와 참 잘 어울리더군요.

연극 <비언소> 보고 송강호 때문에 으을매나 웃었는지.
연극 마치고 '멜로디'인가? 김민기 씨가 대낮에도 맥주 마신다는
카페에서 맥주 한잔 했답니다. 책장수님이랑. 히히~
전 또 연출자 박광정이 그렇게 좋더군요.

심혈을 기울여 쓰신 페이퍼 같은데요?

플레져 2006-04-0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네, 기억나요! (실은 조금 기억남...ㅋ)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갈수록 오영숙化 되더라구요.
님도 비언소를 보셨구나~ 그럼 우린 그때도 스쳤을지 모르겠네요 ^^
멜로디라... 안가본 데 같은데, 쫌 아쉽네요.
대학로에 웬만한 곳은 누볐는데 말이죵 ㅎㅎ

심혈을 쪼매 기울였어요~ 캬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