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가 선생님께서 소설 창작 교실 일화를 들려주셨다. 주로 주부들이 학생이었는데 그분들의 글 첫 문장은 늘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아침, 남편과 아이들을 회사와 학교로 보내고 클래식 FM을 틀어놓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다" 부산했던 아침을 보낸 주부의 하루는 식구들이 빠져나간 이후부터 시작되었으니 그런 문장이 나올 법도 했다. 제발 그 문장을 첫 줄에 놓지 말라고, 제발 그 문장 좀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선생님은 부드럽게 핀잔하셨다.
중고등학교때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랬던 버릇마저 싸그리 없어진 줄 알았다. 몇년 전부터 다시 라디오를 끼고 살고 있다. 클래식 에프엠도 즐겨 듣지만 이 도시의 지역방송 프로그램 때문이다. 오전 11시에서 12시까지 방송하는 음악프로그램으로 세미 클래식부터 분주한 아침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탁월한 선곡들이 장점인 프로그램이다. 음악을 들으며 움직이는 걸 좋아하다보니 라디오에 손이 간 건 자연스러웠다. 겨우 한 시간 정도의 음악프로그램이지만 그 한 시간을 청취하기 위해 미리 번거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동반되는 행위들은 서둘러 마쳐놓기도 한다.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 이루마입니다, 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저녁을 준비할 때는 낭만적이다 못해 분위기가 철철 넘친다. 그 순간 부엌은 대단히 독립적인 섬이다. 다른 공간의 불을 켜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연출 될 수 있는건데 나는 그 순간이 참 사랑스럽다. 주부들의 아침 풍경 클리셰처럼 내게도 그 순간은 천편일률적이나 놓치고 싶지 않은 일상의 중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주부들의 그 문장을 부드럽게 핀잔하신 건 아닐까.
어제 도착할 줄 알았던 책상자가 오늘 아침에 왔다. 알라딘 답지 않아. 나다운게 뭔데? 라고 알라딘이 항변할지 모르지만 배송만큼은 실망한 적 없던 고객으로서 실망보다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알라딘에서 배송사고나 배송 지연(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 안나니까..없다 치고) 의 나쁜 경험이 없다. 때로는 생각보다 빨리 와서 놀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택배 차량에 사고가 난걸까 하는 기우를 할 때 즈음, 밤 11시가 넘은 것을 알고 책상자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접었다. 화요일은 택배 물량이 가장 많은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오기로 한 날에 와주길 바래. 그게 알라딘다운거야-
<낭만적 밥벌이> 뚝딱, 커피 한 잔과 함께 다 읽어버렸다. 초보 카페 창업 분투기다. 구어체의 문장들이라 쉽고 빠르게 읽힌다. 막연하게 카페를 창업하고 싶은 꿈은 한겨울에 붕어빵을 사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꿈이고 유행어같다. 모두들 가볍게 커피 한 잔 마시며 얘기해본 적 있을거다. 필자도 현재 홍대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뭔가 해볼까 하다가 이렇게 버젓한 카페 사장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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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자 나이 서른 중반이 되면 창업이 하고 싶어질까?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남자라면 시기가 조금 당겨질 수도 있지만 대개 서른 중반의 남자들은 본업이든 부업이든 창업을 꿈꾼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 미래는 말 그대로 찬란한 무지개다. 눈동자는 또렷하고 에너지는 충만해 열심히 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자신의 분야에 숙련되다 보니 일을 더 빨리 처리하지만 남는 여유는 온통 꿍꿍이로 채운다. 돈을 더 벌거나 인생을 더 즐기고 싶은 궁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퇴근의 반복 속에 야근을 곁들이면 일상 탈출의 꾀가 시작되고 폼 나는 인생을 위해 '창업이나 해볼까'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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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부분 중간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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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창업할 때 점포 위치만큼 중요한 것은 어떤 인테리어 회사와 일할 것인가이다. 책의 후반에선 인테리어 회사로 인해 노심초사하는 필자의 고민이 우수수 쏟아진다. 초보니까 겪을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하겠지만 초보가 아니어도 겪을 수 있는 문제이지 싶다. 카페 오픈 후에도 인테리어로 인한 문제점들이 나타났는데 필자의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페 창업과 삼십대 중반의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책은 부담없고 재미있다. 단, 필자 자신이 1인칭시점으로 쓴 글에서 자신을 '나' 라고 하지 않고 닉네임 키키봉이라고 지칭하는데 조금 곤혹스러웠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은서 밥 먹을래~ 은서 화장실갈래~' 하는 것처럼 귀엽지만은 않았으니... 부담없이 읽기엔 좋지만 내 팔에 돋은 닭살은 누가 책임질것인가.
