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바이블 : 구약 1 액션 바이블 시리즈
세르지우 카리에요 지음, 강민정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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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즐기는 성경 이야기

-<액션 바이블 구약 1, 2, 신약>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어벤저스> 이 셋의 공통점은? 영화로 더 많이 알려져있지만,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씩(<스파이더맨>은 1962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연작 형식으로 사랑받아온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의 작화 작업에 한 작화가(일러스트레이터)가 참여했다. 마블, 디씨 코믹스 같은 주류 만화 시장에서 활동하던 그가 숙원하던 성경 이야기를 만화로 만들었다. 「액션 바이블」이 그것이다. 그동안 성경을 극화한 만화들에서 흔히 보이던 약점들, 즉 유치한 수준의 그림, 동화처럼 순진한 플롯, 지나친 생략과 단순화는 이 책에서 대부분 훌륭하게 극복됐다. 아니, 극복 이상이다.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어벤저스>를 보는 것만큼 다이내믹하고 재미있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성경 이야기를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전개하여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성경 읽기의 난점 중 하나는 여러 권(구약만 해도 39권)으로 나뉘어있어 하나의 유기적인 이야기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의욕적으로 창세기부터 시작하더라도 출애굽기 후반의 성막 제작 공정을 만나 주춤하다가, 이후는 여호수아 조금, 삼손을 위시한 몇몇 사사들, 다윗과 솔로몬 왕 정도만 약간 알 뿐, 열왕과 남북조의 역사, 포로기 전후는 단편적으로 알기 십상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은식기를 훔친 장면만, <삼국지>에서 적벽대전만 아는 격이랄까. 전체를 꿰고 있어야 재미도 있고 깨달음도 생기는 것은 성경 읽기도 예외가 아닐 터. 성경 이야기를 한눈에 꿸 수 있게 해주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확실한 미덕이다. 미덕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만화라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설과 만화의 중간 형식인 그래픽노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장르다. 유치부, 유년부, 소년부, 장년부에 속한 우리 가족 모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또한 이야기는 드라마틱하고, 그림의 선은 굵고, 인물의 몸짓에는 ‘액션’이 넘친다. 한마디로, 진부하지 않고 보는 맛이 있다. 빠져들어 읽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확실히 성경을 닮았다.


성경을 읽어줘야 하는 건 알겠는데 방법을 못 찾겠다는 부모라면, 이 책부터 시작해도 좋으리라. 그 후에 최근 번역된 <어린이 성경>(북극곰 역간)이나 오래전에 나온 보화인 <성경 이야기>(열린책들 역간)를 잠자리에서 한 편씩 읽어준다면, 성경 읽기의 기쁨과 부요함을 자녀에게 전수해주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으리라. 아이가 더 자라면 쉽고도 감동적인 ‘새번역’과 ‘공동번역’으로 가족 성경 읽기를 진행해도 많은 대화가 이어질 터. 다만 그 먼 길 떠나기 전에 이 책부터 읽을 부모라면, 부디, 먼저 읽고 예습해두시라. 이 책을 읽고 나면 아이들의 질문이 날카롭고 구체적이 될 테니(이후 아이들은 디테일을 물어올 것이다). 안심하고 읽혀도 좋을, 2011년 전미기독출판협회 수상작이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3년 2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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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 경건과 욕망 사이 사이 시리즈 4
백소영 지음 / 그린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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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욕망해야 할 단 하나의 욕망


개신교는 외로운 종교라고 한다. 가톨릭은 항공모함을 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일단 승선하고 나면 구원의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받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확증을 얻는다. 허나 개신교인은 작은 배를 타고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를 젓는 사람과 같다. 노 젓기를 멈추면 배는 어느새 뒤로 흘러 내려간다. 대신해줄 동료도, 물의 흐름을 견뎌줄 거대한 배도 없다. 홀로 부단히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구원의 확신을 수시로 경험하지 않으면 불안한 신앙인이다. 그래서일까, 정신병을 앓는 사람의 수치가 개신교인이 가장 높다고 한다. 개신교는 태생적으로 외로운 이들, 내적 고립감에 직면한 이들의 종교인지도 모른다.


