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1820-?)
백의의 천사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녀가 일생에 정열적으로 사랑한 한 사람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간호사가 된 이유도 사랑하던 여성에게 결별을 선언당한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생을 환자들과 더불어 헌신하며 살았다.


미셸 푸코 (1926-1984)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노골적인 게이사우나 출입에 따른 비화도 유명하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성의 역사 등의 저작이 있고 성의 역사 시리즈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시초이자 중심이 되었다.


마르셀 프르스트 (1871-1954)
의식의 흐름을 좇는 형식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편으로 현대 문학의 최고봉에 이른 작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감추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나 여러 가지 복잡한 장치로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 동성애를 다루는 데 유행이었던 의학적 방법이 간과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담론을 활짝 열었...


버지니아 울프 (1882-1941)
올란도, 델러웨이부인, 세월, 자기만의 방 등의 작품을 남긴 20세기 초반 영국 최고의 여류 문인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 결혼생활을 지속했으나 사실상 그녀가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 성적 호감을 느낀 대상은 늘 여성이었고 그녀의 작품 속에서도 암시된다. 템즈강에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테네시 월리암스 (1911-198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의 극작가.동성애를 작품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의 작품속에 암시적으로 깔려있어 게이들의 존재를 미국 인의 의식세계에감동적인 방식으로 전달했다. 말년에 게이임을 밝히고 회고록에서 게이 문제를 진솔하게 밝혔다.


쥬디 그란 (1940-)
동성애 문화사 연구의 선구자.레즈비언이란 이유로 군대에서 불명예 제대를 당한 후 동성애인권운동에 뛰어 들었다.동성애자의 현재와 상징 및 규범의 기원과 뿌리 연구에 대해서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다.


알렌 긴즈버그 (1926-1997)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저항문학의 탁월한 정신적 지도자이며 세계적 시인.평생동안 자신이 게이임을 숨김없이 밝혀 왔으며 사람들에게 게이의 당당한 목소리를 들려 주었다.


하비밀크 (1930-1978)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게이 공직자.동성애자나 노인들과 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법안마련에 노력. 동료 시의원이 댄 화이트에 의해 암살당함.


앙드레 지드 (1869-1951)
좁은문, 지상의 양식, 사전꾼들, 전원교향악 등의 작가로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일생을 청교도적인 도덕과 동성애적 관능주의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자서전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동성애적 고백을 하고 있다. 그는 요즘의 우리가 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견해라 일컫는 것을 신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오스카 와일드 (1854-1900)
알프레드 경과의 동성애 재판으로 20세기 최고의 스캔들을 일으킨 극작가. 커밍아웃의 선구자. 댄디즘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로 일생동안 최대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경험한 인물이다.


알렉산더 대왕
동성애자는 유약하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 버린 남자.
어려서부터 동료였던 헤파에스티온을 사랑하여 그가 죽었을 때 미친 듯이 괴로워 했고 그를 살려내지 못한 의사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시켰다. 다른 고대문헌을 보면 페르시아 원정시 얻은 시동 바고아스를 사랑해 평생 동안 친구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렉산더 외에도 군인적 동성애자로는 시저, 트라잔, 프...


바이런
낭만주의자 시인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건널 수 없는 거리에 대해서 동료 낭만주의자들보다도 더 어둡고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습에 묶이지 않은 그의 동성애로 인해 아주 일찍부터 게이들의 상상력을 점화시킨 선구자였다. 19세기나 20세기의 비평가들은 바이런의 이러한 양성애적 기질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많은 사료가 말살되어졌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후에 대통령이 되어 버린 루즈벨트와 결혼해서 6명의 자녀를 두었고 여성의 권리, 세계 평화, 지구상에서 소외도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편에 서서 거리낌없이 활동함으로써 논란을 몰고 다녔던 영부인이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사생활은 대부분 여성들과 정열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교제한 것이었다.


