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정원 - 부모가 아이를 만들고 아이들이 미래를 만든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달팽이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아이들에게서 하나님을 보아요


아놀드 할아버지께,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손주를 여럿 두셨고 일흔을 넘기셨으니 사실 제게는 큰아버지뻘이신데, 책을 읽고 나니 당신께 할아버지, 하며 말을 건네고 싶어졌어요. 할아버지가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왠지 당신을 할아버지라 부르고 싶네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아놀드, 아마 당신 같은 분일 것만 같아요. 마흔 넘은 손자의 등을 두들기시며 세 아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장하다 말씀하실 것 같아요. 아놀드 할아버지! 막상 부르고나니, 어색하기는커녕 마음 편안하네요. 그래요, 실은 당신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기대어 이야기 좀 해보려고요. 들어주실 거죠? 듣고 나서 제 손도 잡아주시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세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고요.


할아버지의 책 「아이들의 정원」, 표지가 참 소박해서 놓칠 뻔했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권해주었기 망정이지, 서점에서 봤으면 지나치고 말았을 거예요. 지인의 권유가 있긴 했지만, 사실 책을 펼친 건 표지에 쓰인 할아버지 이름 때문이었어요.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아직 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세운 ‘브루더호프’라는 공동체에서 낸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할 그때, 할아버지의 이름을 처음 보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갖고 있는 책들을 꺼내보니, 할아버지가 쓴 책 여러 권과 함께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쓴 책들도 보이네요. (삼대가 공동체로 살면서 모두 책을 쓰셨군요!) 그 책들에서 공동체와 제자도, 가정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도전을 받았던 기억도 나요. 당시 저는 학생이었던 터라 브루더호프라는 낯선 이름이 구체적 현실보다는 찾아가야 할 어떤 지향처럼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 후로 십여 년이 흐르는 사이, 아끼는 후배 하나가 할아버지네 공동체에 들어가더니 (금발의 여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더군요. 또 최근에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가정이 그리로 이주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이 공동체가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제 삶의 언저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나 봅니다.


할아버지의 메시지는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래된 지혜’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많은 기회를 주고 웬만한 필요는 다 들어주려고 하는 요즘 양육 문화에 비춰보면 틀림없이 그래요. 할아버지는 지나친 기회가 오히려 아이를 망친다 하고, 모성이나 아버지됨, 존경, 훈육 같은 인기 없는 주제를 언급하시잖아요. “아이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 “진정한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를 훈육하라”는 말로 이 책을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역시 전통적이죠. 이 시대에는 인기 없는, 듣기 어려운, 그래서 잊혀진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그 오래된 지혜가 오히려 마음에 다가왔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옛 가르침의 필요를 절감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알 만큼 알고 할 만큼 한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그런데 정작 잘 모를뿐더러 아는 것과는 다르게 사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되요. 아이들과 몸은 같이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거나 온 마음으로 함께하지 않은 경우, 정말로 함께 ‘노는’ 게 아니라 놀아 ‘주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르침을 빌미로 아이의 마음에 상처와 죄책감을 덧씌우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부끄럽네요.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고, 할 만큼은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온 것 같아요. (좋은 아빠라는 착각과 자기 의를 지적해 주는 돕는 배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할아버지께선 “모든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시면서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까?”를 고민하는 부모가 별로 없다 하셨어요. 저 역시 아이에게 성을 내고 가르쳐 바꾸려고만 했지, 아이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했어요. 저희 교회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모든 아이는 임마누엘의 메시지라고. 가정 속의 아이는 곧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는 선물일진데, 아이를 뜯어고치려는 부모는 그러한 은총을 경험하기 어렵겠죠. 매일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하늘 아버지의 은총 안에 내가 있음을, 제대로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아이는 일깨워줘요.


얼마 전 딸과 이야기를 나눈 아내가 적은 글을 옮겨봅니다. “왜 나에게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주셨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을 많이 받으라고, 치유를 받으라고, 은혜를 누리라고, 부족함을 채우라고, 부족해도 괜찮다는 걸 깨달으라고. 네 인생에는 웃음이 갑절로 필요하다고, 어른이 되라고, 그래서 울타리를 세 겹으로 두르신 것 같다. 부모가 울타리가 아니다. 아이들이 울타리다.” 참으로 아이들은 ‘하나님의 메가폰’, 임마누엘의 메시지여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기억할게요.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은총임을 잊지 않을게요. 부모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를 지켜주는 울타리임을, 세상을 구하는 울타리임을 기억하고 사랑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아이들의 얼굴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얼굴 떠올릴게요.


언젠가 할아버지와 저희 가족, 만날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마음 다해 사랑하며 살아갈게요, 할아버지도 건강하셔야 해요. 하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죠!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12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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