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왠지 효범의 방에 찾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들어오라는 마트료나의 목소리가 들려서 안을 들여다보니 침대에 앉아 있는 마트료나와 그의 옆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드나무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서있는, 교내의 과열된 인기로 인해 반쯤은 우상화된 그 인물은 바로 학생회장 빈나련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를 보러 왔던 여양과 지란은 졸지에 두 사람의 기세에 압도당해 학생회실에 불려나온 것처럼 인사를 꾸벅하고 한쪽 구석에 뻘쭘하게 서있어야만 했다. 나련은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 안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냥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어떤 용건인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여양의 대담한 질문에 효범이 한 마디 하려고 나섰으나 나련이 손을 살짝 내밀어 저지했다. 훈련이 잘 된 동물처럼 효범은 즉시 물러났다.

“이 아이가 전임 여왕이신 월랑님을 만났다고 주장해서,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 물어보고 있었을 뿐이야.”
“저에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어요.”
“네 말대로야.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아.”
“그렇다면 저에게 물어보시죠. 정신을 잃고 있던 마트료나를 발견한 건 저니까요.”
“그게 정말이야?”

침착하고 당당하던 나련의 얼굴과 목소리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는 여양의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카리스마 학생회장, 뿜어 나오는 힘에 압도당하는 듯 했다. 안광에 쏘여 몸이 간지러운 것만 같았다.

“네가 여왕님?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너에 대해선 알고 있어.”
“그 동영상을 보셨군요. 좀 부끄러운데…….”
“넌 용감하고 훌륭했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나 교직원을 부르길 바란다.”
“그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그게 어디였지?”
“북도에 있는 큰 정원이었어요. 원래 북도엔 함부로 가면 안 되는 거지만 저는 그날 여기에 막 도착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북도라면……”
“사계절 화원 말이구나.”

효범이 끼어들었다. 1학년 세 사람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그에게로 향했다. 효범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학교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이상한 정원이지. 꽃과 열매가 사계절 내내 피고 열리는 곳이야. 지금 같은 한겨울에도 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할 것이 없이 모두 만개해 있지. 제주도니까 따뜻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더운 한여름에도 사과며 체리가 열려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세상에, 말 그대로 사계절 내내 꽃이 핀 화원이란 말이죠?”

지란의 감탄을 들으며 여양은 그때 일을 되새겼다. 확실히 수벽과 회양목이 울타리처럼 둘러쳐 있어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진 못했지만 안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가 가득함을 본 기억이 난다.

그에 덧붙여 마트료나는 마치 백일몽과도 같았던 월랑과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말했다. 물론 자신의 비밀스러운 첫키스 이야기는 쏙 빼놓은 채였지만, 처음 그의 눈에 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곤돌라와 함께 사라진 일은 기억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말했다.

“모퉁이를 도니 사라졌다……라.”

효범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들 다섯은 어느새 방 가운데에 둘러앉아 지란이 사온 다과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효범의 의문에 마트료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하의 왼쪽은 수벽으로 막혔고 오른쪽은 화원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도록 탁 트여 있었어요. 가까이엔 나무 한 그루 없었고요.”
“확실히 그 큰 곤돌라를 숨기기엔 무리야. 자신의 몸이라면 수풀 사이에 엎드리거나 잠수라도 해도 숨을 수는 있겠지만.”

나련도 그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지란은 혼자 열심히 버석대며 과자를 먹고 있었고, 다른 네 사람은 골똘히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나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있었네. 너의 룸메이트는 언제 오는 거니? 벌써 시간이 꽤 늦었는데.”

마트료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보며 말했다.

“올 때가 되었어요. 아, 지금쯤 기도할 시간인 것 같은데……”
“기도?”

마치 효범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라는 듯 부리나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자 들어선 사람은 히잡을 두른 소녀, 마트료나의 룸메이트 나즐리였다. 외국 유학생이 많은 학교의 특성상 최대한 출신이 같은 유학생들끼리 방을 함께 쓰도록 유도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금년의 유학생 중에서 러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학생은 이들 둘 뿐. 그래서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가톨릭인 마트료나와 무슬림인 나즐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생각보다 금세 친해진 사이였다.