작년에 새 mp3를 구입하면서 <카모메 식당>을 옮겨 넣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카모메..는 골백번도 더 봤다.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카모메, 평화롭게 자고 싶을때도 카모메...를 재생한다. 어떤 날은 오디오로만 카모메를 만난다. 사치에상이 처음 시나몬롤을 만들었을 때 마침내 두번째 손님들이 들어온다. 손님들이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카모메에 들어온 것처럼 어디선가 폴폴 계피향이 풍겨오는 것만 같다. 그게 바로 카모메의 매력이고 마법이다. 그다음 핀란드인 부부를 위해 요리를하는 장면에서 '쇼가야키' 가 등장한다. 그 요리가 알고 싶어서 <라이프 : 카모메식당, 그들의 따뜻한 식탁> 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돼지고기 등심 슬라이스를 프라이팬에 굽고 기름은 말끔하게 제거한 다음, 양념장을 붓는다. 일본 가정식 상차림의 장점은 담백하다는 것과 먹기에 부담이 없다는 건데 역시나 소박하고 따뜻한 가정식 요리들이 담겨있다. 초보 요리사에게는 조금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손이 익은 이들에겐 새로운 메뉴 개발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부록으로 딸려온 레시피 수첩 (나의 레시피를 기록할 수 있다) 과 아오모리 사과 모양의 타이머도 요긴하게 쓸 것 같다.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생활> 은 작가의 문체가 인상적이다. 이토록 자기 위주의 1인칭 문장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1인칭 화자인 나 자신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과 이성들을 조합해 놓은 문장들이었다. 현미경은 비교 대상도 아니다. 나노나노나노 마이크로 감성과 시선때문에 처음엔 책을 내려놓을까도 했다. 편집증적일 정도로 초초초초예민한 감성도 부담스러웠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시골로 가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는 아가씨의 의지와 매혹적인 충돌이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했다.
시어머니께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다. 5년 정도 투자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서점에서 골라온 영어 공부 교재들을 보여주셨다. 어머님의 그런 모습이 좋아서 선뜻 mp3를 구입하고 책도 골랐다.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터라 이 다짐이 작심 3일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 mp3에 회화들을 옮기고 천수경, 반야심경도 옮겨 넣었다. 교재의 수준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딱 좋은 것 같다.
<보통날의 파스타>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이 모든 극적인 순간> 은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맛있게, 멋있게, 아련하게 읽을 준비가 되있다.
몇 년 전 서재를 휩쓸었던 만화다. 소라닌을 추천받고 당장 사서 보았을 때도 참 좋았더랬다. 두 개의 길 중 꼭 한 개의 길을 선택하라고 강요받고, 그 딜레마에 푹 빠져버리는 시절, 그때가 바로 20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 시기만 잘 넘기면 새로운 인생을, 내가 꿈꾸는 인생을 더 늦기전에 라는 희망의 슬로건을 지지대로 삼고 시작할 수 있다. 그 독만 잘 뽑아내면. (소라닌은 감자의 싹 솔라닌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다) 영화 소라닌도 좋았고 만화 소라닌도 좋다. 영화에서 타네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할 땐 울고 싶었으나 울지 못했던 20대의 어느 날로 돌아가 가슴 뜨거운 눈물을 끌어낸다.
드디어 <센스오브스노우>를 보았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이라는 근사한 우리말 제목도 있지만 원래의 제목에 더 끌린다. 책의 번역에 조금 호흡 곤란을 느껴 미심쩍었던 부분들이 있었는데 영화는 외려 더 담담하고 정직하게 구성되있다. 줄리아 오몬드의 단발 머리가 스밀라의 감각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확- 단발머리로 변신할까, 잠깐 고민했다.
누구나 죽는다. 이건 정말 피할 수 없는 명제다. <여름의 조각들>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이후 죽은 자가 남긴 것들, 물건들과 집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영화의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집의 진로는 어머니가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자리를 찾는다.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의 중심인 것처럼 관계의 투망속에 아웅다웅 섞이게 해놓았던 인생은 갈 때는 혼자 가라고 고독하게 내치고 있으니. 씁쓸한 조각들, 가끔 죽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건 그나마 아름다운걸까.
안나 가발다의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을 영화화했다. 오드리 또뚜의 얼굴에서 나이가 보인다. 왠지 서글펐다. 항상 아멜리에처럼 톡,톡 튈 줄 알았는데. 오드리 또뚜의 나이듦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나버렸다.
시간이 다 되어간다. 오늘 저녁 일용할 라디오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