부패한 중세 가톨릭과 결별하여 다른 경건을 추구하던 개신교인들은 어쩌다가 그들이 결별한 세속에서의 성공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경건과 욕망의 친화적 관계, 경건을 연료로 해서 성공을 추구하는 기형적 현상이 자리하게 된 역사적, 신학적 연원과 발달과정을 추적한다. 신 앞에 선 단독자요 만인제사장임을 주장하며 가톨릭에 저항한 개신교인은 그들의 구원 상태를 입증해줄 것이 필요했다. 그때 개신교 성직자들이 제시한 것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직업 활동은 ‘구원에 도달하는 수단’은 못 되더라도 ‘구원에 도달해 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은 될 수 있었다. 즉 노동에서의 성공이 구원 소유의 유무를 알려주는 척도가 된 것이다. 가톨릭이란 거대 조직을 떠나 근대인이 된 개신교인이 마주친 전대미문의 내적 고립감, 그 외로움과 불안을 그들은 노동에서의 성공으로 채워갔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부터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까지, 저자의 거침없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성공이 믿음 좋음의 척도가 된 이 땅의 현실이 이해가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역사적 우연성에 의해 결합된 두 지향성, 즉 경건 실천과 경제적 욕망 사이의 친밀성을 해체”할 것을, 유일한 참 욕망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욕망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경건과 욕망 사이의 불안한 줄타기에서 내려와 ‘외로웠던 사람,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공동체와 함께 그 일을 추구한다면 개신교인의 외로움과 불안도 구원을 얻지 않을까.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3년 5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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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정원 - 부모가 아이를 만들고 아이들이 미래를 만든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달팽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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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서 하나님을 보아요


아놀드 할아버지께,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손주를 여럿 두셨고 일흔을 넘기셨으니 사실 제게는 큰아버지뻘이신데, 책을 읽고 나니 당신께 할아버지, 하며 말을 건네고 싶어졌어요. 할아버지가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왠지 당신을 할아버지라 부르고 싶네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아놀드, 아마 당신 같은 분일 것만 같아요. 마흔 넘은 손자의 등을 두들기시며 세 아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장하다 말씀하실 것 같아요. 아놀드 할아버지! 막상 부르고나니, 어색하기는커녕 마음 편안하네요. 그래요, 실은 당신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기대어 이야기 좀 해보려고요. 들어주실 거죠? 듣고 나서 제 손도 잡아주시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세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고요.


할아버지의 책 「아이들의 정원」, 표지가 참 소박해서 놓칠 뻔했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권해주었기 망정이지, 서점에서 봤으면 지나치고 말았을 거예요. 지인의 권유가 있긴 했지만, 사실 책을 펼친 건 표지에 쓰인 할아버지 이름 때문이었어요.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아직 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세운 ‘브루더호프’라는 공동체에서 낸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할 그때, 할아버지의 이름을 처음 보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갖고 있는 책들을 꺼내보니, 할아버지가 쓴 책 여러 권과 함께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쓴 책들도 보이네요. (삼대가 공동체로 살면서 모두 책을 쓰셨군요!) 그 책들에서 공동체와 제자도, 가정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도전을 받았던 기억도 나요. 당시 저는 학생이었던 터라 브루더호프라는 낯선 이름이 구체적 현실보다는 찾아가야 할 어떤 지향처럼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 후로 십여 년이 흐르는 사이, 아끼는 후배 하나가 할아버지네 공동체에 들어가더니 (금발의 여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더군요. 또 최근에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가정이 그리로 이주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이 공동체가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제 삶의 언저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나 봅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는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래된 지혜’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많은 기회를 주고 웬만한 필요는 다 들어주려고 하는 요즘 양육 문화에 비춰보면 틀림없이 그래요. 할아버지는 지나친 기회가 오히려 아이를 망친다 하고, 모성이나 아버지됨, 존경, 훈육 같은 인기 없는 주제를 언급하시잖아요. “아이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 “진정한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를 훈육하라”는 말로 이 책을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역시 전통적이죠. 이 시대에는 인기 없는, 듣기 어려운, 그래서 잊혀진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그 오래된 지혜가 오히려 마음에 다가왔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옛 가르침의 필요를 절감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알 만큼 알고 할 만큼 한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그런데 정작 잘 모를뿐더러 아는 것과는 다르게 사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되요. 아이들과 몸은 같이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거나 온 마음으로 함께하지 않은 경우, 정말로 함께 ‘노는’ 게 아니라 놀아 ‘주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르침을 빌미로 아이의 마음에 상처와 죄책감을 덧씌우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부끄럽네요.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고, 할 만큼은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온 것 같아요. (좋은 아빠라는 착각과 자기 의를 지적해 주는 돕는 배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할아버지께선 “모든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시면서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까?”를 고민하는 부모가 별로 없다 하셨어요. 저 역시 아이에게 성을 내고 가르쳐 바꾸려고만 했지, 아이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했어요. 저희 교회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모든 아이는 임마누엘의 메시지라고. 가정 속의 아이는 곧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는 선물일진데, 아이를 뜯어고치려는 부모는 그러한 은총을 경험하기 어렵겠죠. 매일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하늘 아버지의 은총 안에 내가 있음을, 제대로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아이는 일깨워줘요.