여양과 지란은 이미 만나서 인사를 나눈 사이지만 나련과 효범은 처음 보기에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즐리는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는 얼른 들어가 자기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나침반이었다.

“나 바보야, 나침반 잊었어.”

스스로를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마트료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즐리, 시간은?”
“괜찮아.”

나즐리의 한국어는 아직 능숙하지 않은지 짧았고 발음도 어색했다. 한국인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수준인 마트료나나 억양은 어색해도 낱말과 문법은 완벽한 체링에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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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real florist 2009-11-1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네여
 

예과 학생들은 오전에 학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각자의 전공과목 실기 수업을 받는다. 미술 특기자는 미술실로, 음악 특기자는 음악실로. 여양은 무용, 연기 특기자들과 함께 탈의실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무용 연습실로 이동했다.
이 학교의 명성대로 같이 배우는 아이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공모전이나 콩쿨 입상자, 아역 탤런트, 유명 연예인의 딸, 학생복 모델, 해외 명문 학교 유학생 등 화려한 전적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이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음악 선생님의 말만 듣고 겁도 없이 나갔던 전국 초중고 무용·연기 콩쿨에서 뮤지컬 부문 대상을 덜컥 받아버린 여양에 비하면 모두들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고 실력을 쌓은 엘리트들일 것이다.
반면 연습기간도 짧았고 자신도 없었기에 수상은 본인은 물론 주위 가족들도 예상을 못했던 일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오직 혼자 기대하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냈고 콩쿨 수상 실적을 내세워서 영화궁 고등학교 3년 장학생에 선정되었던 것이다.
어지간한 대학교에 맞먹는 입학금 및 수업료를 완전 면제받아 꿈같은 귀족 학교에서의 생활이 이로써 시작되나 싶었지만, 그의 앞에는 불행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또렷하게 기억이 남아 있진 않으나 비극적 사건으로 가족들은 목숨을 잃고 자신은 살아남았으나 일 년 가까이 의식불명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간신히 회복되긴 했지만 이미 이 년이나 학교를 못 가 그만큼 늦게 졸업을 한 상태. 다행히도 영화궁 측은 이 년 전에 부여한 입학 자격을 취소하지 않아서 가족도 잃고 병원비로 무일푼이 된 여양은 삼 년간 지낼 곳과 학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사건에서 여양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금윤에게 털어놓았던, 가족들이 자신의 몸에 뿌렸던 피보라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의사들은 그에게 그저 교통사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무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교통사고로 아버지의 목이 잘리며 피를 뿜어내는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수수께끼에 싸인 상태지만, 지금은 그저 의식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그 기억을, 여양은 언젠가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리라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끔찍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해도, 한 번은 직면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는 평생 그때의 고통과 호기심,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늘 보이지 않은 쇠창살로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공연히 슬픈 과거 일을 생각하다가 정신만 어수선해졌다. 그 바람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은 여양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1학년 4반 교실 앞으로 달려가 지란과 만났다.
교실 안을 슬쩍 살펴보니 도정은 친위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두기로 했다.

“체링도 데려갈까? 걔 2반이었지?”
“걔는 만나기가 힘들어. 점심시간이랑 수업 끝나기만 하면 도서관에서 가서 아주 산다나. 가끔 수업도 빼먹는다는데. 그냥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잘도 아네. 본인이 그래?”
“직접 들은 것도 있고, 워낙 내가 발이 넓어서. 이미 각 반에 친한 애들이 하나 이상씩은 있거든. 6반엔 아직 너밖에 없지만 말야.”
“그래. 지랄이보단 마당발이라고 불러주랴?”
“됐어, 됐어. 난 지랄이 편해. 빨리 매점에나 가자.”

지란은 여양의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둘이는 머리를 맞대고 수업 중에 일어난 재미있는 일을 들려주거나 유행가를 함께 부르기도 하면서 매점을 경유하여 기숙사로 향했다.