다윗과 요나단
성서에서 다윗이 동성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다윗이 요나단을 보고 한 행동을 묘사한 장면으로서 "얼굴을 땅에 대고 세 번을 절을 하였다. 다윗이 진정될 때까지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렸다."인데 이 '눈물을 흘렸다'라는 내용을 원래의 히브리어로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넘치게 하다', 즉...


차이코프스키
동성애의 고통으로 번민했던 신경쇠약의 음악가. 1840년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신경을 지닌 아이었으며 음악적 재능 또한 남달랐다. 결혼을 했지만 일년만에 잘못된 결혼임을 인정했고 그가 진정 사랑에 빠졌던 것은 '봅'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의 관계는 플라토닉적으로 이어져 갔으며 봅 역시 35세의 나이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


세익스피어
그의 희곡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별 언급이 없고 단지 '뜻대로 하세요','십이야'등에서 일부 등장 인물이 다양한 혼성적 옷차림이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에피소드 등을 보여 주는 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1590년대 쓰여져 1609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소네트에서는 분명한 표현이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분석하자면 세...


성 아우구스티누스
354년생인 그는 실상 기독교 교육을 받거나 세례를 받은적은 없다. 학교도 비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다우로스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가 동성애에 빠진 것은 370년 경이며, 훗날 그의 '고백론'에 기술하고 있다. 이어 동양적 사상과 결부된 기독교의 한 형태인 마니교에 빠져들었으며, 마니교 역시 어떠한 성애도 용납하지 않았으나 동성애 ...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년 빈치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동성애자임을 알 리는 신호탄은 24살 때 17살 소년에게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상당히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노트들은 거울에 비춰봐야 바로 보이게끔 반대로 씌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파트너였던 세자르, 볼트라피오, 안드리아, 그리고 그의 입...


미켈란젤로
다비드 상, 시스틴 성당의 벽화 등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소네트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인 탁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은 대부분의 소네트는 젊은이들에게 주로 보내기 위한 연시였다. 57살에 토마소 드 카발리에리라는 멋진 젊은 귀족을 만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생애 동안 그에게 몰두했다. 수많은 소네트를 지어 그에게 보냈으며, 육체적 관계...


사포
사포는 기원전 6세기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태어난 섬의 이름이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을 빼면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 당시 레스보스섬의 귀부인들은 시를 지어서 낭송하는 자유스런 모임들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 남아있는 작품의 양이 아주 극소하지만 당시의 논객들도 오...


소크라테스
그리이스의 철학자로 사사로운 일상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온종일 올리브 나무 밑에 앉아 귀족 청년들과 정의, 덕, 경배, 영혼 등 철학적 주제들을 토론하며 지냈다고 한다. 청년들의 교사이자 연인이었던 그는 아테네의 관습이었던 동성애를 구현한 인물이었다.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하는 연상의 남자는 소년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소년이 체현하고 있는...


세자빈 봉씨
세종조의 세자빈 봉씨는 세자보다는 궁녀들과 동침하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이조실록(세종조 18년)에 나와있다. 봉씨는 폐출되었는데 심성이 포악했다는 것이 폐출당한 이유로 되어 있다. 후에 세종은 궁녀들간의 동성애 관계가 발각되면 곤장100대의 형벌을 처했다고 한다.


공민왕
고려사 세가 44권에 공민왕의 남색이 기록되어 있다. 부인 노국공주를 극진히 아꼈던 공민왕은 그녀가 죽은 후 정사를 멀리하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동침하고 가까이 했으며 소년들 사이에 질투와 시기로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지는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화랑
화랑의 남색풍습은 고대그리이스의 그것처럼 공공연하게 묵인 내지는 찬양되었다고 한다.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는 주요 의식 때 여자처럼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치장을 하였으며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사다함과 무관랑, 보종공과 염종공, 양도공과 흠순공 등의 우정을 벗어난 동성애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묘정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785년 묘정이 신라의 관리 및 당나라 황제에게까지 사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혜공왕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765년 8살의 나이에 즉위한 혜공왕은 행동이 여자와 같고 여자의 놀이를 즐기어 780년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