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하고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환청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의 몸이 컴퓨터라면 퓨즈 하나가 터지면서 튀어 나가는 소리였지 싶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장학금 받고 들어온 사람을 얻어먹는 거지 취급을 하다니.
그러니까 자신은 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막대한 기부금을 낸 부잣집의 딸이고, 너는 자신들이 낸 돈으로 와서 공부하고 먹고 자는 것이니까 까불지 말라? 분노와 모멸감이 채찍처럼 전신을 후려쳤다. 얼굴에 냉수를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찮으니까 대충 하고 지나치자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어이, 도정 씨. 나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안 그래도 오줌 마려워서 화장실가던 참인데 너를 보고 있자니까 똥까지 마려워.”
“뭐야? 이건 진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설치는 거야, 뭐야? 내가 말이지, 안 그래도 너한테 이름을 하나 만들어주려고 했어. 너 같은 애한테 지금 그 이름은 안 어울려. 차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여 씨 어때 여 씨? 여가나 여 뭐시기는 솔직히 조금 기분 나쁠 테니까, 나름 생각해준 거야.”
“여양은 어때? 김양, 이양, 여양.”
그때 뒤에서 소프라노로 웃기만 하던 친위대 아이 하나가 슬쩍 말했다. 큰 키에 여드름, 도정과는 반대로 가난과 비굴함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뚝뚝 떨어지는 아이였다. 도정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오호, 그래! 그거 좋네, 여양! 부르기도 좋고 외우기도 쉽고. 넌 오늘부터 여양이야, 알겠어? 내가 삼 일 안에 전교에 퍼뜨려주겠어. 고맙게 생각해.”
“흥. 설마 도정이보다 빨리 퍼지기야 하겠어? 안 그러냐, 도정아?”
웃었다, 화냈다. 도정의 표정은 잠시도 고정될 줄을 몰랐다. 이러면 놀리는 쪽도 보람이 있는 법이다. 여양처럼 시종 침착함을 잃지 않는 쪽은 도발하고 약 올려도 왠지 실패한 것 같이 찜찜할 뿐이다. 반면 도정과 같이 금방 반응을 보여주는 쪽이 훨씬 재미있다.
“너, 두고 봐. 선생님들까지 나를 도정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지금도 가만히 안 두면서 뭘 새삼 그러냐, 도정아. 그리고 난 여양이라고 불려도 별로 신경 안 써. 고양이 같아서 좋은데. 안 그래, 도정아?”
“아 거 말끝마다 자꾸 도정이, 도정이 하지 마! 하여간 앞으로 조심해!”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일까. 여양을 놀려서 화내게 할 작정이었던 도정은 되레 자기가 화가 난 채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래가지곤 꼭 내가 진 거 같잖아. 도정은 혼자서 궁시렁거리면서 옵션들을 줄줄이 매달고 가던 길로 가버렸다. 여양이 된 여왕님은 참았던 급한 일을 해결하러 화장실로 서둘렀고.
그리고 싸웠던 일이니 별명이니 하는 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평소 성격 그대로 화장실을 나올 무렵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신 변기마다 설치된 비데와 비치된 휴지가 전부 크리넥스 사각휴지라는 점에 감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야 뭐 뉴스에도 날 정도로 유명한 귀족 학교니까. 근데 사각휴지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니? 여양이라고 불러도 돼?”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나는 여왕님이라고 불리는 게 더 싫으니까.”
“알았어.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양 않고 여양이라 불러 드리지요.”
“대신 넌 앞으로 계속 지랄이다?”
“맘대로 하시죠. 벌써 우리 반 애들은 나만 보면 지랄한다고 부르걸랑.”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지란이와 도정은 같은 반이다. 그렇다면 교사들까지 도정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지란의 공헌이 크지 않았을까. 분명 지란이라면 지랄한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크게 웃고 떠들었을 것이다. 친위대까지 거느릴 정도의 위세니까 본인 앞에서 말하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리라.
학생수첩의 무신통신에 의한 자동 체크가 되기 때문에 출석은 부르지 않지만 문제를 풀거나 교과서를 읽기 위해 학생의 이름을 호명하는 경우는 많다. 그때 선생님이 북도정을 부르면 지란이 조그맣게 “도정이다, 도정이”하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도 재미있으니까 따라 하고 선생님도 그걸 듣게 되어 자신도 그렇게 부르게 되는, 그런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전파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도정이 여양에 대한 미움을 키운 이유는 별명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던졌던 걸리적 거리지 말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고, 입학식날 했던 교내방송에서도 언급했듯이 교내에 화제가 된 신입생은 북도정이 아니라 여왕님이라는 사실이 거북했던 것이다.
태북그룹 3세로써 신입생이지만 대담하게도 여왕 자리에 출사표를 던진 화제의 인물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왔던 그로써는 ‘듣보잡’에게 모든 시선과 관심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으니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심경을 이해한다고 쳐도 자신을 거지 취급하는 건방진 부잣집 따님의 놀림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손톱에 낀 때만큼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양은 자신의 추측이 옳은지 굳이 지란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마침 그때 지란이 반쯤 혼잣말하던 하던 말이 귀에 쏙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마트료나는 뭐라고 부르지? 역시 마트라고 부를까?”
별안간 지란은 자기 친구들 별명 지어주는데 심취한 모양이었다. 이름 자체가 별명이나 다름없었던 여왕님마저 여양이라는 나름 귀여운 별명이 생긴 이상 안 그래도 부르기 어려운 러시아 이름을 가진 친구에게 그에 못잖은 애칭을 붙여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참, 마트료나가 오늘까지 쉬는 거지?”
“응. 내일부턴 다시 수업 받으러 올 거야. 근데 왜?”
“아니, 그냥. 오늘도 문병가야지 싶어서.”
“그래, 같이 가자. 과자 사갖고.”
“너는 맨날 너 혼자 다 먹으면서……”
“그래도 내 돈으로 사는 거잖아!”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수업시작 예비종이 울렸다. 지란은 손을 흔들며 자기 교실로 돌아갔고, 여양은 오후의 연기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