* * * * * * * * * *


사실 지란의 말대로 놀랄 일은 비데나 사각휴지만이 아니었다. 영화궁 고등학교의 최신시설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더욱 놀랄 만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가령 학교 건물이 있는 서도와 기숙사가 있는 동도 사이를 잇는 다리는 승개교(Lift Bridge)라고 하는, 다리의 중간 부분이 통째로 들어 올려져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리이다. 비록 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다리는 야간 취침시간이 되면 학생들의 통행을 막기 위해 중간부분이 솟아오르고, 신입생들은 종종 기숙사 창문에서 혹은 현관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아직 실물을 본 학생은 없다지만 다섯 개의 섬이 꽃잎처럼 배치된 한 가운데 부분엔 해저 수족관이 건설중이고 북도에서 유리로 둘러싸인 터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학생회관 입구에 세워진 완공 예상도만 보면 충분히 환상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기대를 모을 만 했다.

그 외에 유일하게 고풍스럽게 만들어진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기숙사를 제외하고 도서관, 학생회관, 편의시설 등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밖에 설치된 자판에 올라갈 층수를 누르면 해당되는 엘리베이터의 번호가 찍히면서 문이 열려 그것에 타면 되는 방식이다.
이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신입생들은 멋모르고 무조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탔다가 아무런 버튼도 없는 걸 알고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같은 경험을 되풀이한 여양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양 자신이 어린 교장, 해저 수족관과 더불어 학교의 7대 불가사의로 부르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접했음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여양과 지란이 마트료나의 방에 왔을 때 거기엔 이미 방문객이 와 있었다. 노크를 하려고 손등을 문 쪽으로 하며 팔을 들었을 때 안에서 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하진 않았으나 두 사람이 있는 듯 했다. 가볍게 두드리자 물음이나 대답도 없이 문이 바로 열렸는데, 마트료나가 아니었다.

“너는…… 여왕님?”

그가 물었다. 키가 훤칠하고 가슴이 커서 어디서든 눈에 확 띌 만한 사람이었다. 교복의 타이와 명찰의 색깔이 주황색이기 때문에 3학년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학생회 부회장 포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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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 2009-09-0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

pilza2 2009-09-07 21: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왜 눈물이 나는 거지ㅠ_ㅠ)
 

퍽, 하고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환청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의 몸이 컴퓨터라면 퓨즈 하나가 터지면서 튀어 나가는 소리였지 싶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장학금 받고 들어온 사람을 얻어먹는 거지 취급을 하다니.
그러니까 자신은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막대한 기부금을 낸 부잣집의 딸이고, 너는 자신들이 낸 돈으로 와서 공부하고 먹고 자는 것이니까 까불지 말라? 분노와 모멸감이 채찍처럼 전신을 후려쳤다. 얼굴에 냉수를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찮으니까 대충 하고 지나치자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어이, 도정 씨. 나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안 그래도 오줌 마려워서 화장실가던 참인데 너를 보고 있자니까 똥까지 마려워.”
“뭐야? 이건 진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설치는 거야, 뭐야? 내가 말이지, 안 그래도 너한테 이름을 하나 만들어주려고 했어. 너 같은 애한테 지금 그 이름은 안 어울려. 차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여 씨 어때 여 씨? 여가나 여 뭐시기는 솔직히 조금 기분 나쁠 테니까, 나름 생각해준 거야.”
“여양은 어때? 김양, 이양, 여양.”

그때 뒤에서 소프라노로 웃기만 하던 친위대 아이 하나가 슬쩍 말했다. 큰 키에 여드름, 도정과는 반대로 가난과 비굴함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뚝뚝 떨어지는 아이였다. 도정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오호, 그래! 그거 좋네, 여양! 부르기도 좋고 외우기도 쉽고. 넌 오늘부터 여양이야, 알겠어? 내가 삼 일 안에 전교에 퍼뜨려주겠어. 고맙게 생각해.”
“흥. 설마 도정이보다 빨리 퍼지기야 하겠어? 안 그러냐, 도정아?”