얼마 전 딸과 이야기를 나눈 아내가 적은 글을 옮겨봅니다. “왜 나에게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주셨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을 많이 받으라고, 치유를 받으라고, 은혜를 누리라고, 부족함을 채우라고, 부족해도 괜찮다는 걸 깨달으라고. 네 인생에는 웃음이 갑절로 필요하다고, 어른이 되라고, 그래서 울타리를 세 겹으로 두르신 것 같다. 부모가 울타리가 아니다. 아이들이 울타리다.” 참으로 아이들은 ‘하나님의 메가폰’, 임마누엘의 메시지여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기억할게요.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은총임을 잊지 않을게요. 부모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를 지켜주는 울타리임을, 세상을 구하는 울타리임을 기억하고 사랑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아이들의 얼굴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얼굴 떠올릴게요.


언젠가 할아버지와 저희 가족, 만날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마음 다해 사랑하며 살아갈게요, 할아버지도 건강하셔야 해요.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죠!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12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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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 단편집 Echo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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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들려주는 예수님 이야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톨스토이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원작 소설(<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극화한 영화입니다. 톨스토이가 부담스러운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톨스토이의 삶을 지근에서 지켜보며 비망록을 기록하는 비서 역으로 매력적인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이야기를 들려주니 말입니다. 톨스토이에 대해 무지해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랑 영화입니다. 보고 나서 끌린다면, 톨스토이 단편집 하나쯤 집어 보시기를. 톨스토이는 어렵지만, 영화와 단편집은 쉽고 감동적입니다.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는 톨스토이가 남긴 스물네 편의 단편 중 여덟 편을 뽑아 묶은 선집입니다. 비유(이야기)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말년의 톨스토이는 러시아 민중이(그리고 21세기의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짧은 이야기로 인생과 신앙에 대해 말을 걸어옵니다. 익히 들어 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뿐 아니라 이 책에는 빠졌지만 ‘바보 이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단편들은 사실 톨스토이 개인의 신앙뿐 아니라 천 년이 넘은 러시아 정교회 신앙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때로 강도당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부모 잃은 아이의 모습으로, 심지어 강도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천사 이야기 말이죠. 톨스토이는 고딕 성당의 제단 위가 아니라 추위를 피해 교회 밖 처마 아래 떨고 있는 거지에게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왜 불쌍하고 천진난만한 아이가 고통을 받아야 하지” 하는 “질책하는 소리가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렸고” “낯선 남자를 돌아보자 불현듯 연민의 마음이 일었다” 같은 투박한 표현에, “누가 너의 이웃이겠느냐” 하는 분의 음성처럼,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맺힙니다.



톨스토이는 간디에게까지 영향을 준 평화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주창했고, 회심 후에는 <고백록>을 썼으며, 귀족 신분과 출판 인세에 따른 집과 농토와 재산을 모두 버리고 떠나 어느 열차 정거장에서 죽었다는 비범한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스토이 당대에 톨스토이‘주의자’들이 그를 성인화했듯이, 그의 특별한 신앙 체험과 결단 때문에 오늘날 (신앙을 가진) 우리도 톨스토이를 숭앙하여 거룩하게 읽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맥어보이가 분한 톨스토이의 비서이자 문학청년인 발렌틴 불가코프는 톨스토이주의자라면 사랑보다 의무를 택해야 하지 않은가 싶어 다가온 사랑조차 붙잡지 못합니다. 정작 노년의 톨스토이 자신은 여전히 사랑을 찬미하면서 “내가 아는 모든 것...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안다”(<전쟁과 평화>)고 고백하는데 말입니다. 이 작은 책, 무슨 교훈을 얻기 위해, 기독교적 독법으로 읽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만, 해가 지면 더욱 짙어지는 라일락 향기처럼, 톨스토이를 읽으며 “하늘을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이 당신과 내게서 더욱 발견된다면 좋겠습니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6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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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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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 번쩍하는 순간 + 황홀한 순간.

