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월랑님을…… 만나고 싶어…….”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는 나련을, 효범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동안 감추었던 울보 빈나련의 모습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십 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효범의 품에 안긴 채로 말이다.
효범의 심장은 날카로운 메스로 갈가리 찢기고 벌려져 그 속에 담긴 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놓은 듯 했다. 절대로 나련에게 들려줄 수 없는 고백, 친구라 믿고 있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난…… 어쩌면 좋아, 효범아? 그 분이 졸업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팠는데, 사라진 후에는 더 견딜 수가 없었는데……. 그 분이 이 학교 어딘가에 있는데도 만날 수 없다니. 이 작은 섬에서,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도…….”
나련은 꺽꺽 소리를 내며 섧게 울었다. 효범은 그저 얼굴과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여주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지금의 나련에게는 불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나련은 한 바탕 크게 울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린 것처럼 기운을 되찾고는 평소의 냉정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가끔 이렇게 자신의 품에 맘껏 우는 것이 나련에게도 좋았지만 효범에게는 더욱 행복한 일이었다. 친구의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꾸짖으면서도, 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자신을 믿고,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순간이니까.
난 이기적인 애야, 나련아. 효범은 그 말을 가슴에만 새겨놓고 있었다. 언젠가는 들려주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나련을 따스하게 안아주면 그걸로 좋았다. 나련은 늘 자신의 큰 키와 넓은 등, 그리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좋아했다. 품에 안기면 꼭 어릴 적 엄마의 품 같다고 말하곤 했다.
보이시한 외모 덕에 여자애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효범으로써는 커지는 가슴을 보며 뭐라 말하기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련이 자신의 가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소녀들의 왕자님이 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존재였지만 효범은 원치 않는 인기를 성가시다고만 여길 뿐이었다.
효범이 절실히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소녀들의 일시적인 열광이 아니었다.
그래서 효범은 가슴이 커지는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었다. 맞는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하고, 가슴을 감추기 위해 품이 큰 옷을 입는다거나 하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몇몇 학생들로부터는 ‘우리 왕자님의 유일한 단점은 큰 가슴’이라는 뒷담화도 듣긴 하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팬은 한 명이면 족했다. 그 자신이 그렇듯.
“……효범아.”
“응?”
울음을 그친 나련은, 눈가와 뺨을 흥건하게 적신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고개를 들어 효범을 바라보곤 말했다.
“너 가슴, 더 커진 것 같아.”
“윽, 그래?”
하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남들과 다른 걸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기만 하는 건지. 오죽하면 한동안 우유를 끊은 적도 있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는 나련의 지적을 받고 일주일도 못 되어 그만둔 기억이 새로웠다.
“괜찮아. 난 네 가슴이 좋으니까. 이렇게 네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그래, 나련아. 가슴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게. 내 가슴은, 네 것이니까.”
그리고 나 또한. 효범은 속으로 덧붙였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갸름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는다. 뺨에 긴 흔적을 남긴 눈물을 닦아내고, 도톰한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매만진다.
언젠가 이 입술은 내 것이 되겠지. 혼자만의 은밀한 욕망을 알을 품는 어미새처럼 살짝 엿보고는 도로 감춘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련은 아무런 사심 없이 친구에게 말했다.
“효범이 너, 이만하면 D컵은 되겠는데?”
“말도 안 돼! 내 가슴이 그렇게 클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레이싱 모델이야?!”
“그런가? 하긴 난 사이즈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넌 전교에서도 수위에 들 거야.”
“별로 안 들어도 상관없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가슴 크기 따위. 뭐 나중에 애를 낳으면 아기는 좋아하겠네.”
“서방님도 좋아할 걸. 후후.”
“뭐? 나련이 네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월랑님한테 옮았나봐.”
월랑. 또 월랑이다. 흐물거리던 효범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월랑을 만난 이후다. 그 이후 나련은 자신보다 더 그 사람을 오래 쳐다보았고 그의 곁에 있으려고만 했다. 지겹도록 자신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왔다.
왜, 어째서. 아름답긴 하지만,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여왕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성격에 귀여운 여자애들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그 ‘카사노바 여왕님’에 나련은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효범아, 부탁이 있어.”
마음껏 울고 나니 짐을 벗어던진 듯 후련해진 것인가, 훨씬 가벼운 목소리로 나련은 말했다. 그는 늘 그렇듯 부탁이라고 말하지만, 효범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히 들어줘야 할 명령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낼 사명에 다름 아니었다. 아직 듣지도 않았지만, 효범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니까.
“월랑님과 만났다는 그 아이, ‘나이프 사건’의 피해자였던 그 러시아에서 왔다는 신입생을 만나고 싶어.”
효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금윤이 고기 자르는 나이프로 신입생의 목을 겨누며 벌였던 짧은 인질극을 학생들은 나이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 이상 짧으면서도 간단명료한 표현을 달리 찾을 수가 없기에 학교 측과 학생회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 결과 금윤은 한 달 간의 정학 처분을 받고 이사회 건물 지하에 있다는 속칭 감방에 갇혀 있다. 정식 명칭은 반성실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고 교사들 조차도 감금방이나 벌칙방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물론 감방, 감옥으로 통하고 있고 거기에 다녀오는 것을 옥살이한다, 징역 며칠이다, 며칠 동안 썩고 왔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즉 금윤은 징역 한 달에 처해져 한 달 동안 썩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피해자인 마트료나는 간단한 정신감정을 받고 큰 충격을 받거나 후유증에 시달리지는 않는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일주일간 쉬도록(이 경우는 기숙사 자기 방에서 지낼 수 있다) 했다. 따라서 마트료나는 입학식에 불참했고 오늘도 자기 방에 있을 터였다.
“지금 가서 만나고 싶은데, 될까?”
“특별히 면회 금지 같은 말은 못 들었으니까 가능할 거야.”
“좋아, 당장 가자. 지금 바로.”
“지금?”
효범이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나련은 단호했다. 다시 당당하고 깐깐한 리더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에게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효범은 잠깐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표정을 지었으나 지금껏 그렇듯 이내 나련의 충실한 보좌관으로 돌아가 학생회장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서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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