웃었다, 화냈다. 도정의 표정은 잠시도 고정될 줄을 몰랐다. 이러면 놀리는 쪽도 보람이 있는 법이다. 여양처럼 시종 침착함을 잃지 않는 쪽은 도발하고 약 올려도 왠지 실패한 것 같이 찜찜할 뿐이다. 반면 도정과 같이 금방 반응을 보여주는 쪽이 훨씬 재미있다.

“너, 두고 봐. 선생님들까지 나를 도정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지금도 가만히 안 두면서 뭘 새삼 그러냐, 도정아. 그리고 난 여양이라고 불려도 별로 신경 안 써. 고양이 같아서 좋은데. 안 그래, 도정아?”
“아 거 말끝마다 자꾸 도정이, 도정이 하지 마! 하여간 앞으로 조심해!”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일까. 여양을 놀려서 화내게 할 작정이었던 도정은 되레 자기가 화가 난 채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래가지곤 꼭 내가 진 거 같잖아. 도정은 혼자서 궁시렁거리면서 옵션들을 줄줄이 매달고 가던 길로 가버렸다. 여양이 된 여왕님은 참았던 급한 일을 해결하러 화장실로 서둘렀고.
그리고 싸웠던 일이니 별명이니 하는 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평소 성격 그대로 화장실을 나올 무렵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신 변기마다 설치된 비데와 비치된 휴지가 전부 크리넥스 사각휴지라는 점에 감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야 뭐 뉴스에도 날 정도로 유명한 귀족 학교니까. 근데 사각휴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니? 여양이라고 불러도 돼?”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나는 여왕님이라고 불리는 게 더 싫으니까.”
“알았어.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양 않고 여양이라 불러 드리지요.”
“대신 넌 앞으로 계속 지랄이다?”
“맘대로 하시죠. 벌써 우리 반 애들은 나만 보면 지랄한다고 부르걸랑.”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지란이와 도정은 같은 반이다. 그렇다면 교사들까지 도정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지란의 공헌이 크지 않았을까. 분명 지란이라면 지랄한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크게 웃고 떠들었을 것이다. 친위대까지 거느릴 정도의 위세니까 본인 앞에서 말하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학생수첩의 무신통신에 의한 자동 체크가 되기 때문에 출석은 부르지 않지만 문제를 풀거나 교과서를 읽기 위해 학생의 이름을 호명하는 경우는 많다. 그때 선생님이 북도정을 부르면 지란이 조그맣게 “도정이다, 도정이”하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도 재미있으니까 따라 하고 선생님도 그걸 듣게 되어 자신도 그렇게 부르게 되는, 그런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전파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도정이 여양에 대한 미움을 키운 이유는 별명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던졌던 걸리적 거리지 말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고, 입학식날 했던 교내방송에서도 언급했듯이 교내에 화제가 된 신입생은 북도정이 아니라 여왕님이라는 사실이 거북했던 것이다.
태북그룹 3세로써 신입생이지만 대담하게도 여왕 자리에 출사표를 던진 화제의 인물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왔던 그로써는 ‘듣보잡’에게 모든 시선과 관심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으니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심경을 이해한다고 쳐도 자신을 거지 취급하는 건방진 부잣집 따님의 놀림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손톱에 낀 때만큼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양은 자신의 추측이 옳은지 굳이 지란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마침 그때 지란이 반쯤 혼잣말하던 하던 말이 귀에 쏙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마트료나는 뭐라고 부르지? 역시 마트라고 부를까?”

별안간 지란은 자기 친구들 별명 지어주는데 심취한 모양이었다. 이름 자체가 별명이나 다름없었던 여왕님마저 여양이라는 나름 귀여운 별명이 생긴 이상 안 그래도 부르기 어려운 러시아 이름을 가진 친구에게 그에 못잖은 애칭을 붙여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참, 마트료나가 오늘까지 쉬는 거지?”
“응. 내일부턴 다시 수업 받으러 올 거야. 근데 왜?”
“아니, 그냥. 오늘도 문병가야지 싶어서.”
“그래, 같이 가자. 과자 사갖고.”
“너는 맨날 너 혼자 다 먹으면서……”
“그래도 내 돈으로 사는 거잖아!”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수업시작 예비종이 울렸다. 지란은 손을 흔들며 자기 교실로 돌아갔고, 여양은 오후의 연기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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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또 들린다.