번쩍하고 오감이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영감의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혹은 깨달음의 찰나라고도. 그런 영감과 깨달음은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기쁨을 동반한다. 그것은 가이 황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번쩍하는 순간과 황홀한 순간은 한 단어로 모여져서 어색할 것이 없고, 오히려 둘을 나누어 버린다면 의미가 반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영감은 불연듯 예기지 못한 순간에 번쩍하며 다가오고 그 깨달음의 정서적 반응은 활홀함이다.


2

저자가 후기에 적기를, 그의 인생은 여러 순간들이 모여 이뤄진 성곽과도 같은데, 그 순간 중에는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는 순간도 있다고 했다. 내가 성석제의 새 소설집 제목을 듣고 연상한 의미와 성 재담꾼이 애초에 의도한 의미 사이에는 이만큼의 의미 간격이 있었다. 하지만 두 의미에 같다(=)는 기호를 삽입해도 은유로서의 의미는 무리가 없을 듯도 싶었다.


3

아내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성석제의 말맛 때문이다. 성 씨의 글은 정말로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그의 글은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그 맛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작년엔가 요즘 각광받는 김영하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의 글은 읽기 어렵다. 특히 소리 내어 읽으려면 좀체 읽히지가 않는다. 의미 전달은 되는데 말 자체에 음악성이나 재미가 없다. 나는 이 책의 단편 몇 편을 그 자리에서 아내에게 읽어 주었는데, 한 편에 10분이면 충분히 낭독할 수 있었다, 글의 내용을 떠나서도 읽어내는 맛이 있었다. 아내에게 이 책을 선물한 두 번째 이유는 책 제목 때문이다. 책 표지에 모처럼 글을 적어 선물했는데, 글을 쓰며 인생을 살아가는 아내에게, 내가 처음 책 제목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많기를 바라며, 이 사람의 글이 아내의 글쓰기에 도움 되기를 소망하는 심정에서였다.


4

그가 전에 엽편소설이라 했던가. 원고지 2~10장 분량으로, 원하는 소재를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써내는 글. 서양에서는 콩트라고 하던가. 이번 책에서는 소설(小說)이라 했다. 어찌 보면 기이한 소재이지만, 글을 풀어내는 방식 때문인지 동네 사람들 얘기처럼 들린다. 32가지 얘기 중,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내가 아내에게 읽어 준 두 편, 즉 "말을 말하는 말"과 "찬양" 그리고 혼자 읽은 "도선생네 개"다. 앞의 두 편은, 공교롭게도, 전체 작품 중에서 가장 뼈있고 재미있는 농담이었고, "도선생네 개" 또한 말장난 같은 웃음 아닌 통쾌함을 자아내는 웃음을 선사했다.


5

성석제의 소설에는 어떤 경향과 사상을 찾기란 좀 모호하다. 그는 우선 재담꾼이란 생각이 든다. 얘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사람.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우선 읽고 듣는 맛이 먼저다. 내용과 사상은 그 다음에야 생각해야 한다. 이전 그의 소설,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허나 방향은 감지된다. 나는 그가 지향하는 방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어느 방향이냐고 묻는다면, 지금 딱히 설명해 주기에는 아직 내 정리가 미진하다.


6

그는 '소설은 직격이 아니라 은유'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고지식해지는 자신과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은유가 세상에 말하는 방법이자 길이자 전략이다.


7

글 잘 쓰는 사람이 드문 시대에 입담 좋은 소설가다. 파고들기가 무조건 의미 있다고, 그래서 작은 취미를 묘사하고 취미에 몰두하는 심경을 그려만 내도 가치 있다고 추켜세우는 시대에, 그보다는 한 겹 벗어난 시각에서 말하고 그려내는 그의 글을 나는 한동안 계속 읽게 될 듯싶다.


8

내게도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많아지기를, 내가 그 제목을 감잡은 의미에서 그러하기를. 또 비슷하게, 하늘이 열리는 경험 많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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