“……여양! 여양아!”

이번에는 그립지도 반갑지도 않은, 그저 얼굴 앞을 맴도는 날파리처럼 귀찮고 성가신 소리였다.

“여양……!”
“아, 그만 좀 불러! 안 죽었으니깐!”

고개를 번쩍 들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자연히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다.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얼굴이 물파스를 바른 듯 화끈거려 다시 책상으로 떨구었다. 하지만 지란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안 그러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여양, 자니?”
“나 좀 내버려둘래?”
“그렇게는 못하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어떻게 가만히 놔둬.”

지란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며 히히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매점에서 산 과자봉지. 과연 점심시간의 번잡한 매점을 뚫는 솜씨만은 인정할 만 했다. 사실 영화궁은 현금거래를 안 하니까 계산이 무척 빨라 기다리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여양아, 나 소문 다 듣고 왔거든? 너랑 북도정이랑 또 충돌했다며?”

지란이 여왕님, 아니 이젠 여양으로 불리고 있는 여양의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의 짧은 잠조차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자고로 오후의 짧은 잠은 소화와 피로회복에 특효약이라 하지 않았는가.

“근데 또라니 무슨 또?”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불만을 제기하자 지란은 연극적인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뭘 그래. 벌써 소문 쫙 깔렸다니까! 입학하자마자 여왕 자리를 노리는 무서운 신입생 두 사람. 하나는 이 학교를 만드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 태북그룹의 3세 북도정! 나머지 한 사람은 혜성처럼 날아와 나이프 사건을 해결하고 여왕이 되겠노라 출사표를 던진 풍운아, 그 이름도 여왕님! 아아, 두 사람의 장절한 싸움은 오늘도 복도에서 끊이지 않는구나!”
“지란아, 지랄 그만 하고 좀 가줄래? 싸운 게 아니라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뿐이고……”

이름으로 놀리는 게 싫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평소엔 부르지 않는 ‘지랄’이란 별명을 입에 담는 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났거나 수면 방해가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물론 후자의 이유가 컸지만 여양과는 달리 자신의 별명을 창피하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지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다. 오히려 그만큼 친밀해졌다는 증거이므로 반가우면 반갑지 기분 상할 일은 없었다.

“너도 알지? 도정이 친위대 애들. 걔들이 벌써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어. 너는 이제 여양으로 유명해져서 다들 여양이라고 부르고 있어. 너 같은 애를 여왕님이라고 불러준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거지.”

그건 이미 여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오늘 오전 쉬는 시간, 음악 수업을 위해 이동을 하던 북도정과 화장실을 가던 여양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북도정의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 특히 같은 반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쫓아다니는 소위 친위대 애들이 어미를 따르는 오리 새끼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귀찮게 시비를 걸거나 해서 서로 감정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약간 벽 쪽으로 돌리고 걸음을 빨리 해서 지나가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북도정은 걸음은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든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동자만 이동하여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는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하신…… 이름이 뭐더라?”

다분히 깔보는, 사람 성질 긁는 말이었다. 어투부터 내용까지 전부. 당연히 두 다리가 그대로 멈췄고 상대의 얼굴을 시력검사표처럼 쏘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도발이 먹혔다는 생각에 북도정은 더욱 강하게 선공을 퍼부었다.

“이름이 뭐지? 넌 아니? 너도 몰라? 그래, 맞아 성이 여 씨였지? 여 씨? 여가? 여 뭐시기?”

넌 아냐면서 뒤에 있는 애들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물어보는 등 천연덕스러운 행동이 마치 예행연습이라도 한 듯 했다. 그도 아니면 연극 특기생으로 들어왔다든지. 그래놓고 자기들끼리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웃어대었다. 사람 하나 세워놓고 바보 만드는 꼴이 한심해보여서 한 마디 쏘아붙였다.

“너 보니까 무슨 그라디우스 같다.”
“응? 글래디에이터?”

북도정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재벌 3세 아가씨가 알 리가 없겠지만, 여양은 80년대 고전 오락을 좋아하는 오빠의 영향으로 옛날 게임을 비교적 많이 해본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뒤에 옵션들을 줄줄이 달고 날아가는 빅 바이퍼의 활약을 그린 슈팅 게임 그라디우스. 똘마니들을 이끌고 다니는 북도정의 모습에서 그걸 연상한 것이었다.

“모르면 다른 비유를 들어줄게, 도정아. 꼭 새끼 오리들이랑 마실 가는 엄마 오리 같다, 도정아?”
“오리? 도정이?”

도정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졌다. 상대를 슬슬 약 올리는 것은 그렇게 즐기더니, 막상 자신이 그 대상이 되자 조금도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 말이야, 이름만 믿고 언감생심 이 학교의 여왕 자리를 노리는 모양인데, 여왕이 아무나 되는 자리인 줄 알아? 택도 없는 소리지. 우리 언니들, 태북그룹의 후계자들도 얻지 못했던 자리라고. 그러니까 내가 꼭 되고 말 거야. 1학년 때 여왕에 즉위하여 3년간 이 학교를 지배하는 최초의 케이스가 될 거라고. 근데 너 같은 게……. 너 뮤지컬 특기생이라며?”

어느새 조사한 걸까. 아마도 새끼 오리들이 여기저기 묻고 다녔겠지. 오리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학생으로 와서 공짜로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시지. 괜히 나 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게 만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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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월랑님을…… 만나고 싶어…….”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는 나련을, 효범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동안 감추었던 울보 빈나련의 모습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십 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효범의 품에 안긴 채로 말이다.
효범의 심장은 날카로운 메스로 갈가리 찢기고 벌려져 그 속에 담긴 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놓은 듯 했다. 절대로 나련에게 들려줄 수 없는 고백, 친구라 믿고 있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난…… 어쩌면 좋아, 효범아? 그 분이 졸업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팠는데, 사라진 후에는 더 견딜 수가 없었는데……. 그 분이 이 학교 어딘가에 있는데도 만날 수 없다니. 이 작은 섬에서,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도…….”

나련은 꺽꺽 소리를 내며 섧게 울었다. 효범은 그저 얼굴과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여주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지금의 나련에게는 불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나련은 한 바탕 크게 울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린 것처럼 기운을 되찾고는 평소의 냉정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가끔 이렇게 자신의 품에 맘껏 우는 것이 나련에게도 좋았지만 효범에게는 더욱 행복한 일이었다. 친구의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꾸짖으면서도, 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자신을 믿고,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순간이니까.

난 이기적인 애야, 나련아. 효범은 그 말을 가슴에만 새겨놓고 있었다. 언젠가는 들려주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나련을 따스하게 안아주면 그걸로 좋았다. 나련은 늘 자신의 큰 키와 넓은 등, 그리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좋아했다. 품에 안기면 꼭 어릴 적 엄마의 품 같다고 말하곤 했다.
보이시한 외모 덕에 여자애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효범으로써는 커지는 가슴을 보며 뭐라 말하기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련이 자신의 가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소녀들의 왕자님이 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존재였지만 효범은 원치 않는 인기를 성가시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효범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소녀들의 일시적인 열광이 아니었다.

그래서 효범은 가슴이 커지는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었다. 맞는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하고, 가슴을 감추기 위해 품이 큰 옷을 입는다거나 하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몇몇 학생들로부터는 ‘우리 왕자님의 유일한 단점은 큰 가슴’이라는 뒷담화도 듣긴 하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팬은 한 명이면 족했다. 그 자신이 그렇듯.

“……효범아.”
“응?”

울음을 그친 나련은, 눈가와 뺨을 흥건하게 적신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고개를 들어 효범을 바라보곤 말했다.

“너 가슴, 더 커진 것 같아.”
“윽, 그래?”

하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남들과 다른 걸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기만 하는 건지. 오죽하면 한동안 우유를 끊은 적도 있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는 나련의 지적을 받고 일주일도 못 되어 그만둔 기억이 새로웠다.

“괜찮아. 난 네 가슴이 좋으니까. 이렇게 네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그래, 나련아. 가슴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게. 내 가슴은, 네 것이니까.”

그리고 나 또한. 효범은 속으로 덧붙였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갸름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는다. 뺨에 긴 흔적을 남긴 눈물을 닦아내고, 도톰한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매만진다.
언젠가 이 입술은 내 것이 되겠지. 혼자만의 은밀한 욕망을 알을 품는 어미새처럼 살짝 엿보고는 도로 감춘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련은 아무런 사심 없이 친구에게 말했다.

“효범이 너, 이만하면 D컵은 되겠는데?”
“말도 안 돼! 내 가슴이 그렇게 클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레이싱 모델이야?!”

“그런가? 하긴 난 사이즈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넌 전교에서도 수위에 들 거야.”
“별로 안 들어도 상관없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가슴 크기 따위. 뭐 나중에 애를 낳으면 아기는 좋아하겠네.”

“서방님도 좋아할 걸. 후후.”
“뭐? 나련이 네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월랑님한테 옮았나봐.”

월랑. 또 월랑이다. 흐물거리던 효범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월랑을 만난 이후다. 그 이후 나련은 자신보다 더 그 사람을 오래 쳐다보았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만 했다. 지겹도록 자신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왔다.

왜, 어째서. 아름답긴 하지만,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여왕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성격에 귀여운 여자애들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그 ‘카사노바 여왕님’에 나련은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효범아, 부탁이 있어.”

마음껏 울고 나니 짐을 벗어던진 듯 후련해진 것인가, 훨씬 가벼운 목소리로 나련은 말했다. 그는 늘 그렇듯 부탁이라고 말하지만, 효범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히 들어줘야 할 명령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낼 사명에 다름 아니었다. 아직 듣지도 않았지만, 효범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니까.

“월랑님과 만났다는 그 아이, ‘나이프 사건’의 피해자였던 그 러시아에서 왔다는 신입생을 만나고 싶어.”

효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금윤이 고기 자르는 나이프로 신입생의 목을 겨누며 벌였던 짧은 인질극을 학생들은 나이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 이상 짧으면서도 간단명료한 표현을 달리 찾을 수가 없기에 학교 측과 학생회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 결과 금윤은 한 달 간의 정학 처분을 받고 이사회 건물 지하에 있다는 속칭 감방에 갇혀 있다. 정식 명칭은 반성실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고 교사들 조차도 감금방이나 벌칙방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물론 감방, 감옥으로 통하고 있고 거기에 다녀오는 것을 옥살이한다, 징역 며칠이다, 며칠 동안 썩고 왔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즉 금윤은 징역 한 달에 처해져 한 달 동안 썩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피해자인 마트료나는 간단한 정신감정을 받고 큰 충격을 받거나 후유증에 시달리지는 않는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일주일간 쉬도록(이 경우는 기숙사 자기 방에서 지낼 수 있다) 했다. 따라서 마트료나는 입학식에 불참했고 오늘도 자기 방에 있을 터였다.

“지금 가서 만나고 싶은데, 될까?”
“특별히 면회 금지 같은 말은 못 들었으니까 가능할 거야.”

“좋아, 당장 가자. 지금 바로.”
“지금?”

효범이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나련은 단호했다. 다시 당당하고 깐깐한 리더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에게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효범은 잠깐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표정을 지었으나 지금껏 그렇듯 이내 나련의 충실한 보좌관으로 돌아가 학생회장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서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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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08-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조회수와 추천수가 확 줄어든 것은 본격적으로 백합스러운 내용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긴 처음엔 주인공이 입학하는 장면 등 단순한 청춘소설처럼 보여서 신선한 느낌이 들었겠지만, 앞으로 더욱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백합의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독자들을 아주 쫓아내는군;). 그래도 수위는 알아서 조절할 테니 심려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